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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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686 vote 0 2008.12.30 (12:20:34)

 

안다는 것의 출발점


세상이 어수선한 이유는 안다는 사람들이 아는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체계(體系)를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혼돈스런 이유는 안다는 사람들이 아는 것을 조리(條理)있게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조리(條理)를 모르기 때문이다.


조리(條理)란 무엇인가?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다. 조리가 있어야 비로소 체계가 선다. 조리와 체계는 안팎으로 짝을 이룬다.


체계는 계(系) 내부에 요소들을 품어안고 있다.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상호간에 결합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조리(條理)다.


체계 내 요소들 간의 결합관계가 구조(構造)다. 구조가 들어맞는 것이 조리다.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조리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바른 지식은 구조를 아는 데서 출발한다. 구조를 알아야 비로소 안다는 사람들이 아는 것을 체계적이고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다.


구조는 체계를 구성하는 갈피들 간의 구조다. 갈피는 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이다. 체계는 계통을 이루는 바 그 계통이 갈라지는 부분이 갈피다.


그것은 신체나 사물의 관절과도 같다. 하나의 체계가 있다면 반드시 내부에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다리가 있다. 이들의 결합관계가 구조다.


하나의 체계 안에는 반드시 다섯 개의 갈피들이 숨어 있다. 그것은 체계와 평형과 구조와 전개 그리고 원소다.


이 갈피들 사이의 질서를 아는 것이 조리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갈피들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숨어 있는가?


나침반의 N극과 S극이 갈피다. N극과 S극을 구분하지 못하면 나침반이 있다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 길을 찾아갈 수 없다.


갈피를 잡아야 한다.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요소들 상호간의 결합관계를 알아야 한다. 조리를 알아야 한다. 비로소 체계를 알 수 있다. 


존재는 구조(structure)와 체계(system)로 설명할 수 있다. 구조와 체계 사이에는 평형(equilibrium)이 있다. 평형은 밸런스(balance)로도 설명할 수 있다.


체계(體系)는 체(體)를 품은 계(系)다. 체(體)가 곧 평형이다. 계는 체(평형)를 품고, 체는 구조를 품고, 구조는 전개를 품고, 전개는 원소를 품는다.


체계-평형-구조-전개-원소로 이어지는 흐름이 계(系)다. 계(系)는 이을 계다. 어떻게 잇는가? 체계와 평형과 구조와 전개와 원소로 잇는다.


이러한 이음새가 곧 갈피다. 오늘날 지식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미에 빠진 이유는 체계 내의 결합관계에 따른 정합성과 긴밀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체계와 평형과 구조와 전개와 원소 사이에 숨은 질서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의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순서와 방향을 아는 것이 조리를 아는 것이다. 조리를 알아야 조리있게 인식할 수 있다. 먼저 갈피부터 잡아야 한다. 

● 존재는 체계(體系)를 가진다.

● 체계는 체계-평형-구조-전개-원소의 다섯 갈피를 품고 있다.

● 갈피들 사이에 결합관계의 긴밀성과 정합성이라는 조리(條理)가 존재한다.

● 그것은 순서와 방향 곧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다.



달마사전 이야기


존재, 구조, 체계, 평형, 밸런스, 조리, 갈피, 요소, 계, 구조, 전개, 원소, 정합성, 긴밀성, 우선순위, 접근경로. 이 쯤 되면 벌써 머리가 복잡해질 것이다.


달마사전은 여러분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많은 어휘들을 소개하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이 어휘들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존재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이 어휘들이 그 사람의 몸과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다리와 관절과 뼈와 내장과 호흡과 운동이 된다.


건물을 알려면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을 해부해야 한다. 존재를 해부하면 이렇게 된다. 


건물을 이해하려면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과 벽돌과 지붕의 이름들을 외어야 한다. 사람을 이해하려면 오장육부의 이름들을 외어야 한다.


존재를 이해하려면 존재의 대들보가 되고 존재의 서까래가 되는 이 어휘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존재의 몸통과 가슴과 팔다리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건물을 이루는 각 부위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한다. 인체를 이해하려면 인체해부도를 보아야 한다.


존재는 건축과 같다. 시각화 되어야 한다. 존재가 집이면 체계는 설계도다. 평형이 대들보면 구조는 기둥이고, 전개는 서까래, 원소는 벽돌이다. 

달마사전에서 어휘의 의미는 국어사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갈피들 간 결합관계가 규정한다. 국어사전은 잊고 요소들 간의 결합관계를 살펴야 한다.


평형의 의미는 체계가 규정하고, 구조의 의미는 평형이 규정하고, 전개의 의미는 구조가 규정하고 원소의 의미는 전개가 규정한다.


어휘들은 각자의 계급을 가지고 있다. 존재가 대장이면 체계는 참모장이다. 어휘의 의미는 국어사전이 아니라 그 어휘의 계급이 결정하는 것이다.


동일한 소나무로 깎은 재목이라도 위로 올라가면 대들보가 되고 옆으로 누이면 서까래가 되고 수직으로 세우면 기둥이 되는 것과 같다.



막힘과 뚫림


모든 실패는 소통의 실패로 하여 일어난다. 모든 성공은 소통의 성공으로 하여 얻어진다. 그러므로 소통에 성공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다. 소통의 문제는 구조의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존재는 어떤 구조와 체계의 일부로 소속하여 있기 때문에 소통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어떤 체계와 구조의 일부로 속하여 있으며 여기서 예외는 없다.


존재라는 말의 의미가 곧 구조와 체계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존재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붙잡혀 있다. 추상적인 존재라도 인간의 사유체계의 일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존재는 곧 체계이며 구조다.


반면 유령이나 환상 따위의 가상적 존재는 체계와 구조의 불성립으로 하여 그것이 거짓임이 탄로난다. 존재는 계 내부에 평형과 구조를 품어야 하는데 인간이 임의로 지어낸 가짜들은 그것이 없다.


가짜들은 속이 비어 있다. 그러므로 내적인 결합관계의 긴밀성과 정합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긴밀성은 속이 비어있지 않은 것이고 정합성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다. 가짜들은 속이 비었거나 앞뒤가 맞지 않다.


소통의 일차적인 수단은 언어다. 첫째 언어가 없고 둘째 언어체계가 빈약하기 때문에 서로는 소통하지 못한다. 세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근원의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먼저 언어를 창안하고 언어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또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근원에서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차별과 편견과 무관심에 따른 더 많은 소통의 장벽들도 철폐되어야 한다.


세상의 많은 장벽들은 물리적 장벽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장벽으로 존재한다. 많은 조직과 집단들은 특정 언어와 그에 따른 의사소통체계를 공유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종교와 이념과 사상과 문명권이 그러하다. 


기독교 문명권과 유교 및 불교 문명권은 서로 다른 언어에 기반한 의사소통 체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가 구원을 말할 때 불교는 깨달음을 말하고 기독교가 천국을 말할 때 불교는 해탈을 말한다.


진보그룹과 보수집단 역시 각자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다른 체계의 언어를 사용한다. 진보그룹이 진정성을 말할 때 보수집단은 경쟁력을 말한다. 그들은 서로 관심사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언어의 장벽과 편견의 장벽, 불신의 장벽과 무관심의 장벽을 깨뜨리고 널리 소통해야 한다. 그것이 혁신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러한 불신의 장벽을 깨뜨리고 소통의 통로를 개척해온 혁신의 역사다.


인간이 처음 불을 발견하고 수레를 발명하여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 이래 혁신은 계속되었다. 광장이 소통의 벽을 허물었고 도로가 소통의 장벽을 허물어 혁신하였다. 수레와 배와 말과 자동차가 또한 소통의 장벽을 허물어 혁신하였다.


문자가 보급되어 한 차례 소통의 벽이 허물어졌고, 활자가 보급되어 한 차례 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인터넷이 한 번 더 소통의 벽을 허물었듯이 나는 이제 달마사전을 제안하여 새로운 소통의 물결을 일으키고자 한다.


달마사전은 새로운 방식의 언어체계다. 새로운 언어를 중심으로 새로운 의사소통의 그룹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나는 지금 인간의 소통능력을 한 차원 더 높고 넓게 확장하고자 한다.



소통이 혁신이다


어미없는 자식이 없듯이 근본이 없는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모태를 가지고 자궁을 가진다. 그리고 시공간의 어느 지점에서 출생한다. 그 출생과정이 존재한다. 그것은 유(類)와 종(種)이다.


그러므로 종류(種類)가 있다. 종(種)이 자궁이면 유(類)는 탯줄이다. 종(種)이 씨앗이면 유(類)는 싹이다. 종이 조상이면 유는 족보다. 그러므로 존재(存在)는 유(類)와 종(種)에 따라 특수화 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존재는 내적 긴밀성과 정합성을 가지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어떤 존재라도 그러한 연관에 따라 추적하여 소속을 밝힐 수 있다. 소속이 없이 동떨어진 채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질량보전의 법칙에 따라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무에서 유가 생겨나 있다 해도 알 수 없다. 자궁이 없이 태어난 존재라면 접근경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는 반드시 내부에 체계와 구조라는 오장육부와 뼈대가 존재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외부에 있어서도 조상이 있고 족보가 있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존재는 내적인 긴밀성과 정합성에 의하여 단단히 결속하여 있다. 물리적 존재라면 시공간의 하드웨어에 단단히 결속하여 있고 관념의 존재라면 사유체계의 소프트웨어에 단단히 결속하여 있다.


그 결속은 구조와 평형과 체계다. 존재는 체계에 소속하는 한편 평형에 소속하여 있고 또한 구조에 소속하여 있다. 그러므로 그 존재가 속한 체계와 평형과 구조를 아는 것이 곧 그것을 아는 것이다.


● 체계-평형-구조-전개-원소


구조가 집적하여 평형을 낳고 평형이 집적하여 체계를 낳는다. 평형과 체계는 높은 차원의 집적된 구조로 존재의 상부구조를 이룬다. 반대로 전개와 원소는 그 존재의 하부구조를 이룬다.


모든 존재는 체계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평형적인 존재이고 또한 구조적 존재이다. 더 나아가 전개된 구조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의 집적되고 해체되는 구조를 아는 것이다. 


● 체계, 평형, 구조, 전개, 원소가 있다.

● 체계와 평형은 존재의 상부구조를 이룬다.

● 전개와 원소는 존재의 하부구조를 이룬다.

● 존재는 이들 사이의 내적 긴밀성과 정합성에 의하여 특수화 되어 있다.

● 모든 존재는 상부구조의 집적과 하부구조의 해체로 설명할 수 있다.


체계를 해체하면 평형이 드러나고 평형을 해체하면 구조가 보인다. 구조를 해체하면 전개와 소속이 차례로 드러난다. 이러한 집적과 해체의 중심에 구조가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구조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


한 사람을 파악하려면 그가 어느 나라 혹은 어느 가문에 속한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동식물을 파악하려면 그 동물과 식물이 생물 분류학상 어떤 종과 속과 과에 속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모든 존재는 체계와 평형과 구조에 속하여 있다. 그러므로 체계를 알고 평형을 알고 구조를 아는 것이 그것을 아는 것이다. 체계와 평형과 구조가 그 대상의 주소지가 된다. 주소지가 없는 존재는 없다.


동물과 식물은 린네의 분류를 따라 종속과목강문계의 주소를 가진다. 건축물은 행정구역과 토지대장과 지번에 의하여 부여된 주소지를 가진다. 개인은 DNA에 따라 민족과 친족과 가족이라는 주소지를 가진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어떤 체계에 소속하여 있다. 소속(所屬)하여 있기 때문에 소통(疏通)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가 소속된 주소지를 알아야 한다. 소속의 체계를 알아야 소통할 수 있다. 


컴퓨터에는 ‘시작기능’이라는 주소체계가 있다. 휴대폰에는 전화번호부가 저장되어 있고 메일함에도 주소록이 있듯이 사전은 색인을 가져야 사고, 도서는 목록을 가져야 하고, 웹사이트는 index를 가져야 한다.

어떤 일의 진행에는 반드시 의사결정의 우선순위가 있고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반드시 접근경로가 있다. 우선순위와 접근경로에 의해 존재의 내적 긴밀성과 정합성은 담보된다. 그것이 존재의 주소지가 된다.


달마사전은 존재의 주소록이다. 린네가 종속과목강문계로 주소를 두어 분류한 것을 나는 체계, 평형, 구조, 전개, 원소로 주소를 두어 분류한다. 모든 상품에 바코드가 부여되듯이 모든 언어에도 주소가 부여되어야 한다. 



철학의 주소지는 어디인가?


철학(哲學)은 총체적인 인식이다. 개별적인 존재들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하여 전체적인 상황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기다. 모든 존재는 체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어둠이 걷히면 전체가 한 눈에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철학의 철(哲)은 밝음이다. 지혜의 촛불을 밝혀 무지의 어둠을 걷어내고 전모를 보자는 거다. 자연은 본래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존재한다.


린네가 종속과목강문계라는 분류의 빛을 비추었을 때 생태계의 전모가 드러났다. 마찬가지다. 체계, 평형, 구조, 전개, 원소라는 분류의 빛을 비출 때 비로소 존재는 그 전모가 환하게 드러난다.


그러한 존재의 통일성을 지시하는 어휘가 영어로 시스템(system), 한자어로 체계(體系)라면 이 개념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우리말은 ‘일’이다. 여기서 일은 단순작업을 의미하는 work와 다르고 노동(勞動)과도 다르다.


개별적인 행위에 의미라는 이름의 연관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전체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일이다. 모든 존재는 고유한 일을 가진다. 그러므로 존재는 곧 일하는 존재이다.


존재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한다. 공간이라는 특정 포지션을 점유하고 시간이라는 변화에 대응한다. 일을 가지므로 존재는 내적 긴밀성과 정합성이라는 역할이 부여되어 체계에 속한다.


시스템과 체계와 일은 자연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 영역에도 존재한다. 학문과 종교, 사상, 이념, 지식에도 체계가 있다. 인간은 본래 체계를 인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뇌가 체계적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지식 사이의 연관성을 규명하여 통일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철학이라면 인간이 가진 고유의 체계 인식능력을 끌어내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체계적인 실천을 통하여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생물들 사이에서 관찰되는 복잡한 현상을 하나의 ‘생태계’로 통일시켜 바라볼 수 있다. 생태계라는 시스템이 자연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문명도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를 세계(世界)라 일컫는다.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의식 혹은 세계시민 의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주소지가 어디인가를 항상 의식하고 깨우쳐 있는 것이다.


자연에 생태계가 있고 인간에 세계가 있듯이 개인의 정신에도 깨달음의 체계가 있다. 얼빠진 채 멍하니 있지 말고 자기 정신의 주소지를 항상 의식하고 깨우쳐 있어야 한다. 정신차리기다.


●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

● 각 부분이 연결되어 통일적으로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

● 독립적 인식의 대상(對象)으로 자연에 실재(實在)해야 한다.

● 닫힌 계 안에서 내적 정합성(整合性)을 가져야 한다.

● 외부에 대해서는 열려있어야 한다.


시스템의 성립조건이라 할 내적 정합성은 일의 진행과 구조의 전개에 따른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일이 진행될 때는 반드시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라는 내적인 정합성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 체계-평형-구조-전개-원소 (시스템)

● 받기-쌓기-틀기-풀기-주기 (일)

● 질-입자-힘-운동-량 (물리)

●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 (존재)

●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 (인식)


● 소통-개념-가치-의미-기호 (깨달음)

● 유도-대응-의속-인과-표상 (논리)

● 근접도-완성도-균형도-활성도-정확도 (미학)

● 성속-진위-선악-자유,억압-미추(가치판단)

● 소재-기능-성능-효능-외형(시장)


이를 하나의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곧 평형의 원리다. 평형은 계의 평형이다. 계의 평형의 법칙이 존재한다. 평형의 법칙은 물리적 등방성의 원리 및 대칭성의 원리로 나타난다.


하나의 원리가 인력과 척력, 구심력과 원심력 그리고 응집력과 팽창력을 비롯한 다양한 힘들을 성립시킨다. 밀고 당기고 모이고 흩어지는 힘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계의 평형이 있을 뿐이다.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자체적으로 평형을 찾아낸다. 평형에서 이탈되었을 경우 다시 평형을 복원한다. 힘은 특정한 조건에서 평형이탈을 예비한 상태이며 운동은 평형복원의 진행과정이다.


계의 평형은 공간 자체의 밀도차로부터 비롯한다. 물질의 바탕이 되는 공간 자체가 계와 평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물리현상에서 관찰되는 여러 힘과 운동은 그러한 공간의 성질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 계가 존재하며

● 계는 평형을 지향하며

● 평형이탈과 평형회복의 구조가 존재한다.

뉴튼의 운동 3법칙은 평형의 원리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하나의 원리가 계로 바라보는가 혹은 평형으로 바라보는가 혹은 구조로 바라보는가에 따른 관측법의 차이에 의해 서로 다르게 관측되고 있는 것이다. 


●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계의 평형의 법칙이다. 작용과 반작용이 인력과 척력, 구심력과 원심력 혹은 응집력과 팽창력의 형태로 계의 평형을 유지한다.


● 관성의 법칙은 평형이탈의 법칙이다. 관성은 외계에서의 작용에 따라 평형이탈이 성립할 때 감추어진 계의 존재가 드러나는 현상을 설 명하고 있다.


● 질량가속도의 법칙은 평형회복의 법칙이다. 평형이탈의 크기 만큼 평형회복의 힘(F)이 성립한다. 질량(M)가속도(A)는 평형이탈의 크기다.


자연에서 계의 존재는 잘 관측되지 않는다. 외계에서 자극을 가하여 계의 존재가 드러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달리는 버스가 멈추면 계속 운동하려는 부분이 계에서 분리되는 형태로 계의 존재가 관찰된다. 



달마사전 체계


문제는 의사소통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좋은 언어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낱낱의 어휘 자체에 고유하지 않다.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체계다. 어휘의 의미는 언어체계 안에서 상대적인 위상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언어체계를 파악해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국어사전은 수만 어휘를 수록하고 있지만 달마사전은 언어의 체계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국어사전의 방대함을 대신한다. 언어체계는 체계-평형-구조-전개-원소의 5단계 분류법을 따른다.


체계는 바깥으로 난 문을 가진다. 외계에 대해 열려있다. 평형은 밸런스다. 입체를 이루고 몸통을 이룬다. 구조는 방향전환으로 얽힘과 엮임이 이에 비롯한다. 전개는 시간적 반복이며 원소는 말초가 되는 끝단이다.


국어사전은 어휘를 설명하는 기준이 없다. 설명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 예컨대 ‘있다’는 ‘존재하다’로 설명하는데 이는 한자어를 빌린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달마사전체계에서 ‘있다’는 ‘이다-있다-같다-하다-맞다’로 연역되는 체계 중의 한 부분으로 설명된다. 즉 존재는 체계-평형-구조-전개-원소의 다섯 가지 양상으로 있는 것이다.


체계적 존재와 평형적 존재, 구조적 존재와 전개의 존재 그리고 원소의 존재가 있다.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 원소로 있는 것, 전개하여 있는 것, 구조화하여 있는 것, 평형으로 있는 것, 체계로 있는 것이 있다.


다양한 있음들이 있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있다는 이들 중에서 두 번째 평형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는 몸통으로 있고 밸런스로 있고 몸통에 부속하여 딸린 팔다리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새가 울고 있다’거나 ‘꽃이 피고 있다’에서 ‘있다’는 보통으로 말하는 존재(存在)와 의미가 다르다. 그것은 있되 전개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다-있다-같다-하다-맞다’에서 네 번 째 ‘하다’가 된다.


‘새가 울고 있다’의 ‘있다’는 ‘하다’를 의미하므로 ‘새가 운다’로 바꿔 쓸 수 있다. 마찬가지로 ‘꽃이 피고 있다’는 ‘꽃이 핀다’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보통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다-있다-같다-하다-맞다’들 중의 하나로 바꿀 수 있다.


국어사전은 이러한 언어의 속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단어는 존재를 지시하는데 존재는 곧 체계이므로 체계를 설명해야 한다. 체계 속에는 평형과 구조와 전개가 있으므로 이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양이는 ’고양이과의 동물’로 설명된다. 배추는 ‘십자화과의 이년초’로 설명된다. 진화의 경로를 따라 설명하고 있다. 만약 린네의 생물분류법이 없었다면 고양이가 고양이과임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린네 덕분에 배추를 십자화과의 이년초로 설명할 수 있고 당나귀를 말과의 짐승으로 설명할 수 있다. 린네의 분류가 없다면 국어사전은 고양이나 배추나 당나귀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언어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체계가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존재와 대면하고 존재를 인식한다. 인간의 의미부여는 그 존재에 맞선 대면의 결과이다.


자연의 존재와 인간의 인식이 대면한다. 존재의 체계와 평형과 구조와 전개와 원소로 펼쳐지는 만큼 인간의 인식도 이에 맞서 소통과 개념과 가치와 의미와 기호로 펼쳐지는 것이다.


인간의 의미부여는 존재의 체계에 대한 대응이며 인간이 존재의 체계를 무시할 경우 그 의미는 단절되고 만다.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의미가 통하지 않으면? 그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다.


존재가 체계를 이루므로 인간의 인식 역시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의미가 통하고 가치가 살고 개념이 정립하고 비로소 소통된다. 존재의 체계-평형-구조-전개-원소와 인식의 소통-개념-가치-의미-기호는 하나의 세트다.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소통이 언어의 본질이다. 그 소통 안에 개념이 있고, 개념 안에 가치가 있고, 가치 안에 의미가 있고, 그 의미의 끝에 기호가 있다. 이 역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의미부여가 체계를 벗어날 경우 언어는 소통되지 않는다.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졸작의 그림에 걸작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졸작의 영화에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데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들 부여되지 않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의 가치의 크기는 소통의 크기에 달려 있다. 위대한 작품은 위대한 소통을 낳는다. 태작은 얇게 소통하고 걸작은 깊게 소통한다. 소설이라도 그러하고 음악이라도 그러하고 조형이라도 그러하다.


언어는 기호다. 그 기호에 의미를 싣고, 가치를 싣고, 개념을 실어야 비로소 소통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어휘 안에는 소통과 개념과 가치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충분히 내포되어 있는 것이 깊은 뜻이다.






삶과 철학


논어 학이편(學而篇)은 공자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이는 아래와 같이 해석될 수 있다.


기쁨이 동기다.

소통으로 기쁨은 얻어진다.

스스로를 완성할 때 소통할 수 있다.


기쁨(說乎)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다. 이는 논의의 첫 출발점을 찍는 문제이다.


기쁨은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인간은 또한 자연의 일부다. 자연이 논의의 근거가 된다.


자연은 인간의 의도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토대가 되는 것이며 그 단단하게 다져진 토대 위에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은 ‘왜 학문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질문은 동시에 ‘왜 도전하는가?’ 혹은 ‘왜 사는가?’ 하는 다양한 질문으로 연역될 수 있다. 


공자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 가운데서 인간은 줄곧 기쁨을 선택해 왔고 그 결과로 오늘날 인간의 삶이 얻어진 것이다.


기쁨은 생리적인 본능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자연의 본능에 충실할 때 인간의 삶은 자연스럽다. 기쁨의 추구는 자연의 본성과 일치한다.


기쁨은 만남(有朋)과 소통(自遠方來)에 의하여 얻어진다. 그러므로 서로는 만나야 한다. 만나서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무엇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가? 완성이다. 개인의 인격이 독립적으로 완성될 때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 군자(君子)의 모습이다.


공자는 첫째 구절에서 기쁨(說乎)을 말하고 둘째 구절에서 소통(有朋)을 말하고 셋째 구절에서 완성(君子)을 말하고 있다.


세 구절은 수미일관하여 전체적으로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룬다. 머리와 꼬리가 만나 하나가 된다. 기승전결을 갖추어 미학적으로 완결된다.


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승..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전.. 人不知而不慍

결.. 不亦君子乎


무엇인가? 인간의 삶은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데 의미가 있다. 신의 완전성은 자연의 평형원리로 전개하여 나타나고 있다.


기쁨 + 소통 = 완성

인간의 본성 + 자연의 평형원리 = 신의 완전성의 재현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에 욕망이 있다. 욕망에 의해 자연과 인간이 인과관계로 연결된다. 그 인과의 연결고리가 곧 기쁨이다.


자연은 평형을 좇는다. 자연을 본받아 인간은 본래의 평형을 회복하려는 본성을 가진다. 평형을 회복할 때 기쁨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평형의 추구가 곧 소통이다. 그런데 소통하려면 완전해져야 한다. 타자에 의존하고 종속되어 있어서는 소통할 수 없다.


종속과 의존을 끊고 스스로 완전해 졌을 때 인간은 능동적으로 외부세계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다. 그럴 때 인간의 모습은 자연과 닮아 있다.


인간은 본래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환경의 지배에 의해 불완전해진다. 엄마 품의 아기는 완전하지만 성장기의 소년은 불안정하다.


환경의 지배를 극복해야 한다. 환경의 도전에 부단히 응전하면서 환경과의 능동적인 소통을 통해 소년의 불완전성을 극복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독립적 인격으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며 공자는 이를 군자(君子)라 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 이치는 평형의 원리다. 자연은 언제나 평형을 이루고자 한다. 물은 낮아질수록 평형에 가까워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본래 완전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성장이 자연의 평형을 깨뜨리고 있다.


사회의 발전과 문명의 진보가 자연의 평형을 깨뜨리고 있다. 인간은 점차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었다. 인간은 점점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환경과의 지속적인 교감을 통하여 본래의 평형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소통이다. 소통할 때 인간은 기쁨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어떤 환경에서든 평형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 완성된 사람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을 닮아간다. 마침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커다란 동그라미를 이룬다.


자연의 원리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그것은 평형이다. 자연은 운동한다. 운동의 결과 평형이탈이 일어나며 이때 힘이 축적된다.


그 힘이 작용하여 자연은 다시 평형을 회복한다. 이 과정은 부단히 반복된다. 인간의 문명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평형이탈과 평형회복의 연속이다.


산업의 발전이 평형이탈을 낳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된 힘을 사용하여 문명은 다시 평형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양된 정신이 필요하다. 산업과 정신의 불균형 그리고 역학과 미학 간의 불균형이 평형이탈을 낳는다. 문명은 점차 위태로와진다. 


홍수와 지진으로 파괴된 대지는 숲이 복원하고 바다가 정화한다. 국지적인 평형이탈이 무수히 일어나지만 큰 범위로 보면 자연은 늘 평형을 회복하고 있다.


빅뱅은 거대한 평형이탈이다. 그 평형이탈의 크기만큼 힘이 비축되었다. 그 힘의 작용에 의해 은하계가 탄생하고 우주는 평형을 회복해 왔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해 언젠가 우주가 완전한 계의 평형에 도달했을 때 에너지는 제로가 되고 우주는 완전히 호흡을 정지한다.  


산업화는 빅뱅과 같은 거대한 평형이탈이다. 그 평형이탈의 크기만큼 힘이 비축된다. 그 축적된 거대한 힘을 과연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인간의 정신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마침내 산업이라는 거대한 힘을 통제하는데 실패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인간이 스스로 완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차원 위의 존재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깨뜨려진 평형을 회복하기 위하여.


기쁨이 슬픔보다 낫다. 인간은 소통할 때 기쁨을 얻는다. 참된 소통은 인간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으로 하여 가능하다.


꽃은 피어서 완성되어야 나비를 만날 수 있고 애벌레는 허물을 벗고 한 마리의 나비로 완성되어야 꽃을 만날 수 있다. 비로소 꽃과 나비는 소통할 수 있다.


당신이 완성되지 못한다면, 유년의 어린이로 머물러 있다면, 허물을 벗지 못한 애벌레로 머물러 있다면 그대는 진정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공자는 군자(君子)라는 이름의 인격적 완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학문의 수양을 통하여 군자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대가 군자로 완성될 때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것이며, 그렇게 찾아온 벗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소통의 결과로 기쁨을 맛볼 것이다.


석가는 열반(涅槃)이라는 이름의 완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깨달음을 통하여 니르바나에 도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대가 깨달음을 완성시킬 때 그대의 아트만이 우주정신 브라흐만과 소통할 것이며 그러한 소통의 기쁨으로 부처님의 미소를 얻을 것이다.

존재는 소통으로 완성된다. 인간은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꽃을 피우고 나비를 만나고 열매를 맺는 가운데 기쁨이 있다.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극한 나로 지극한 너와 소통할 때 내 안에 주어진 본래의 완전성을 찾아낼 수 있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다.


완성은 독립적 인격의 완성이다. 내 몫의 자유의 완성이다. 그 완성은 나아가 사회의 완성, 문명의 완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완성으로 연역되고 확장된다.


그렇게 진리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이며, 자연의 완전성과 호응하는 것이며, 신의 완전성을 삶이라는 무대에 재현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내 안의 진리를 발견하고, 내 안의 자연을 찾아내고, 내 안의 신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과 소통의 채널을 이어가는 것이다. 


완성해야 독립한다. 독립해야 자유롭다. 자유로와야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 만나야 소통할 수 있다. 기쁨이 그곳에 있다.


무엇을 완성해야 하는가? 가치를 완성하는 것이 완성하는 것이다. 가치는 어디에서 찾는가? 가치는 의미의 배달에서 찾아진다.

의미는 어디에서 얻는가? 지식과 사실과 기호에서 얻는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사실과 기호와 지식이지만 그 안에서 취해야 할 것은 의미다.


의미로 하여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의미를 내포한 사실 그것이 진실이다. 의미를 내포한 기호 그것이 진리다.


의미를 내포한 지식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렇게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가치다.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껴서 밝혀낸 사실과 기호와 지식에 주저앉아서 안 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조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상대성 속에서 새롭게 인식된다.


밝혀낸 사실과 기호와 지식을 세계라는 이름의 환경과의 상대성 안에서 새롭게 파악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의미요 맥락이다. 정보는 그렇게 가공되어야 한다.


가치는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한다. 값어치를 매긴다. 정보를 가공하고 사실을 조리하고 지식을 평가한다. 우선순위와 접근경로가 지정된다.


발견된 사실과 정보와 지식에서 필요한 하나를 선택하고 불필요한 하나를 배제하여 의미와 맥락이라는 방향성을 지정하는 것이다.


가치는 무엇을 취하는가? 성속(聖俗) 중에는 성(聖)을 취한다. 진위(眞僞) 중에서 진(眞)을 취한다. 선악(善惡) 중에서 선(善)을 취한다.


미추(美醜) 중에서 미(美)를 취하고 자유와 억압 중에서는 자유(自由)를 취한다. 그것은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이다.


인간은 부단히 선택 앞에 선다. 용기있게 나아가야 한다. 결단을 내려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 그른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취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다.


세계는 커다란 하나의 ‘계’다. 그 ‘계’의 평형이 존재한다. 그 평형의 중심에 추가 존재한다. 그것은 정상(頂上)이다. 정상을 바라보는 것이 이상주의다.


이상주의를 취하는 것이 비전이다. 우리 비전이라는 나침반을 얻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 가치판단으로 가능하다.


성(聖)과 진(眞)과 선(善)과 미(美)와 자유(自由)를 지향하는 가치판단이 그 나침반이 된다. 등대가 되고 북극성이 되고 삶의 지표가 된다.


먼저 비전을 취해야 한다. 이상주의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길을 떠나기 앞서 정상(頂上)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번이라도 정상을 본 자가 그 추억되는 정상의 모습에 비추어 보아 성(聖)과 진(眞)과 선(善) 미(美)와 자유(自由)를 자유를 판단할 수 있다.


성(聖)의 모습이 정상부를 닮아 있다면 속(俗)의 모습은 말단부와 닮아있다. 진(眞)과 선(善) 미(美)와 자유(自由)가 하나같이 정상의 모습과 닮아있다.


내 안에 정상을 품어야 한다. 내 안에 성과 진과 선과 미와 자유를 품어내는 것으로 인격은 완성된다. 군자가 되는 것이며 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인격과 깨달음을 완성할 때 그 울림과 떨림에 의해 나아가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을 완성할 수 있고 역사와 문명의 완성상을 제시할 수 있다.


기쁨이라는 자연의 방아쇠에 의하여 촉발된 그대가 깨달음의 기쁨이라는 보상을 얻을 때 머리와 꼬리는 이어진다. 비로소 신과 소통할 수 있다.


자연은 본래 완성되어 있어서 자연스럽다. 그대 자신의 완성이 지극하여 자연스러움에 도달할 때 그대는 평정심을 얻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연역되고 전개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대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내기다.


내 마음 안 깊은 곳에 감추어진 소통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 그 열쇠로 기쁨의 문을 열고 자연의 완전성 안으로 용기있는 걸음을 성큼 내딛어야 한다.


소통한다는 것은 깊이 만나는 것이다. 겉으로 만날 뿐 아니라 속으로도 만나자는 것이며 부분으로 만날 뿐 아니라 전체로도 만나자는 것이다.


눈으로 만나기에 그치지 말고 마음으로도 만나야 한다. 소통의 열쇠를 열고 대화의 빗장을 열고 마음의 뜰 안으로 깊은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소통한다는 것은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온전해지는 것이다. 의존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간직한 채 하나가 된다.


인간은 내땅, 내집, 내가족, 내차, 내돈, 내것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남의땅, 남의집, 남의 가족, 남의 것이 막히어 그만 차단되고 만다.


말이 많아서 수다를 떠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단순한 의견교환은 소통이 아니다. 의미 너머에 가치가 있고 가치 너머에 완성이 있다.


소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내땅, 내집, 내가족, 내차, 내 돈이 나를 존재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 친구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 그 친구와의 사귐의 깊이가 나를 보증한다. 나의 존재의 증명은 나의 소통의 질적 양적 범위 만큼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교감이 없이는 나의 존재가 인정될 수 없다. 나라는 현존재는 나의 역사와 나의 문명과 나의 세계와의 사귐이 보증한다.


그러므로 역사와의 호흡이 없는, 세계와의 교감이 없는, 문명과의 대화가 없는, 신과의 소통이 없는 고립된 나로는 그 존재가 허무할 뿐이다.


내가 완성되고서야 소통할 수 있다. 친구와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역사와 소통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신과 대화할 수 있다. 깊은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


내 안에 숨겨진 열쇠를 찾아 자기 내부에 잠재한 가능성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의 임무를 다할 때 나의 존재를 실현된다.


총알이 날아가는 이유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아쇠가 당겨졌기 때문이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이다.


과녁을 맞추기 '위하여'가 아니라 방아쇠의 격발에 '의하여'다. 무릇 ‘위하여’로 설명되는 것은 모두 가짜다. ‘의하여’로 설명되는 것이 진짜다.


왜 사는가? 기쁨을 얻기 위하여가 아니라 기쁨이라는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이다. 기쁨은 자연과 인간의 접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이라는 방아쇠가 인간의 욕망을 격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기쁨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그런 뜻에서이다.


자연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은 격발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인간의 삶은 결론이 나는 것이다.


처음 작은 기쁨을 맛보았을 때 삶의 질문을 얻은 것이며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을 때 그 질문에 답을 찾은 것이다. 그것으로 자물쇠와 열쇠가 맞는다. 


작은 하나의 씨앗에 미래의 뿌리와 잎과 줄기가 배아(胚芽)로 갖추어져 있다. 그렇다. 씨앗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씨앗은 축소된 한 그루의 나무다.


그대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단지 열쇠로 그 문을 열고 그 완성의 씨앗 속에 감추어진 잎새와 줄기와 가지와 꽃을 펼쳐보이기만 하면 된다. 


본래 흙에서 싹으로 돋아 나왔으니 다시 씨앗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과 끝은 만난다. 한 바퀴를 돌아 1사이클을 완성한다.


어떻게 자연의 본래로 돌아갈 수 있는가? 자연의 완전성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완성할 때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소통의 수단으로 언어가 사용되지만 언어로의 소통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언어의 편리함이 도리어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편리함에 기대어 언어만으로 가능한 낮은 수준의 소통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타락이 된다. 


텔레파시가 있다면 언어를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을 것이나 인간에게는 텔레파시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이 필요하다.


가족이라면 언어 없이도 소통할 수 있다. 타인과의 만남이기에 언어가 필요하다. 나의 경계를 넘어설 때 모두가 가족이 된다. 깨달음은 나를 넘어서기다.


전략을 쓰기 때문에 또한 인간의 소통은 한계가 있다. 연인이라면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불리하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라도 전략을 쓴다.


먼저 상대방의 카드를 보고 나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결정하려 하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전략을 버려야 한다. 그 의도를 버려야 한다. 희망과 야심을 온전히 말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을 표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와 나 사이에 벽이 있다. 그 벽은 전략의 벽이다. 그 벽은 게임의 벽이다. 그 벽은 희망과 야심과 수단의 벽이다. 그 벽을 넘어서야 한다.


먼저 너의 의도를 파악하고 난 다음에 나의 의도를 결정하려는 상대주의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너의 의도가 어떠하든 나의 길은 항상이어야 한다.


인간은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전략과 의도 때문이다. 희망과 야심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는 소통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온전하다면 전략은 불필요하다. 언제라도 고백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해져야 한다. 네가 내고 내가 네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사랑이라는 레퍼토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은 전략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가족 간에도 역할분담이 있다. 그 역할을 극복해야 한다. 온전히 네가 내여야 한다.


나를 완성한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서 역할의 벽, 게임의 벽, 전략의 벽, 상대성의 벽 그리고 언어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나는 일찍이 구조를 보았고 그 구조는 불완전과 완전 사이에 존재하며 그 구조가 완성될 때 소통할 수 있음을 보았다. 소통할 때 전율이 있었다. 


완성은 미학적 완성이다. 개인은 깨달음을 통하여 완성된다. 삶은 사랑을 통하여 완성된다. 사회는 변혁을 통하여 완성된다. 존재는 소통을 통하여 완성된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그 무대 위에서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여 보이는데 있다. 그것이 불교의 깨달음이고 기독교에서는 부활이고 구원이다.


미추 중에는 미로서 완성하고, 성속 중에는 성으로 완성하고, 선악 중에는 선으로 완성하고, 진위 중에는 진으로 완성한다.


자유와 억압 중에는 자유로 하여 완성된다. 완성으로 의미를 얻고, 의미로 방향성을 얻으며, 전개하여 가치를 실현하며 가치의 완성으로 진리에 이른다.


완성의 이미지를 가슴에 품는 것으로 처음 일어서고 신의 완전성을 그 무대 위에 재현하여 보이는 것으로 하여 자연의 본래로 돌아온다.


희망과 야심을 말소하고 매 순간에 그 순간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획과 의도를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완성해 보여야 한다.


순간이 완성되지 않으면 전체는 완성되지 않고, 부분이 완성되지 않으면 전체는 완성되지 않는다. 시야는 넓혀지지 않고 전모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대의 작은 걸음마에 우주 전체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순간 바람도 잎새도 속삭임을 멈추고 그대의 위대한 한 걸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지금 이 순간에 완성되지 않으면 신의 창조는 실패다. 하나가 완성되지 않으면 우주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 완성된 것과 완성된 것이 소통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빛난다. 완성은 연역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정답을 알고 가는 길이다.


먼저 완성의 이미지를 그려야 한다. 동그라미를 가슴에 품고 가야 한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려는 꿈을 포기해서 안 된다. 그렇게 끝까지 가보기다. 


삶을 철학하기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 베르그송과 키에르케고르, 샤르트르를 위시한 일련의 실존주의 철학의 계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과학과 실증의 한계를 넘어 사유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철학이 점점 문학으로 변한다는데 있다.


니체는 시와 수필에 담았고 샤르트르는 소설에 담았다. 철학은 다만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미학이다. 미학은 ‘계’의 완성에 대한 탐구이다. 문학과 예술은 미학을 탐구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을 과학함은 부분을 볼 뿐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과 실증으로는 부분에 집착할 뿐 전모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은 일정부분 문학 및 예술과 일정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미술과 음악을 모르고 자연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은 본래 완전하며 음악과 미술이 그것을 끌어내 보이고 문학은 그 자연의 완전성을 인간의 삶에 대입하여 보인다.


그러므로 진정 위대한 철학은 자연과 충분히 교감하고 있어야 한다. 음악과 회화와 제 예술, 문화분야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존재의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이다. 자연 그대로를 파악함이 아니라 파악된 결과를 토대로 독립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며 지혜는 방향성이 부여된 정보다. 의미맥락과 가치판단이 존재한다. 특정한 타켓에 겨냥하여 맞춘 거다.


겨냥이 있고 맞춤이 있고 자체완결성과 자기일관성이 있다. 내재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세상을 이해함이 아니라 인간의 주도하에 재구성함이다.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있었던 세계에 적응함이 아니라 인간 이후 새롭게 재창조함이다. 철학은 사회를 재창조하며 문명을 재창조하고 개인을 재창조한다.


사실과 의미와 가치와 지혜와 진리는 서로 연결된 개념이다. 궁극적인 겨냥은 소통이다. 소통은 인식의 일이다.


구조론에 따르면 존재는 곧 일이다. 일은 ‘받기, 쌓기, 틀기, 풀기, 주기’가 일 사이클 구조를 이룬다. 인식에 있어서 일은 소통이다.


인식은 소통이라는 일을 한다. 그 소통의 안쪽은 진리와 지혜와 가치와 의미와 지식이 단계적이고 입체적인 형태의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공간에 맞선다는 것이다. 일정한 물리 공간을 점유하고 시간의 흐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화를 낳는다.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맞서는 것이 존재다. 그것이 일이다. 일함으로써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함을 우리는 삶이라고 한다. 그 삶의 성취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나와 외부세계와의 관계맺기다.


삶이라는 일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또 사랑이라는 성취를 일구기 위하여 외부세계를 향한 창구를 개설해야 한다. 그섯은 인식이다.


인간은 존재를 통하여 시공간의 물리적 환경에 맞서며 또 세계의 인식을 통하여 그 시공간의 흐름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존재는 일한다. 존재함은 일함이다. 자연의 일은 생태계의 진화로 나타난다. 인간의 일함은 소통으로 나타난다.


그 소통의 과정에서 그 소통의 밀도에 따라 기호와 의미와 가치와 지혜와 진리가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하여 인간은 소통을 성공시켜 가는 것이다.


존재는 일이다.

인간의 일은 삶이다.


인간은 존재를 통하여 시공간의 물리적 환경에 맞서고

인식을 통하여 그 환경의 변화에 맞선다.


자연의 일은 생태계의 진화이고

이에 대응한 인간의 일은 세계의 인식이다.


삶의 성취는 사랑이고

인식의 성취는 소통이다.



● 받기 - 진리, 입력(계, 소통, 보편, 신)

● 쌓기 - 지혜, 저장(평형, 아트만, 일반, 개인)

● 틀기 - 가치, 제어(힘, 판단하고 선택한다.)

● 풀기 - 의미, 연산(운동, 실어서 보낸다. 머금는다.)

● 주기 - 지식, 출력(량, 정보, 사실)


철학은 지혜를 추구한다. 그 지혜는 가치와 의미라는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심층적인 지식이다. 개별 정보가 팀을 이루고 세트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사실 보다는 의미를, 의미 보다는 가치를, 가치 보다는 완성을, 완성 보다는 소통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환경과의 소통, 자연과의 소통이다.


인간은 기쁠때 웃는다. 웃음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만날 때 기쁘다. 나의 바깥으로 나를 확장할 때 인간은 만난다.





완성은 평형의 완성이다. 구조라는 말은 알려져 있지만 그 의미가 약하다. 구조주의라는 것이 있지만 철학의 형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로 시작해서 의미까지 갔는데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가치 너머에 평형이 있고 평형 너머에 계가 존재한다.


계와 평형과 구조가 있다. 사람들이 계도 알고 구조도 아는데 평형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계도 모르고 구조도 모르게 된다.

평형을 이해해야 계와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공자의 중용이나 석가의 중도나 노자의 무위나 조주의 평상심이나 다 평형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이다.


그러나 계를 발견하지 못하므로 평형을 찾지 못하r 있다.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평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찾아보지만 중간에는 평형이 없다. 그물의 기둥줄이 그물의 한가운데 묻혀 있지 않고 나무의 기둥이 잔가지 속에 묻혀 있지 않다. 


기둥은 뿌리와 가지 사이에 있지만 가지들 속에 섞여 있지는 않다. 대문은 담장과 골목길 사이에 있지만 마당 한가운데서 대문을 찾을 수는 없다.


평형은 집의 대문과도 같다. 그것은 극점에 있다. 맨 앞에 있다. 선두에 선다. 거함의 함교가 꼭대기에 자리 하듯이.


왜인가? 그 평형은 나와 너 사이에서 소통의 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담보하는 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자랄 수 있기 위하여 기둥은 잔가지들을 모두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홀로 외롭게 나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평형은 전진하여 나아가는 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들 가운데 중용이 없고 어중간하게 눈치보는 중도는 없다.


평형은 위대한 극점이다. 정상의 경지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와도 같은 미묘하고 섬세하고도 호쾌하고 장엄한 거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부단히 제 3자를 개입시키는 거다. 내가 꽃을 보면 너도 꽃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너와 나 사이에 제 3의 것을 놓아보기다.


세차게 부는 바람을 놓아보기도 하고 와당탕 퉁탕 흐르는 물을 놓아보기도 한다. 한여름 뜨거운 볕을 놓아보기도 하고 한겨울 차가운 눈보라를 놓아보기도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너와 나 사이에 소통의 접점을 키워나가는 거다. 집과 골목길 사이에 대문을 가다듬어 나가는 거다. 그것이 평형이다.




주의..주의는 가치에 대한 문제다.

자동차를 제작하려면 자본주의가 필요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사회주의가 필요하다. 역학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가 있다.


역학적 가치는 자본주의가 미학적 가치는 사회주의다. 역학적 가치는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요 미학적 가치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다.


역학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는 대립하지만 실로 대립하지 않는다. 일을 하려면 힘이 필요하지만 그 힘을 제어하려면 인간이 필요하다.


무슨 주의라는 것은 곧 가치에 대한 주장이다. 그 가치는 역학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다. 이 둘은 본래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패턴은 평형의 패턴이다.

모든 평형은 닮아있다.

세상을 아는 것은 패턴 때문이다.

계와 평형과 구조와 전개와 원소가 패턴이다.





욕망을 혁명하라


모든 존재는 어떤 구조와 체계 속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욕망 역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다. 욕망의 구조와 욕망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욕망의 원소가 있다. 원소들이 집합하여 욕망의 전개를 만든다. 전개들이 모여 욕망의 구조를 만든다. 구조들이 모여 욕망의 평형을 만든다. 평형들이 모여 욕망의 체계를 만든다.


욕망을 혁명한다 함은 전부를 욕망하게 하는 것이다. 전모를 보아야 전부를 욕망할 수 있다. 전부를 욕망한다 함은 욕망의 체계를 성립시킨다는 뜻이다.


체계는 평형의 집적이므로 이미 욕망의 평형이 이루어졌다. 욕망의 평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고 갈등도 없다. 인간이 전부를 욕망하게 될 때 욕망의 충돌, 욕망의 갈등, 욕망의 문제는 없다.


모든 문제는 전부를 욕망하지 않고 부분을 욕망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왜 부분을 욕망하는가? 전모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부를 꿈 꾼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부에 대한 비전과 이상주의와 동그라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본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나은 세상을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루하고 저급한 욕망을 버리고 고상한 가치를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속에서 벗어나 성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멋진 것을, 더 나은 것을, 더 완성된 것을, 더 아름다운 것을, 더 진실한 것을, 더 자유로운 것을, 더 정확한 것을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더 멋진 세계, 더 높은 세상, 더 위대한 가치를 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비루해지는 것은 욕망이 비루하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우선 밥을 먹고 싶다거나 떵을 싸고 싶다거나 섹스를 하고잡다거나 이런건 욕망이 아니다. 그건 동물의 생존본능에 불과하다.


밥을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픈 거다. 떵을 싸고잡은 것이 아니라 떵이 마려운 것이다.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거시기가 꼴리는 것이다.


식욕, 배설욕, 성욕은 인간의 2차적으로 해석해서 욕망화 시킨 것이다. 그 자체로는 욕망이 아니다. 실제로 지능이 아주 낮은 사람들은 성욕을 별로 나타내지 않는다.


인간이 나타내는 성욕의 90프로는 상상력의 결과이며 지능이 높은 사람이 더 성욕을 많이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적인 추적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다. 확실히 1세기 전에 비해서 21세기의 인간이 더 섹스의 횟수가 많다.


그러므로 식욕이나 성욕 따위는 일단 배제하는 것이 맞다. 인간의 진정한 욕망은 두 가지다. 학습욕구와 재현욕구가 있다. 학습욕구는 호기심, 흥미, 묘미, 모험심과 같은 어린이다운 감정의 자극에 의한 것이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본능적 욕구도 학습욕구에 의해 증폭되는 것이다. 식욕이나 성욕은 그 자체로 본능에 불과하므로 지능이 낮은 사람은 식욕이나 성욕이 약하게 나타난다. 학습욕구의 자극에 의해서 욕망이 증폭되어 후천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성숙할수록 학습욕구에서 벗어나 재현욕구의 지배를 받게 된다. 재현욕구는 미학적 욕망이다. 그 어떤 것을 완성시키려는 태도이다. 예컨대 밥을 먹어도 바닥에 떨어진 밥알은 주워먹지 않겠다든가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기호품을 먹겠다든가 하는 식으로 스스로 규칙을 정해가는 것이다.


이 규칙들은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지만 미학적 가치판단에 의해 점점 체계화 된다. 더 아름답고 더 깔끔하고 더 완벽하게 자신의 욕망을 완성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 벌의 옷을 입어도 격식에 맞는 옷을 갖추어 입겠다는 태도이다.


인격이 미성숙한 자는 학습욕구에 지배되기 때문에 타인의 평판에 신경을 쓴다.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트렌드나 주위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변형되는 것이다.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요에 맞추어 자신의 욕망을 변형한다.


인격이 성숙한 자는 재현욕구에 지배되므로 자기 일관성을 좇아 내적인 결합관계의 긴밀성과 정합성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자기의 욕망을 결정한다. 그래서 뛰어난 도공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을 망치로 깨부수는 것이다. 내부의 자잘한 욕망들의 모순과 충돌이 해소되는 것으로 자신이 만족할 때 까지 욕망을 상승시켜간다. 낮은 단계에서 욕망들은 서로 모순되지만 높은 단계로 나아갈수록 욕망들의 모순은 사라진다.


산의 중턱까지 가려면 어느 길로 갈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정상에서는 모두 만나게 된다. 정상까지 가려는 목표를 세운 사람에게는 어느 길로 갈것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욕망들의 마찰과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을 훈련시키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면 환경이 인간의 지능을 자극하여 훈련을 시키는 것이 곧 욕망인 것이다.


인간은 욕망의 자극에 의해 지능이 훈련되었고 그 결과 IQ가 상승했다. 특히 성적인 욕망 덕분에 인간의 지능은 극적으로 높아졌다. 동물이 지능이 낮은 이유는 욕망이 저급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발정기가 짧기 때문이다.


인간은 발정기가 따로 없기 때문에 24시간 욕망의 자극을 받은 결과로 24시간 지능이 훈련되어서 IQ가 상승한 것이다. 한국인이 지능이 높은 이유는 아프리카의 낙원을 떠나 추위에 떨고 배고픔을 견디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수한 자극을 받아서 지능이 높아진 것이다.


욕망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지적 능력을 훈련시키는 당근과 채찍이다. 그 훈련에 따라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은 학습욕구에 지배되는 인간이다. 그들은 흥미와 호기심, 게임의 재미와 타인의 평가, 사회의 유행, 지배자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결정한다. 그들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타인이 결정하는 것이고 그 타인의 결정은 매우 변덕스럽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그 욕망을 높은 수준에서 충족시킬 수 없다.


이때 인간은 훈련되는 개와 비슷하다. 열심히 뼈다귀를 물어오지만 그 뼈다귀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주인은 뼈다귀를 뺏어 멀리 던지기를 반복하고 인간은 헐레벌떡 뛰어가서 그 뼈다귀를 물어오기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그것은? 미학적 기준을 따르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미학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정확도와 활성도와 균형도와 완성도와 근접도를 따르는 것이오. 또 이들 사이에 성립하는 결합관계의 긴밀성과 정합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조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찾아내는 것이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았는가는 자기 내부에서 욕망을 찾아내었는가다. 근원의 욕망을 찾아내면 저급한 욕망은 버릴 필요도 없이 저절로 소멸된다. 그것은 산의 정상을 오르는 이가 어느 등산로를 택할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배가 고프다는 그냥 배가 고프다로 남아있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로 반전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학습욕구의 부단한 간섭과 참견을 극복하게 된다.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철이 들어야 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학습욕구에서 재현욕구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습욕구는 환경에 지배된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자신의 욕망을 규정하는 것이다.


재현욕구를 발견하게 되면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때 구조와 체계의 원리에 따라 전부를 욕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부는 과제의 완성을 의미한다. 완성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전부를 욕망하게 될 때 욕망 사이의 충돌은 없다. 구조와 체계의 문제이다. 모든 갈등은 구조에 따라 일어나고 체계에 의해 해소된다. 구조는 얽힘이다. 갈등은 얽힘이다. 갈등은 구조가 만드는 것이다.


구조는 환경과 나의 교섭에 의해 성립한다.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갈등을 낳는다. 전부를 욕망한다 함은 구조에 따른 갈등을 체계로 풀어낸다는 것이다. 산의 중턱이 아니라 정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환경과의 교섭에서 욕망을 조달함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낸 목표로 환경을 지배함을 의미한다. .


인간의 불행은 욕망이 저급하기 때문이다. 이는 환경이 인간의 지능을 계발하는 방향으로 인간을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그 똥개훈련을 자청해서 반복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다. 그러나 어쨌든 인간은 그 버릇 덕분에 여기까지 진화했다.


훈련단계를 졸업하고 재현단계에 들어서야 한다. 철 드는 것이다. 철이 들면 욕망이 바뀐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의 완성을 욕망하게 된다. 환경과 교섭하며 불안정한 환경을 완성시켜서 안정시키려 한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모든 갈등과 모순과 부조리가 자동으로 해소된다.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진화하기 위하여 생태계의 법칙에 따라 인간을 훈련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인간을 컨트롤 하는 것이다. 게이머가 하나의 스테이지를 돌파하면 또다른 스테이지가 주어지듯이 인간은 진화하기 위하여 반복적인 훈련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면 부조리가 해소된다. 환경이 인간에게 스테이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스테이지를 창출하게 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생태계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훈련 때문이다. 그 훈련의 결과로 인간의 아이큐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택해야 한다. 불행해 하면서 훈련을 계속하여 인간 종의 진화에 기여하든지 아니면 그 미련하기 짝이 없는 똥개훈련을 그만두고 행복하게 살든지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막힘과 통함으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

같음과 다름으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


같으면 통하고 다르면 막힌다.

다섯가지 같음이 있다.


원소의 같음.. 빨간색과 빨간색이 같다.

전개의 같음.. 리듬이 같다. 반복되는 패턴이 같다.

구조의 같음..

평형의 같음..

체계의 같음.. 외계에 대하여 열려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언어를 창안하고 언어체계를 발견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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