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미 문제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생각보다 크다.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해서는 그 거대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문제는 바깥에도 있고 안에도 있다. 옆집에도 있고 앞집에도 있고 우리집에도 있다. 문제는 도처에 있다. 자신의 안방까지 문제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제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남 탓을 일삼는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게 문제다.'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주체와 대상을 함부로 구분하여 자신이라는 단위를 자신이라는 안락한 경계 안에 감금하는 것이다.
언어는 가장 폭력적이고 효율적인 감금의 수단이다. 지식인들은 몇 가지의 생소한 개념과 복잡한 어휘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바깥에 놓인 악랄하고 기상천외한 문제를 규정하고, 해명하고, 해결하려 애쓴다. 문제는 지식인들이 저마다 다른 문제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해도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애초에 지식인들에게 문제를 만들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문제는 많을수록 좋다. 더 많은 문제가 더욱 확고하게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문제를 취사선택하고 대상화하며 자기 자신을 그 대상에 의해 다시 대상화한다.
그들은 전문적이고 지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박사논문을 아주 효과적이고 우아한 모습으로 장식한다. 그들은 유럽의 유명한 (죽은) 학자의 저서를 번역함으로써 학위를 따고 교수 자리를 얻는다. 그들이 가진 학자로서의 지위는 그들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 부여한 사회적 직업에 불과하다. 교수들이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지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위를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정적이고 교양 있고 소득이 높은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그들의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자신의 발언권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들은 지식인이 아니다. 남이 쿡 찔러서 하는 말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이 원하는 말을 대신해주는 것일 뿐이다. 이른바 대칭행동이다. 대중에 영합하려는 강신주나 지식권력에 편입하려는 강단의 행태는 대칭행동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뱉은 언어는 산을 이루고 그들이 작성한 문제의 목록은 도서관을 가득 채울 지경이다. 과연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했을까?
'지식인들은 입으로는 견제, 감시, 비판, 균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만 옳다는 지식의 독선을 앞세우곤 한다. 옳고 그름의 논리를 내세우는 그 자체로 거짓이다. 많은 경우 옳으냐 그르냐가 문제가 아니라 팀이 만들어져 있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권의주의라는 말도 유용하게 쓰일 수는 있겠지만, 이 말 자체에도 새로운 문제를 지적하여 그것을 대상화하려는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있으므로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권의주의라는 단어는 이미 어떤 거만한 인격적 주체를 상정하고 있다. 지식인의 교만은 사실 지식인의 탓이 아니다. 애초에 팀이 잘못 꾸려져 있었던 것이다. 교만한 지식인을 지식인이라고 해주는 우리의 잘못이다. 우리의 잘못을 시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들의 권위를 무시해주는 것이다. 그들과는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한 마디 말도 섞지 않는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전제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고 전제가 없는 현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지식인은 그것이 그것인지를 말해놓고 왜 그것이 그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보통은 자신과 가까운 것을 이것이라고 부르고 자신보다 먼 쪽에 있는 것을 저것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보편성이 없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구조이고 구조는 관계성이다. 관계성은 장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장 속에 입자 하나가 등장하면 입자의 속도와 방향은 장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이미 입자가 등장하기 전에 결정되어 있다. 세상의 인과 법칙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과법칙은 공간축과 시간축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단일적이고 일의적인 실체다. 그게 문제다. 우리의 문제도 아니고 그들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와 그들 사이의 문제. 이것이 바로 입자적 사고를 넘어서는 관계성의 사고다. 물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실체로서 문제가 놓여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질은 아주 가끔씩만 입자의 단위로 내려와서 그 실체의 일부분을 드러낸다.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없이 현상을 함부로 개념화하고 그 개념을 자신의 임의대로 도식화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질의 조건은 발동한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따옴표 안은 동렬님의 칼럼을 인용.
정답은 있고, 그 중에서도 인과론이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이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는 거지요.
그런데 대부분은 너무 성급하게 이 대원칙을 무시한다는 거고,
제가 드린 말은 이걸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라는 거고,
물자체든지 인과론이든지 그게 신이든지간에 과학적이어야 정답이라는 거고,
함부로 개념화하지 않는다, 함부로 규정짓지 않는다,
현상에는 전제가 있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
이 원칙을 머리 속에 넣고 있기만 해도 각자의 분야에서 더 쉽게 직관을 할 수 있고,
더 쉽게 예측할 수 있고 더 높은 확률로 성공할 수 있으며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 실용적인 모델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뻔히 보이는 결론을 외면하고 결정하기 쉬운 대로 하기 쉬운대로 하고 싶은대로
해왔던 대로 남이 하는 대로 부모가 친구가 시키는 대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대부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학문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태도와 마음가짐이라고 하면 구조론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요,
모든 사람이 되는대로 잡히는 대로 대충대충 하고 있다는 거,
그게 비극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비빌 수 있는 언덕은 인과론밖에 없지요.
인과론이 아니라면 우리가 관여하고 해결하고 주관할 건덕지가 전혀 없지요.
오죽했으면 붓다가 우연론-숙명론-존우론(신이 좌우한다)은 쓸모가 없다고 했겠습니까?
인과-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과학-재현성과 객관성
인과론과 과학론이 아니라면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일뿐이지요.
동렬님의 두 줄씩 띄어서 쓰는 스타일이 보기에 너무 예뻐서 따라해보았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답은 동적균형에 있습니다.
지식인이 주장하는 것은 정적균형입니다.
기울어진 축구장을 바로잡아 수평을 맞추면 된다고 여기지요.
기울어진 축구장을 그르다 하고 수평이 맞으면 옳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써 균형을 맞춰놓으면 다시 기울어져 버립니다.
동적균형은 그 축구장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기울지 않습니다.
웨이터가 쟁반을 들고 있으면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그 쟁반을 들고 걸어가면 기울지 않습니다.
그 쟁반에 와인잔 스무개가 올려져 있어도 한 방울의 와인도 넘치지 않습니다.
동을 부여하면 축구장은 저절로 수평이 맞아집니다.
그것은 팽팽하고 긴장된 상태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노무현은 정몽준 대 정동영+추미애로 균형을 맞추어 긴장된 상태를 만들려고 했지만
정몽준은 그 동적상태의 팽팽한 긴장을 못견딘 거지요.
정동영 추미애도 마찬가지로 동적균형의 긴장상태를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튕겨져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