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 - 리뷰>
영화를 보고 요약된 느낌을 다시 풀어서 써본다.
" 한국 정치 구조 그대로를 담아냈다. 진보의 정치가 무대를 세팅해서 하는 것이라면, 보수는 그 자체로 현재 한국의 현실이다. 무대위로 올려져야만 하는 진보... 올라와서 양심선언(배신)하는 순진무구한 진보 혹은 그림자들의 독백 또한 현실적 이율배반이라서, 그림자의 리더는 순진무구한 이들과는 좀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보수 또한 보스 가 시키니까의 생존게임의 뚜껑을 정작 열어 보면, 결국 모든 책임은 아래에서 지는 거라는 것을 알게된 이들의 분노와 그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에 대한 배신감에 의해 이쪽과 저쪽에 다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한다. 진보는 떠남으로서 배신 하고, 보수는 떠넘기는 것으로 배신감을 갖게 만든다. 떠나는 자는 떠나므로 인해서 남은자가 포효하다 고요하게 하지만, 배신감을 느낀자는 떠나지도 못하고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 주고 그 자리를 차지 한다. 아이러니이다. "
1.
일대일이란 무엇인가.대칭이다. 대칭을 이뤄 그 대칭을 다시 깬다.주거니 받거니 이지만, 반드시 대칭은 깨지게 되어 있다.영화 일대일은 대칭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현실에서 대칭이 만들어 질 수 없는 구도이기 때문이다.임꺽정이나 홍길동처럼....의도적으로 대칭을 만든 것이다.정말 아픈 것은 한번도 그 임의로 만들어진 대칭이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영화에서 그림자 리더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울부짖는 장면" 이 바로 그 부분이다.민중은 혹은 국민은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에 각자의 분노를 이입하여 이합집산으로 모여 들지만, 결정적 순간에 인간임을 자각(?)하고 돌아(배신)선다. 흩어지면 죽는다고 악을 쓰고 협박도 하지만, 이미 그럴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 엔딩의 울분... 짐승의 목소리로 새어나오는 포효적 울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요이다.
2.
영화에 대한 다양한 평을 뒤로 하고, 나의 개인적 소감으로는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는 연극무대를 세팅 하듯이 이뤄졌다. 영화도 당연히 연극 같다. 한바탕 만들어진 무대위에서 분장을 바꿔가며 역할놀이하며 잘 놀았듯이... 여러 의도적인 장치들이 눈에 훤하게 다 드러나 보인다. 어찌보면 너무 다 보여 뻔하다. 그렇다. 김기덕 감독은 뻔한 얘기를 뻔하게 했다. 왜? 세상이 계속 사람들이 뻔하다라고 여기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므로. 그 뻔한 세상에 무대를 만들어 그림자 인생들을 출연시켜 데뷔시켜 준 것이다. 비로소 그림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낸다. 주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무엇을 선택하든 자신의 선택의 결과다라는 것을... 너무도 확고한 이 사실에 대하여, 거기에 진실의 보자기를 펼쳐보여 더 적나라하게 자신들을 보게 한다. 어쩌면 이 얘기는 진보와 보수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권력과 비권력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고, 또 인간 그 자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3.
진보..., 누군가가 뭔가에 의해 핵이 생겨 에너지가 되었다. 불평등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핵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핵은 분명한 지향점이 있다. 그러나 모여든 그리자들에게는 분명한 지향점이 없다. 타인의 지향점을 자기 지향점으로 삼은 것 뿐이다. 그 핵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주변만 떠돌다가 핵심을 보는 순간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고 논쟁에 돌입한다. "이건 아니잖아, 내가 원한건 이런 것이 아니었어. 똑같아 지는 것은 안돼, 저들도 인간이야, 내 삶도 그리 의미 없지는 않아, 저들을 다시 믿어줘도 되지 않을까...? " 어느순간 양심이라는 타협의 포장이 고개를 들게 된다. 진보가 행동방식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했을때, 문득 모여든 그림자들의 양심이 날개를 펼쳐 오히려 자신들의 핵을 쳐버린다는 것. 어쩌면, 그 고개를 넘어서더라도 어떤 희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수도 있고, 자신들이 무대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대위에 올라서 있다라는 두려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와, 세상의 온갖 어렵고 난삽한 문제들에 대한 일일이 대응하려는 것 중에서, 현재 진보는 어느 쪽인가? 그 무엇도 수월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대응은 언제나 진보의 핵을 죽이고 시작된다. 여고생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먼저인가? 모여든 그림자들의 삶의 해결이 먼저인가...? 근본적 국가 운영 시스템의 오류와 부재가 먼저인가, 온갖 불합리한 사회와 각각의 생존의 문제가 먼저인가?
4.
누군가 토끼몰이를 일부러 하지 않아도 진보들은 늘 토끼몰이꾼이 아니라 토끼몰이를 당하는 쪽이다. 그림자 리더는 의도적으로 무대를 만들어 토끼몰이 하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 방법은 그동안 대한민국 수립 이후 자행된 온갖 억압의 방식이었다. 억압된 방식으로 통치한 그 방식을 그대로 억압의 상징들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각 시대별 상징을 골라서 무대는 꾸며진다. 그 무대위에서 그림자들의 역할놀이가 시작된다. 가상의 세계에서 역할 놀이에도 그림자들은 양심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현실과 연결된 지점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상세계에서 현실로 다시 귀환하기를 바라게 된다.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감정이라는 느낌의 지점이 가상과 현실을 잇고 있다.
5.
보수가 서열이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신념화 된다. 확신범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생존이다. 보수 입퀄 생존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신념을 가지고 얘기한다. 시키는데로 하는 생존 그 자체에 덧 씌워진 신념. 또 시키는데로 행하는 이들. 그 아래에서는 시키는데로 이행하는 것도 생존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위의 책임이지 자신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책임을 위로 전가 시키고, 위에서는 아래로 책임을 전가 시킨다. 이 생존이란 연쇄 사슬로 떡고물은 계속 흘러 흘러 내려 온다. 이 지점을 그림자 리더는 차단 시켰다. 이 부분에 스위치를 만들어서 조정했다. 이 지점에다 그림자들의 무대를 만든 것이다. 그러자 아래는 위로 위는 아래로 계속 떠돌던 책임이라는 무게의 실체가 드러났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포장된 생존 외에는!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 스스로 유령놀이 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념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는 그 허무함은 절망이자 또 다른 분노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자신이 직접 설계자가 되는것뿐! 이 지점에서 괴물이 만들어진다. 우리 시대의 괴물은 이렇게 만들어 졌다.
6.
가해자이자 그림자들에게 최초로 고문당한 이가 그 자신이 속한 연쇄사슬의 가장 우두머리를 처형한다. 여고생(약자, 국민, 민주주의..., 미순이 효순이 일 수도 있고, 세월호 희생자들일 수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는 많은 폭력의 피해자들일 수도 있다.)을 질식 시킨 그 방법으로. 그리고, 그림자 리더를 그 자신이 고문 당했던 방식으로 살해 한다. 어쩌면 그건 살해보단 집행에 가까웠다. 승복 차림의 그림자 리더가 웬지 사형수 같아 보였으므로. 그들의 유령 놀이에 끼어든 댓가이다. 그들의 허상에 근접 하였기에 죽은 것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신념이 허상이란 것을 알게 하였기에 죽은 것이다. 더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만들어 줬기에 죽은 것이다. 유령 놀이가 무너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짙은 허무이다. 그 허무를 이겨내는 것은 그 자리에 또 다른 유령 놀이터를 세우는 것 뿐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이가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 뿐이다. 그 행위를 통제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왜? 그림자들의 양심선언을 다 듣고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지점에서 인간이 무너지거나 혹은 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즉 통제방법을 알아 버린 것이다. 괴물에게 더이상 무서운 것은 없는 것이다.
7.
1인 다역을 한 주인공... 그는 아마도 목격자 시점인것 같다. 우리의 주변에 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고.그 평범한 이들의 주변에는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난다. 이들이 그림자들이다. 이 그림자들은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적극적 가해자가 아니라 연극무대에 불려가 독백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되는 이들이다.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은 의지이기도 하고 선택이기도 하지만 배신을 통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양심이라는 탈이 갑자기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그림자들이 진보의 자화상 같다. 바로 너희 얘기이다. 그리고 우리들 얘기이다. 뻔한 얘기였던 것이다.
8.
맨 말단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위안을 받던 이가, 알아서 충성 했다라는 설계자 말 한마디로 가해자가 되었다. 위에서 시킨데로 했으니 잘못한게 없다고 여긴 말단 행동 대원이 그 말에 배신감을 느낀다. 속았다라는 비참함에 치를 떨게 된다. 인간이라는 양심이 고개를 들어 마지막에서 핵을 배신하는 진보와, 시키는데로 했을 뿐인데, 자신이 가해자라는 진실을 알고 조직에 배신감을 느끼는 보수 혹은 중도.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나는 누구인가....아니, 나는 너는 우리는 어떤 역할인가...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곧, 너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인가? 라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
9.
무엇이 진보를 악에 받치게 하는가... 그림자 리더에게는 복합적 양상이 겹쳐져 있다. 진보가 흘러온 방향에서 이념과 신념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세상의 무게에 압사해 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초월한듯한 삶으로 비춰지지만, 분노가 조절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죽음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극한적인 상황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진보의 실패는, 이 부분에서 밸런스 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의 판의 크기가 무대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진보는 무대위에서 내려와 세상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가상과 현실을 잇는 그 통로를 굳건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 한번도 실현되지 못한 이상은 진보에게 상상력을 준다. 이는 진보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가상의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 두 발을 땅에 내디딜때 느껴지는 그 묵직한 무게감안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게 될때, 현실의 처지를 자각하며 뒤로 물러서며 돌아갈 끄트머리를 부여잡을 때, 그것은 희망일까? 포기일까?
10.
우리나라 정치사와 사회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너무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너무나 뻔한 얘기라서 그다지 신선하지 않고 잔인하게 혹은 환타지 같은...그런데 보는 관객은 그렇게 잔혹하다 여겨지지도 않고 뭔가 그림자들이 어설프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그림자들이 지나치게 괴로워하며 양심선언을 하기 때문이다. 더 큰 사건보다 눈앞에서 타인이 당하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다. 자신들 삶의 고통을 그순간 내재화시키며 자족하려 든다. 그런데 또 그 모습이 그리 인간적으로 비춰지지도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 보이는 이유는...?오버다. 그림자들의 오버...즉 무리지어 모인 이들의 오버. 전복의 의지라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속한 삶과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동지적 신념을 기대하기란, 처음부터 어려운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그림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란 그림자 리더의 말도 공허하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이미 무대 위에서 독백을 시작했는데...과연 집이란 가족이란 무엇인가...? 그 그림자에게 돌아갈 현실이란 무엇일까? 돌아가는 것이 더 비참한 지점.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라는 말일 것이다. 있는 곳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 양심 선언을 한 그림자들은 과연 그 후로 어떤 선택들을 하였을까...무대위에서 독백을 통한 자기 삶을 보고 선택을 하고, 또한 평등함 속에서(그림자들이 서로 반말을 하는 것은 진보의 평등함을 나타내는 장치다.) 그림자 리더에 의해 그 평등함이 깨졌다고 돌아선 이들, 갑자기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는 그림자들, 지금도 충분히 나쁘지는 않다.라고 살만하다고 여기며, 거기서 어떤 돌아가야할 일말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돌아선다. 그림자 리더가 한 말 중에서.." 생각해봐, 분명히 있을거야, 너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그 무엇이 분명 있어. 그것을 버려야만 빠져 나올 수 있어 " 그런데 말이다. 정작 그 빠져 나오지 못하는 그 한 가지가 결국 그림자들에게 돌아갈 끄트머리 동아줄 역할을 한다. 썩은 동아줄이든 멀쩡한 동아줄이든.
이러함에도, 이들은 이미 무대위에 세워졌었다. 가상이지만 권력을 맛 보았다. 그 권력이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게 되었다. 무대위에서 행했던 자신들의 권력이 저들의 조직을 중간에서 차단 시켰을때, 어떠한 양상이 벌어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저들중에서 양심선언은 못해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에 대해서도.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그림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경멸해 마지 않는 곳으로 되돌아 간다. 그림자들이 체험한 권력은 과연 그들 안으로 수렴되어 권(존엄)이 될까, 아니면 바깥으로 퍼져 또 하나의 폭력이 될까.... 지극히 평범한 각자의 삶으로 귀향...인간적 구원인지 속물적 세계로의 퇴보인지... 어쨌든 양자적 삶으로의 회귀인 것은 분명하다.
11.
진보의 난제이자 보수의 딜레마....못이 박힌 피묻은 곤봉의 방향은....?그대로 비밀이 되어 땅속에 묻힐 것인가?아니면 사회로 나와 그림자들을 때려 잡거나 그들을 규합하여 또 다른 설계자 밑으로 줄을 세울 것인가...
12.
한국 정치의 총판.....뻔한 얘기를 뻔하게 하니까 더 못알아 듣는 것도 아이러니.... 괴물사회로의 가속화, 괴물 탄생 비화. 못이 박혀진 피묻은 곤봉... 보수조직의 말단 행동대장...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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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장면들에 연극처럼 무수한 암시와 상징들을 삽입하여 놓았다. 그런 부분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텍스트를 접하고 있는 것과 같다. 무대 묘사와 지문을 화면으로 처리해놓거나, 대사에 장치들을 의도적으로 집어 넣어 놓았다. 그래서 더 연극무대 같은 느낌이 부각되고 있다. 인생의 무대... 무대위에서 노래 안할거면 그만 내려와라.... 라는 것인지도. 보는 관객들 뻘쭘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