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을 이해하려면 맨 처음 관점의 문제, 소실점의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일반인이 흔히 본다는 것은 자기 기준에서 물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사과는 빨깧고, 이것은 사과의 하나의 속성으로 생각되지만, 사과의 기준으로 보면 사과는 빨간색을 제외한 빛을 모두 흡수한것이고( 힘, 방향 대칭) 나와 사과의 대칭위에는 빛이라는 축이 존재하기 때문에, 빛이 없으면 사과는 빯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를 중심으로 정치를 바라보면, 정치는 강자이고 나는 약자이며
그러나 나와 정치를 엮는 것은 역사정신 혹은 시대정신(축)이며
시대정신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동적균형) 올바른게 정치를
본다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시대정신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소실점이 그리는 법이 아니라 보는 법이라는 뜻은, 나를 중심으로 대상들의
소실점을 찾아서 보는 것(그리는 법)이 아니라, 이미 내가 대상과 엮여있으므로(대칭) 나와 대상을 묶는 축(소실점)을
통해 나와 대상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관점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인의 언어의 문제때문이며, 특히
주어를 ‘나’로 한정시키는 버릇이 남아있어서 그런 것이며
이는 맞다/틀리다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고, 맞다/틀리다는 이미 주어와 동사(혹은 형용사)를 한정시키고 고정상수로 둔 것이기 때문에 제한돈 언어이며,
이다/아니다는 A면 B이다로. 명사(주어)의 전제/배경을 나타내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언어이다. 영어는 주어 동사 목적어이고 한글은 주어
목적어 동사순이며, 영어는 목적어에 주목하게 되고 한국어는 동사에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영어는 객체지향적이며 대상의 속성을 주목하게 되고, 시간적
인과율에 강하다. 한국어는 주어와 목적어가 동시에 오므로 공간적 동시성을 사유하기 쉽다.
구조론적 관점의 예는 자석을 보고 자석에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성질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생각하는 것 아니라
자력이 먼저 존재하며 자력에 반응하는 것을 자석이라고 한다. 즉 물질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따라서 물질이 명명된다.
구조론의 핵심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며 이는 에너지가 하나의 사건(완전성) 안에서 작용하는 방식이다.
에너지는 일의성에 의해 안/밖, 중심,주변, 공간대칭, 시간대칭, 양대칭으로 작용하며 이에 따라 결합, 독립, 교섭, 변화, 침투한다.
그러므로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유도하는 단 하나의 원리는 일의성이며 일의성은 대칭성을
파악해 그둘을 제어하는 축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소실점, 일의성, 동적균형(소실점의 이동), 엮임은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다.
질문
1.
써보고 나니 지엽적인 문제같은데 엮임/분리(일의성) > 균일/분균일
> 대칭/비대칭을 상부논리 >하부논리로 이해해도 맞는지요? 일의성에 의해 태초에 불균일한
우주가 순간적으로 균일해지고 그 순간 대칭이 성립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2.
구조론은 왜 5인가가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의 인과가 2이고 공간의 대칭이 3이니 5라는 설명은 직관적으로 맞는데, 위상차에 의한 설명은 잘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구조론은 나침반과 같아서
스스로 알아서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같지 않으니
나침반 하나만 던져주면 안 되고 지도까지 챙겨줘야 합니다.
나침반에 지도까지 챙겨줘도 부족하고
타고갈 배편을 알아봐주는 것은 물론 거기에 더하여
중간에 까먹을 도시락까지 챙겨줘야 할 판입니다.
이것 저것 묻고 있다면 아직 핵심을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존재의 본질을 모르고도 잠이 오는지 궁금합니다.
옛사람들은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고 알았습니다.
땅이 네모나다면 뾰족한 모서리가 있을 것인데
거기 가보지 않고 잠이 오는 인간이 한국과 중국에 있었으니 기절할 일입니다.
그러고도 밥이 목구멍에 넘어간답니까?
전두환 시절에도 태연하게 가족과 인사하며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할 수 있는 강심장들이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인간이 아닌 노예로 어떻게 무려 하루를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지경에도 숨이 콧구멍에 쑥쑥 잘만 들어온다고요?
소실점이라는건 하나의 표현입니다.
세상 모든 것에 한 방에 통제되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총이라면 방아쇠가 있고 공이가 있는 겁니다.
생명이라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접점이 있습니다.
볼펜이라면 종이와 닿는 뾰족한 촉이 있습니다.
전축의 바늘이 레코드판에 닿는 뾰족한 지점.
보통은 탄생의 지점이 그 뾰족한 접점을 이룹니다.
그 하나만 알면 나머지는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거죠.
그 지점은 궁극적으로 언어의 완전성에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의사소통이 안 될텐데
인간이 어쨌든 의사소통 하는 것은 그게 있다는 증거죠.
구조론은 일의성, 소실점으로 보는 법만 알면 나머지는 복제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핵심을 모르신다고 하니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20대 초반에 입자를 쪼개고 쪼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와 사전에서 단어 뜻의 뺑뺑이를 발견하고 어떤것의 의미란 그것 자체가 아니라 다른것들의 관계에서 정의된다는 것을 깨닫고, 구조로 보는 관점이 맞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더 진도를 나가려니 앞으로 최소한 40년은 백수로 살아야겠구나. 다른사람들은 구조를 알까해서 찾다보니 구조론에 오게되었습니다.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으면, 목숨도 걸고 인생도 걸고 다 걸어야 하는데... 진리앞에서 변명해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정진하겠습니다.
구조론은 제가 초딩 3학년 때 착상한 건데
초딩 정도의 분별력만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단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 구조론을 알아낸게 아니라
사람들이 구조론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일의성이 어떻고 소실점이 어떻고 하는건 타자에 주목하는 거.
외부를 관찰할 필요는 없고 자기 자신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가 초딩때 주목한 것은 사람들이 왜 말을 저 따위로 하는가였습니다.
1+1=2라고 써놓고 왜 1이나 2에 대해서 말하는가입니다.
□+□=□라고 써놓고 왜 기호를 두 개 쓰는지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문제를 써놓고 답을 풀어라고 말할 뿐 문제와 답이 어떤 관계인지
문제와 답이 대칭인지 호응인지 그런건 왜 말하지 않느냐입니다.
물체가 뭔지 물질이 뭔지 물리가 뭔지 물성이 뭔지 물상이 뭔지
그때는 탐구생활이 아니고 자연과목인데 어느 페이지에도 안 나왔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더군요.
수학을 숫자로 하면 곤란하죠. 왜 거기에 숫자가 나와?
이러한 본질에 대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이 양반이 뭔가 아는구나 하고 제가 감탄을 하지요.
제 입장에서는 제가 다섯살때 가졌던 의문을
시원하게 해명해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대칭 비대칭은 헷갈리는 용어이므로 전체 맥락을 봐야 합니다.
전체적인 대칭과 부분적인 대칭이 있기 때문입니다.
5인 이유는 모든 구조는 이중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즉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사이의 의사결정의 3은 누구나 인정하는 건데
거기에 에너지가 덧씌워져 있다는 거죠.
마음의 원인>몸의 원인>실행>몸의 결과>마음의 결과 이렇게 됩니다.
에너지 원인>물질원인>실행>물질결과>에너지 결과 이렇게 됩니다.
모든 구조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구조는 뼈대인데 뼈대는 살 속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이중구조입니다.
겉에서 다 보인다면 그게 구조가 아니죠.
에너지가 없으면 존재가 불성립이므로 반드시 하나가 더 있습니다.
언어의 뒤에는 관점이 있고
피부의 뒤에는 뼈대가 있고
몸통의 뒤에는 마음이 있고
스크린 뒤에는 필름이 있고
라디오 뒤에는 방송국 있고
물체의 뒤에는 중력이 있고
자동차 뒤에는 엔진이 있고
일베충 뒤에는 열등감 있고
박근혜 뒤에는 아베가 있고
깃털의 뒤에는 몸통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