언제부터인가 나는 글을 쓸때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게 됐다.
보여주는 글을 쓸때, 특히 더 그렇다.
또한, 의식된다면...아예 쓰지 않는다.
내가 의식의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만의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훈련이 필요했다. 내가 글을 써놓고 정작 내가 나를 의식하는 글이란...
사실 이것이야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의 시 한 편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다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나의 직관은 김수영 시인의 그런 태도만은 내가 흡수해야 한다고 나에게 알려줬다.
글에서는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지만, 글을 쓸때는 오직 나 혼자 생각을 옮길 뿐이지만,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사실은 너무나 조심 스럽다. 사람은 도자기와 같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조금만 부주의 하면 깨뜨려 진다. 그러나 또, 생각보다 도자기는 강하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맥없이 깨져 버릴 수 있는게 도자기이다. 그렇다고 도자기를 신주단지 모시듯만 할수는 없다. 사용 되어야 가치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깨질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자연스럽게 잘사용해야 하는 것이 도자기이다. 도자기가 깨지면 조침문처럼 추모의 글이라도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안따깝기도 하다. 그러나, 깨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상에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 도자기이다. 사람도 그렇다. 서로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사용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인간이다.
글은 나의 의식의 자유를 반영하지만, 의식의 자유가 반영될수 있도록 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 하지만, 사람에게서 서로의 자유는 포지션을 정확히 할 때이다. 그것에 대하여 자신이 받아 들여져야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받아 들일때 그때가 서로가 혹은 관계가 자유로워지는 때이다. 포지션 이동만 한다고 관계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글과 도자기와 사람.... 다를 것이 있겠는가...
이 안에 깃들 자신의 태도가 혹은 태도의 변화가 많은 것을 결정한다. 포지션은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또한 그 포지션을 자기것화
하는 것에는 분명 자기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냥 되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