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구조론은 이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의 경험칙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데 조립식 컴퓨터는 완제품 컴퓨터보다 가격이 싸다. 이 부분을 좀 더 정교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부분을 더해도 전체가 되지 않을까?
수학교과서에서 1 더하기 1은 2가 된다. 자연계에서는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학교과서에서는 1과 2에 주목할 뿐 그 '더하기'라는 놈의 노동에 대한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자연계에서는 그 '더하기'라는 놈의 노동비용을 청구한다. 이렇듯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인과율과 환원주의의 오류]
현대과학 및 논리학, 수학 등 제반 학문체계는 커다란 두 가지 기둥에 의해 떠받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인과율이다. 다른 하나는 환원주의다. 이 둘은 본질에서 같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해명하고 있다. 환원주의는 여기에 시간개념을 접목시켜 결과를 원인으로 되돌리는 방법으로 인과율을 증명하고 있다.
예컨데 경찰이 범인을 체포한다면 현장검증을 실시한다. 결과를 원인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반면 용의자는 알리바이를 대므로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원인을 제거하므로서 환원이 성립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논리학, 수학, 물리학, 사회학을 막론하고 모든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이 인과법칙과 환원주의는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인과와 환원의 논리가 붕괴한다면 현대의 과학, 논리학, 사회학 등 제반 학문 사상체계는 여지없이 붕괴되고 만다.
문제는 환원주의가 부분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계에서 환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날 수는 있어도 큰 나무를 씨앗으로 되돌리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구조론이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구조론룰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부분과 전체 사이에 숨은 플러스 알파에 대한 규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왜 부분을 합했는데도 전체가 되지 않을까? 왜 교과서적 이론으로는 결과에서 원인으로의 환원이 가능한데 자연계에서는 불가능할까?
[뉴튼주의의 대착각]
예컨데 뉴튼의 단조화운동은 현실 공간에서 가능하지 않다. 진자는 어느 정도 움직이다가 멈추어버리고 만다. 이는 공기의 저항과 연결부위의 마찰력 때문에 에너지가 손실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얼버무린다.
환원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이렇듯 외부에서 잡스러운 것의 개입 때문이며 이상적인 공간에서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명철한 인식이 아니다. 이는 얼버무리는 것에 불과하며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자연계의 비가역성은 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뉴튼의 단조화운동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우리는 단조화운동의 비현실성을 들어 자연계의 비가역성을 설명하려드는 오류를 범해 왔다.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단조화운동의 비재현성은 외부에서 이질적인 요소의 개입 때문이며 이상적인 계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자연계의 비가역성은 이상적인 계에서도 여전히 비가역성이 성립한다. 이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환원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잡다한 외부요소의 개입을 방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실험공간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비가역성 때문이다. 즉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법칙 때문이다. 구조 때문이다.
[구조란 무엇인가?]
구조란 둘 이상의 부분이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방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접착제이다. 즉 부분을 결합시킬 본드가 필요한 것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것은 이 본드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본드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드는 곧 질서이다. 이 질서는 구조체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 이 질서가 어떤 이상적인 기준에 부합하였을 때 기능을 수행한다. 반면 그 이상적인 기준과 어긋났을 때는 조금도 기능하지 않는다.
그 이상적인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에서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방아쇠 없는 총은 쏠 수가 없고 뇌관이 없는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은 것은 방아쇠와 뇌관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뉴튼의 단조화운동이 재현되지 않는 것은 지구상에서 이상적인 실험공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고, 자연계의 비가역성은 예의 방아쇠 혹은 뇌관이 제거되었기 때문인 즉, 둘은 전혀 차원이 다른 별개의 법칙이다. 우리는 이 둘을 혼동하므로서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숨은 구조]
문제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부분, 곧 구조가 가져가는 에너지비용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예컨데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보이지 않는 손실부분을 계획에 반영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비능률과 사회주의의 비능률을 비교할 때 사회주의의 비능률이 자본주의의 비능률보다 훨씬 더 크다.
구조의 결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핵에너지에 비유할 수 있다. 핵이 붕괴되어도 그 인자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수소폭탄이 터지면 수소가 헬륨으로 변할 뿐 그 원자가 증발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손실이 있으며 그 손실된 에너지로 원자력발전소를 돌리고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이다.
구조의 붕괴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천문학적인 에너지를 손실하는 만큼 역으로 구조의 성립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수학책에서는 가능한 결과에서 원인으로의 환원이 현실공간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잡다한 것의 개입 때문이며, 열심히 노력하여 그 외부요소의 개입을 차단하기만 하면 수학교과서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공간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천만에!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방해 때문이며 그 방해요소만 제거하면 사회주의는 실현된다고 믿고 있다. 천만에! 이건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뉴튼의 단조화운동과 구조론은 본질에서 다르다. 방해요소를 제거하면 이상적인 단조화운동은 일어나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자연계의 비가역성에 의해 환원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구조론을 배워야 하는 이유]
구조의 붕괴는 엄청난 에너지의 손실을 야기한다. 이는 핵분열로 증명할 수 있다. 반면 구조의 성립른 엄청난 에너지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 이 에너지 손실부분이 우리가 상상하는 규모보다 터무니없이 더 크기 때문에 비능률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구조론을 배워야 한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외부에서 방해요소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구조의 성립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비용을 예산에 책정하지 않아서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여 그 엄청난 비용을 충당할 예산이 확보된다면 이상적인 사회주의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조론은 건축설계도와 같다. 구조론이 없다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엄청난 비효율과 손실이 따른다. 그러므로 건축을 위해서는 설계도부터 그려야 하며 설계도가 정한 순서대로 재료를 투입하여야 한다.
[구조비용의 절감방법]
문제는 건축의 설계도를 만드는 비용이 집을 짓는 비용보다 더 크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설계도 만드는 비용을 우습게 아는 것은 그 설계도가 재활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착각이 일어난다. 구조비용을 실제보다 낮게 생각하는 것이다.
설계도를 재활용하는 방법으로 구조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최적화를 지향하며 최적화는 반복을 통하여 성립한다. 구조론은 결국 동일한 구조를 반복하는데 관한 이론이다.
요는 이러한 설계도의 재활용이 하나의 건축 안에서도 성립한다는 점이다. 즉 A 건물의 설계도를 B건물에도 적용하는 방법으로 절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 A 건물 안에서도 방과 방의 모양을 동일하게 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구조론은 하나의 단일한 구조체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닮은꼴을 반복하여 적용하므로서 설계도의 크기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때 아무리 닮은 꼴을 적용해도 더는 줄일 수 없는 한계가 수학적으로 산출될 수 있다.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최소화된 구성요소의 수는 3125이며 하나의 구성요소 안에서는 5다. 즉 어떤 한개의 단일한 계를 제작할 때 중복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필수구성요소 5에 이르기까지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5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여기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구조는 붕괴된다. 반면 이 5를 갖추었다면 그 5를 반복하여 복제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아파트를 건축한다면 방의 모양과 크기를 같게 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같게 만들더라도 절대로 같아질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있다. 예컨데 안방과 화장실은 크기가 달라야 한다. 이렇게 더 줄일 수 없는 한계가 5이며 이 5를 반복적으로 집적하는 방법으로 최적화에 도달하므로서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그 결코 더 줄일 수 없는 5가 가진 각각의 기능과 역할과 결합의 순서와 결합의 방향에 대한 것이다.
구조론은 이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의 경험칙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데 조립식 컴퓨터는 완제품 컴퓨터보다 가격이 싸다. 이 부분을 좀 더 정교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부분을 더해도 전체가 되지 않을까?
수학교과서에서 1 더하기 1은 2가 된다. 자연계에서는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학교과서에서는 1과 2에 주목할 뿐 그 '더하기'라는 놈의 노동에 대한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자연계에서는 그 '더하기'라는 놈의 노동비용을 청구한다. 이렇듯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인과율과 환원주의의 오류]
현대과학 및 논리학, 수학 등 제반 학문체계는 커다란 두 가지 기둥에 의해 떠받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인과율이다. 다른 하나는 환원주의다. 이 둘은 본질에서 같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해명하고 있다. 환원주의는 여기에 시간개념을 접목시켜 결과를 원인으로 되돌리는 방법으로 인과율을 증명하고 있다.
예컨데 경찰이 범인을 체포한다면 현장검증을 실시한다. 결과를 원인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반면 용의자는 알리바이를 대므로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원인을 제거하므로서 환원이 성립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논리학, 수학, 물리학, 사회학을 막론하고 모든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이 인과법칙과 환원주의는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인과와 환원의 논리가 붕괴한다면 현대의 과학, 논리학, 사회학 등 제반 학문 사상체계는 여지없이 붕괴되고 만다.
문제는 환원주의가 부분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계에서 환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날 수는 있어도 큰 나무를 씨앗으로 되돌리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구조론이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구조론룰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부분과 전체 사이에 숨은 플러스 알파에 대한 규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왜 부분을 합했는데도 전체가 되지 않을까? 왜 교과서적 이론으로는 결과에서 원인으로의 환원이 가능한데 자연계에서는 불가능할까?
[뉴튼주의의 대착각]
예컨데 뉴튼의 단조화운동은 현실 공간에서 가능하지 않다. 진자는 어느 정도 움직이다가 멈추어버리고 만다. 이는 공기의 저항과 연결부위의 마찰력 때문에 에너지가 손실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얼버무린다.
환원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이렇듯 외부에서 잡스러운 것의 개입 때문이며 이상적인 공간에서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명철한 인식이 아니다. 이는 얼버무리는 것에 불과하며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자연계의 비가역성은 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뉴튼의 단조화운동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우리는 단조화운동의 비현실성을 들어 자연계의 비가역성을 설명하려드는 오류를 범해 왔다.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단조화운동의 비재현성은 외부에서 이질적인 요소의 개입 때문이며 이상적인 계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자연계의 비가역성은 이상적인 계에서도 여전히 비가역성이 성립한다. 이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환원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잡다한 외부요소의 개입을 방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실험공간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비가역성 때문이다. 즉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법칙 때문이다. 구조 때문이다.
[구조란 무엇인가?]
구조란 둘 이상의 부분이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방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접착제이다. 즉 부분을 결합시킬 본드가 필요한 것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것은 이 본드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본드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드는 곧 질서이다. 이 질서는 구조체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 이 질서가 어떤 이상적인 기준에 부합하였을 때 기능을 수행한다. 반면 그 이상적인 기준과 어긋났을 때는 조금도 기능하지 않는다.
그 이상적인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에서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방아쇠 없는 총은 쏠 수가 없고 뇌관이 없는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은 것은 방아쇠와 뇌관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뉴튼의 단조화운동이 재현되지 않는 것은 지구상에서 이상적인 실험공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고, 자연계의 비가역성은 예의 방아쇠 혹은 뇌관이 제거되었기 때문인 즉, 둘은 전혀 차원이 다른 별개의 법칙이다. 우리는 이 둘을 혼동하므로서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숨은 구조]
문제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부분, 곧 구조가 가져가는 에너지비용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예컨데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보이지 않는 손실부분을 계획에 반영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비능률과 사회주의의 비능률을 비교할 때 사회주의의 비능률이 자본주의의 비능률보다 훨씬 더 크다.
구조의 결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핵에너지에 비유할 수 있다. 핵이 붕괴되어도 그 인자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수소폭탄이 터지면 수소가 헬륨으로 변할 뿐 그 원자가 증발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손실이 있으며 그 손실된 에너지로 원자력발전소를 돌리고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이다.
구조의 붕괴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천문학적인 에너지를 손실하는 만큼 역으로 구조의 성립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수학책에서는 가능한 결과에서 원인으로의 환원이 현실공간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잡다한 것의 개입 때문이며, 열심히 노력하여 그 외부요소의 개입을 차단하기만 하면 수학교과서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공간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천만에!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방해 때문이며 그 방해요소만 제거하면 사회주의는 실현된다고 믿고 있다. 천만에! 이건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뉴튼의 단조화운동과 구조론은 본질에서 다르다. 방해요소를 제거하면 이상적인 단조화운동은 일어나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자연계의 비가역성에 의해 환원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구조론을 배워야 하는 이유]
구조의 붕괴는 엄청난 에너지의 손실을 야기한다. 이는 핵분열로 증명할 수 있다. 반면 구조의 성립른 엄청난 에너지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 이 에너지 손실부분이 우리가 상상하는 규모보다 터무니없이 더 크기 때문에 비능률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구조론을 배워야 한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외부에서 방해요소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구조의 성립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비용을 예산에 책정하지 않아서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여 그 엄청난 비용을 충당할 예산이 확보된다면 이상적인 사회주의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조론은 건축설계도와 같다. 구조론이 없다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엄청난 비효율과 손실이 따른다. 그러므로 건축을 위해서는 설계도부터 그려야 하며 설계도가 정한 순서대로 재료를 투입하여야 한다.
[구조비용의 절감방법]
문제는 건축의 설계도를 만드는 비용이 집을 짓는 비용보다 더 크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설계도 만드는 비용을 우습게 아는 것은 그 설계도가 재활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착각이 일어난다. 구조비용을 실제보다 낮게 생각하는 것이다.
설계도를 재활용하는 방법으로 구조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최적화를 지향하며 최적화는 반복을 통하여 성립한다. 구조론은 결국 동일한 구조를 반복하는데 관한 이론이다.
요는 이러한 설계도의 재활용이 하나의 건축 안에서도 성립한다는 점이다. 즉 A 건물의 설계도를 B건물에도 적용하는 방법으로 절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 A 건물 안에서도 방과 방의 모양을 동일하게 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구조론은 하나의 단일한 구조체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닮은꼴을 반복하여 적용하므로서 설계도의 크기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때 아무리 닮은 꼴을 적용해도 더는 줄일 수 없는 한계가 수학적으로 산출될 수 있다.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최소화된 구성요소의 수는 3125이며 하나의 구성요소 안에서는 5다. 즉 어떤 한개의 단일한 계를 제작할 때 중복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필수구성요소 5에 이르기까지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5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여기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구조는 붕괴된다. 반면 이 5를 갖추었다면 그 5를 반복하여 복제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아파트를 건축한다면 방의 모양과 크기를 같게 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같게 만들더라도 절대로 같아질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있다. 예컨데 안방과 화장실은 크기가 달라야 한다. 이렇게 더 줄일 수 없는 한계가 5이며 이 5를 반복적으로 집적하는 방법으로 최적화에 도달하므로서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그 결코 더 줄일 수 없는 5가 가진 각각의 기능과 역할과 결합의 순서와 결합의 방향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