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5062 vote 0 2003.01.29 (17:32:42)

사랑은
-『나』란 무엇인가? -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의 방법이다.

나와 남
너와 나
사랑은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또는 그것을 경계짓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경계짓고 있다.


내것
내가족
내소유
내나라
내민족

사랑은
그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모른다.
어느 순간
내가 고립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내 존재가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아이들은
예닐곱살이 되면서
자아의식이 싹트고
내가 내라는 것을 깨닫지만
내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지켜보는 어른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내 것을 차지하고는
득의양양해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내가 아니었을 때가 더 많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 모든 것이
길들여진 것임을 아알게 된다.
그 모든 것이
타의에 의해 조작되고 조종된
가짜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
내가 넘어가서 안되는 금들을 발견할 때
배척되고 따돌림 당할 때
그 그어진 금 바깥으로 사정없이 밀쳐내어질 때
문득 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은
사랑을 통하여
그러한 고립을
그러한 부자연스러움을
그러한 어색함들을 하나씩 해소해 나간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그 금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며
그 금을 넘어 한걸음 더 나아가도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며
어색하게 바깥으로 밀쳐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일곱 살 아이가
동구밖에서 맘껏 뛰어놀다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배가 살살 고파오면
놀이를 그만두고 내집으로 뛰어들 듯이
자연스럽게 엄마 품안에 매달리듯이
내가 돌아갈 곳이 있는지를 탐문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 때가
사랑을 발견하는 시점이다.

아이는 머리가 점점 커 갈수록
예전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많은 것들이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져 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 시점이
사랑을 처음 발견하는 시점이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을 수 있는 것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을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처음으로 갈등을 느낄 때가
최초로 사랑을 느끼는 때이다.

일곱 살 아이는
사내아이들과 손잡고 뛰놀다가
여자아이 앞에서 저도 모르게 멈칫하게 된다.
그 순간 가슴에 금이 하나 그어진다.
그 금을 발견하고
그 금을 넘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사랑이라는 것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그 금을 넘어설 수 있기 위해서는
네가 그 금을 넘어옴을
먼저 허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다.

사랑은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부단한 탐구이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나의 자아를
세상 모든 것으로 확대한 사람이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사랑은
너를 통하여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너와 나를 경계짓는 방식에 의해
내 존재가 규정되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나 아닌 것들에 의해 지배되거나
나 아닌 것들에 의해 규정되거나
나 아닌 것들에 의해 대리되곤 한다.

처음에는 저항과 투쟁을 결심해보기도 하지만
내가 투쟁을 결의할 때
그 경계선에 머물러 있던
나 아닌 많은 것들이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들을 여전히
나로부터 떠나지 않게 붙잡아 놓으면서
내가 그것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방법은
내가 그것을 사랑하는 방법 하나 뿐임을 아알게 된다.

나의 허무와
나의 공허와
나의 상실을 경험할 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처음으로 내가 버려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
내게도 사랑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크기는 허무의 크기
사랑의 크기는 상심의 크기
사랑의 크기는 상실의 크기
사랑의 크기는
내가 나를 부인하는 정도의 크기와 온전히 비례한다.

내 희망과 야심을 말소하고
내 의식을 하얗게 표백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까지
나를 부인해 본 사람만이
사랑을 아알게 된다.

완벽하게 내가 소멸하였을 때
완전한 사랑에 도달한다.

내 가슴 속에 그어진
내가 넘어가서 안되는
네가 넘어와서 안되는 그 금들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모두 지워버렸을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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