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할수있는것이 아니죠.
내가 한다, 는 것이
육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육체가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의사결정의 자각력을 지닌 실체라는
전지적 지각시점에서 본
편의상의 표현이듯
사랑한다, 는것도 편의상의 표현이죠.
그러나 사랑은
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사랑할수 없죠.
나쁜사람이지만 사랑해라.
나보다 떨어지는 불쌍한 사람이지만 동등하게 보아라.
못생긴것 조차도 아름답게 보라.
부정적인 생각은 버려라.
같은게 소위말하는
도덕교육, 인격함양이죠.
이것이
잘못되진 않았어요.
여기까지 독려하고 분투해보지 않았더라면
지각과 마음에 한계가 있으며
그렇다면
인간은 영영
상대적 지각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인가
라는
깊은 절망을
뼛속깊이 통감할수 없었겠죠.
모두가 노력하고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데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하는데도
어째서 결국
더 많은 고통에 대한 책임만을 안게되는지
알지 못했겠죠.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면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진짜 희망의 끈은
여기부터죠.
아, 산다는건 좋은거야
어린이들은 모두 순수하고
내일은 좋은일이 있겠지
하는
환각적 좋음 질환이 아니라
감정적 이득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가짜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
만일 모든 답이
신에게 있다면
직접 만나는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 모든 상대계 너머
혹시 절대계가 있다면
누구에게 듣는게 아니라
직접 방문하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좋은사람이 되고
다른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바람직한 삶을 살라고 하지 말아요.
무엇이 사랑인지도 모르겠는데
왜사는지도 모르겠는데
알지도 못하는걸 연출하느라
완전히 진이 빠졌어요.
행복한것도 싫어요.
맛있는걸 먹는동안
황홀한 음악을 듣는동안
잠시잠깐 행복해도
다음날은 또다시 척추에 찬바람이 불텐데.
이런 일시적 진통제 말고
영원한것
단 한시도 없을수 없는것
있다/없다 의 개념이 붙을수 없는것
완전한 진짜
그걸 알고싶은거야.
그렇다고 들어서 아는게 아니라
직접 두눈으로 확인하고
맛보고 싶은거야.
듣는걸로는
만족하지 못해.
직접 확인하고 싶다.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