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부터 두 가지 형태의 이상주의가 있어왔다. 카오스와 코스모스다. 니체는 이를 코스모스를 숭상하는 아폴론의 이상과 카오스를 숭상하는 디오니소스의 이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르네상스는 그리이스 정신의 부활이다. 그리이스적인 것은 무엇인가? 비너스상의 황금비례 팔등신으로 대표되는 기하학적인 질서다. 파르테논 신전에 늘어선 열주와도 같은 그것은 스파르타 군대의 질서다.
아테네의 자유분방함은 다르다. 두 가지 그리이스 정신이 있다. 스파르타의 그리이스와 아테네의 그리이스가 있다. 문제는 오늘날 서구정신이 스파르타의 그리이스를 살려내되 아테네의 그리이스를 부활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로마가 무력으로 그리이스를 제압하면서 앞선 그리이스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스파르타의 강(剛)을 배우되 아테네의 유(柔)를 배우지는 못하였다. 아폴론을 배우되 디오니소스를 배우지 못하였다. 불완전하다.
그리이스가 불과 백여년 만에 전 세계에 전파했던 것을 로마는 천년을 지배하고도 전파하지 못했다. 양식을 완성하지 못했다. 오늘날 그들의 정신은 널리 인류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그다지 매력적이지가 않다. 유혹하지 못한다.
르레상스 미술은 신(神)의 얼굴을 한 기독교를 극복하고 보다 인간적인 그리이스를 부활시켰으나 여전히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회화는 소실점이론이나 색채이론, 명암이론 같은 기술적 혁신들을 어떻게든 캔버스 위에 반영하지 못해 안달난듯이 보인다.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관객들 역시 그림에서 뭔가를 배워야만 흡족해 한다. 그 작품을 낳은 화가의 마음을 짚어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림 속의 소재와 구도와 주제에 주목할 뿐이다.
고갱이 남태평양 타이티 섬으로 떠난 것이 그 때문이다. 이론적이고 도식적이고 권위적인 사실주의 사조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고갱 역시 저항했을 뿐 그 반대편에서 양식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서구의 미학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질서의 논리에 얽매여 있다. 거기에 석가탑의 엄격함이 강조될 뿐 다보탑의 풍성함이 없다. 자기 마음 속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는 동양화와 다르다.
그들의 그림은 혼이 없는 그림이다. 인간이 아닌 로봇의 그림이다.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다. 고객의 주문에 대응하여 작품을 생산할 뿐 자기 마음을 그림에 담아 드러내려는 주체적인 의지가 없다.
소실점을 찾는 시점(視點)을 둘 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觀點)을 그림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색채의 기교에 치중할 뿐 화가가 가진 안목의 차별화가 가능하지 않다. 문인화는 생겨나지도 않았다. 남종화의 깊은 경지가 없다.
새는 두보와 이백의 날개로 난다
역사는 두 날개로 난다. 진보의 날개와 보수의 날개가 아니라 공자의 이상과 노자의 이상이라는 두 날개로 난다. 두보의 날개와 이백의 날개로 난다. 아폴론의 날개와 디오니소스의 날개로 난다.
역사의 날개는 진보의 날개다. 주류의 진보와 비주류의 진보가 있다. 메인스트림의 진보와 아웃사이더의 진보가 있다. 도시민의 진보와 부족민의 진보가 있다. 스파르타의 진보와 아테네의 진보가 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클래식과 팝,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북종화와 남종화, 교종불교와 선종불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석가탑과 다보탑, 강(剛)과 유(柔), 계몽과 소통은 역사이래 경쟁해온 진보주의의 두 축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가치다. 역학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가 있다. 가치가 둘이므로 인간을 움직이는 것도 둘이다. 하나는 힘이고 둘은 미(美)다. 전자는 힘으로 계 내부에 질서를 부여하고 후자는 매력으로 외부와 관계를 맺는다.
역사는 힘의 논리와 미(美)의 논리, 질서의 논리와 소통의 논리, 문제해결의 논리와 동기부여의 논리, 중심부의 논리와 주변부의 논리라는 두 가치의 수레바퀴 사이에서 변증법적인 대결의 기록이다.
힘과 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다. 둘은 모순되는 듯 보이지만 충돌하지 않는다. 힘을 앞세워 미를 얻으려는 남자와 미를 통하여 힘을 얻으려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이건 비유다.) 둘은 결국 만나서 사랑하고 하나가 된다.
21세기는 산업화라는 근대의 성취를 반영하는 새로운 미학적 양식을 요구하고 있다. 20세기가 힘을 추구했다면 21세기는 미를 추구한다. 20세기가 질서를 추구했다면 21세기는 소통을 추구한다.
요즘 유행하는 환경이니 생태니 웰빙이니 하는 사유의 바탕에는 도교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21세기의 문명이 근대주의가 강조하는 질서의 문제에 부닥친 것이 아니라 소통의 문제에 부닥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진보가 역학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라는 두 본질적 가치의 변증법적 대결이라면 보수는 무엇인가? 보수는 가치가 없다. 그들은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들은 두려움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다.
보수가 의존하는 두려움은 힘도 아니고 매력도 아니다. 꿈도 아니고 이상주의도 아니다. 무지와 비겁 그리고 불신과 증오다. 그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게 하는 보호장치다.
일제의 폭압과 625의 전쟁과 독재의 흉포함을 겪으며 언제나 생존의 문턱에서 두려워 떨며 살아왔던 기성세대가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신세대의 싱그러움과 발랄함을 보고 질투하는 것이다.
이성으로 본능을 극복할 수 있다. 원숭이 부시의 힘에 의한 질서로 불가능하고 미에 의한 동기부여로 가능하다. 단결과 통합이라는 독재자의 슬로건을 버리고 완성과 소통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리얼리즘의 실패
아폴론의 이상과 디오니소스의 이상은 진보의 두 얼굴이다. 역사이래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이론,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미디어가 나타나면 아폴론의 이상이 앞서가며 길을 연다.
그러나 아폴론만으로는 양식화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한계가 있다. 이상주의가 전파되려면 반드시 미학적 양식화에 성공해야 한다. 불교사상은 불교미학과 함께 전파되고 기독교사상은 기독교 미술과 함께 전파된다.
공자가 창안한 이론보다 공자가 발전시킨 양식이 먼저 전파된다. 그것이 공자의 예(禮)다. 공자는 인의(仁義)라는 유교사상을 예법이라는 상나라 문화의 수레에 실어서 운반했던 것이다.
반면 묵자는 사상을 창안했을 뿐 그에 걸맞는 양식을 개발하지 못했다. 하층민 출신이었던 묵자의 신분상의 한계다. 노자 역시 양식의 개발에 성공하고 있다. 정자와 연못으로 꾸며지는 한국의 정원은 도교사상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는 리얼리즘이라는 양식의 수레에 그 사상을 실어 전파한다. 양식이 없으면 사상은 결코 전파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양식이 미학적으로 불완전하다데 있다.
왜 아폴론의 독주는 실패하는가? 양식화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왜 마르크스는 실패하였는가? 리얼리즘의 한계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창안한 사회주의자의 생활양식이 기독교문화에 익숙한 그들의 삶을 대체하기에는 빈약했기 때문이다.
왜 리얼리즘은 실패하는가? 그 그림이 나타내려는 주제가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마음에 앞서가는 즉 화가를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이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흙장난을 하는 어린이는 그 흙으로 성을 만들지 탑을 만들지에 대한 분명한 계획이 없다. 그 흙의 냄새와 만져지는 촉감과 그 분위기가 그저 즐거울 뿐이다. 그 마음 그대로 반영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화가가 그 그림의 주인이 된다. 화가의 마음이 먼저고 화가의 의도는 나중이다. 관점이 먼저고 시점은 나중이다. 흙의 냄새와 촉감과 분위기가 화가의 마음 속에서 차고 넘치고 농익어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는 것이어야 진짜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정작 자기가 만드는 자동차를 그 비싼 가격 때문에 타지 못한다는 것이 소외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그 그림을 주문하는 고객의 요청을 따를 뿐이라면 그것이 인간소외다.
역사적으로 북종화는 남종화에 패배해 왔다. 기교가 뛰어난 장인의 미술이 아마추어 선비들의 문인화를 이기지 못했다. 남종화에는 삶과 문화가 반영되어 있지만 북종화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북종화는 보여주기 위한 미술이다. 남종화는 소통하기 위한 미술이다. 북종화는 그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이 걸려있는 건물의 용도를 안다. 남종화는 그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을 소장한 애호가의 인격을 안다.
북종화는 그 건물에 모여든 사람의 시선을 끌 뿐이다. 건물이 주가 되고 그림은 장식이다. 남종화는 그 그림을 구경한 사람의 마음까지 끄는데 성공한다. 사람이 주가 되고 그림은 매개가 된다.
누가 고흐를 죽였는가?
고흐와 고갱은 같은 길을 가는 동지이면서도 서로 시샘하는 경쟁자였다. 둘은 진정한 친구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 서로의 가슴을 후벼팠다. 결국 고흐는 고갱 때문에 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명을 비판하는 칼럼을 신문에 기고하여 먼저 유명해진 사람은 고갱이었지만 그 그림에 화가의 마음을 담아내는데 성공한 사람은 고흐다. 고갱은 타이티 사람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렸지만 고흐는 자기 마음을 그려냈다.
고갱과 고흐가 두달간 동거하면서 그렸던 지누부인의 초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같은 모델을 두고 완전히 다르게 그린 것이다. 고흐의 지누부인은 탁자 위에 낡은 책을 펼쳐놓고 고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건 가짜다. 그녀는 실은 술집 주인이기 때문이다. 모델이 되기 위해 정숙한 귀부인의 옷을 입고 낡은 책을 펼쳐놓고 숙녀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고갱이 고흐를 호되게 비판했음은 물론이다.
고갱이 그린 ‘아를의 밤의 카페’는 솔직하다. 책이 아닌 싸구려 술병을 앞에 놓고 있다. 뒤에 있는 탁자에 모여서 떠들고 있는 사람은 창부와 집배원과 그 거리의 사람들이다. 고갱의 그림이 더 그 거리의 실상에 가깝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그림을 보는 관객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관객은 언제라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관객은 객(客)이다. 그러나 관객은 언제라도 주(主)가 되고 싶어한다.
고흐는 그 방법을 알려준다. 고흐의 그림에는 그 여인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여인은 그 탁자 위에 펼쳐진 책이 나타내는 것은 그 여인의 마음이다. 관객은 고흐의 그림을 매개로 타인의 마음과 소통할 수 있다.
관객은 그림을 통하여 타인과 소통한다. 그럴 때 관객이 주인이 된다. 청중은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시청자는 드라마를 통하여 소통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이야기한 그대로 친구와 수다를 떤다.
그 수다는 시청자가 주체적으로 창작해낸 작품이다. 한 편의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올려진 소감을 통해 또다른 반향을 낳는 것이다. 그 무대는 관객의 무대다.
고갱의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관점(觀點)이 없고 시점(視點)이 있을 뿐이다. 단지 그 시대 그 마을사람의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누가 그거 알고 싶댔나?'
고흐의 그림이 예술이라면 고갱의 그림은 만화에 가깝다.
알려주기가 목적이라면 그림보다 사진이 낫다. 인상주의가 없었더라면 사진의 등장과 함께 회화는 사라졌을 것이다. 고갱은 이론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인상주의를 완성한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또다른 사실주의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무언가 알려주려고 하는 계몽주의는 가짜다. 알려주는 것이 곧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는 주가 되고 배우는 자는 종속된다. 지식은 교육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소통이 진짜다. 사람은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매개로 삼아 자기 마음을 누구에겐가 전달하고자 한다. 진정 원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소통이다. 지식은 단지 매개에 불과하다.
사실주의는 객관이다. 객관에 머물러서는 잠시 머무르다 가는 객(客)의 신세를 넘을 수 없다. 객(客)이 아니라 주(主)가 되어야 한다. 인상주의는 주관이다. 주관이 진짜다. 모든 이가 각자의 위치에서 주가 될 때 소통은 가능하다.
고갱은 문명을 비판하고 대안적 삶을 주장하며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죽어갔다. 그러나 고흐는 고갱이 머나먼 타이티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아를에서 이미 찾았다. 그리고 완성했다.
고흐는 자기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마침내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고흐의 그림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진정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모든 위대한 예술이 그러하다.
베토벤을 듣는 사람과는 어깨를 기대고 함께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모차르트를 듣는 사람과는 손잡고 함께 정원을 거니는 것이 좋다. 인생은 결국 어디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흐는 우리에게 착한 조언자이다.
이 시대에 진보가 위기다. 왜 진보가 위기인가? 진보가 도리어 인간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이론에 치우치고 계몽에 치우쳐서 진보주의자의 삶에 걸맞는 문화의 양식을 개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희망인데 인간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주를 삼고 인간을 지식에 종속시켜버린 것이다. 내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인의 정치적 지배를 위한 지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만의 진보가 아니라 모두의 진보가 되기 위해서는 전파해야 한다. 양식을 완성해야 전파할 수 있다. 오늘날 그 양식은 주류 강단학계가 아니라 다목리 이외수나 섬진강 김용택과 같은 변두리에서 탄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