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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을 흐려서 섞어찌개를 만들어 보려는 움직임들이 있다. 이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윤리의 문제, 애국의 문제, 과학의 문제는 원초적으로 분야가 다른 것이다. 마땅히 분리대응해야 한다.

대통령님 글의 의미

대통령이 팔 걷어부치고 나설 만한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구태여 한 말씀을 던졌다. 그렇다면 의도는? 다른 곳에 있다.

지금까지는 대통령의 말씀 한 마디가 정치판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사소한 걸로 조중동이 들고 일어나기 때문에 정작 하실 말씀을 못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대통령께서 발언한 이유는 앞으로 더 많은 발언을 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의 차원이다. 대통령의 인터넷 댓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염려말고 진도 나가도 된다.

대통령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때 마다 조중동이 개트집을 잡고 한나라당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이제는 사안이 있을 때 마다 자연스럽게 발언하여 익숙하게 해두려는 것이다.

사실이지 대통령 말씀대로 MBC에 광고를 취소하는 등은 지나친 대응이 될 수 있다. 필자 역시 그 문제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네티즌들이 지나치게 뾰족하게 대응하기 때문에 필자가 해야할 말을 오히려 못하는 편이다.

사실이지 필자는 MBC에 그다지 유감이 없다. 원래 세상 일이 그렇다. 열심히 앞길을 헤쳐서 난국을 타개하고 앞장서서 길을 열어나가는 사람도 있고 뒤에서 구시렁거리며 딴지거는 인간도 있다.

딴지 거는 인간도 필요하지만, 지율스님의 단식도 좋고 조계종의 헛기침소리도 다 좋지만, 부안군민도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민노당도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는 하지만 주도권은 절대로 못넘겨준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주도권은 절대로 못 준다

딴지맨도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하지만 딴지맨은 영원히 딴지맨이나 하는 것이 맞다. 딴지맨은 절대로 대통령이 될 수 없고 딴지당은 절대로 집권당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앞장서서 난국을 타개하고 길을 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번 일에 굳이 역성들고 나서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사건에는 윤리의 문제, 정치의 문제, 애국의 문제, 과학의 문제 등이 얽혀 있다. 필자가 제기하는 부분은 ‘과학의 문제’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과학의 문제, 윤리의 문제, 애국의 문제는 별개다. 이들을 섞어서 잡탕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논점을 흐리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필자가 제기하는 것은 과학의 국가전략에 관한 거다. 이건 차원이 다른 것이다.

윤리는 애초에 논외이다. 애국은 본질과 무관한 거다. 애국은 네티즌이 이 문제에 끼어드는 구실에 불과한 것이다. 본질은 ‘과학에 관한 국가전략’의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전략으로 21세기를 한국의 세기로 만들 것이냐의 문제이다.

하여간 윤리할 넘 윤리하고 애국할 넘 애국해라.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크고, 딴지맨이 찌질대도 과학은 계속간다.

서구기준의 윤리 어쩌구 따위에 말려들어 21세기를 한국의 세기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포기한다면 바보짓이다. 이건 원초적으로 차원이 다른 거다.

비유한다면 이런 거다. 몇 해 전 IT벤처가 유행할 때의 일이다. 국가에서 벤처를 지원하다보니 멀쩡한 벤처는 죽고 사이비 벤처만 흥청대던 시절이 있었다. 수익원이 없는 사이비벤처가 퍼주기 경영을 하기 때문에, 수익모델이 있는 알짜벤처가 이익을 못 내는 현상 말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를 해야할 시점에 사회주의를 해서, 벤처를 말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벤처에 아무런 지원을 하지 말았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국가가 지원하는 바람에 많은 사이비 벤처가 망했지만 그 와중에 수 많은 훈련된 엔지니어가 탄생했다.

즉 국가의 지원은 그래도 벤처인력을 키우는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사기벤처들은 결국 망했지만 그 와중에 양성된 인재들이 알짜벤처로 옮겨가서 지금의 코스닥 호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지원을 하고 나중에는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사회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지원을 해야한다. 초중등교육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다.

그러나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은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공부 안하는 학생은 당연히 탈락시켜야 한다. 처음에는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 맞고 일정 수준에 오르면 자본주의로 말을 갈아타는 것이 맞다.

선진국들도 다 이렇게 했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의도적으로 재벌을 키웠고 나중에는 자유경쟁을 시켰다. 초기 단계에는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맞고 지금 단계에서는 기업을 쥐어짜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것이 맞다.

사회주의라는 것이 뭘까? 별 것 아니다. 필리핀에 아니 태어나고 대한민국에 태어난 그 자체로 막대한 권리를 얻는 것이다. 필리핀에 태어나면 영어 하나는 잘하겠지만 그래봤자 홍콩에나 가서 식모 밖에 못된다.

한국에 태어나면 영어를 못해도 기본적인 교육과 의료와 복지가 제공된다. 이걸 국가가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이다.(불행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조만간 우리나라도 그렇게 된다. 즉 단지 한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막대한 기본밑천을 제공받아서 태어나는 거다.)

그러나 그 기본 이상의 가치는 경쟁을 통해서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해야 한다. 여기서 원칙은 처음에는 사회주의가 맞고 나중에는 자본주의가 맞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쟁들은 여기서의 우선순위를 모르고 처음부터 자본주의만 하자거나 끝까지 사회주의만 하자는 거다.

갓 태어난 아기들을, 어린이들을, 청소년들을 경쟁이라는 정글에 방치하면 아이는 죽고 만다. 채소를 키워도 그렇다. 어릴 때는 거름을 주고 크면 솎아내는 것이다. 계속 거름만 주자는 것이 좌파들의 문제이고 처음부터 솎아내자는 것이 수구들의 문제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다.

소년의 재능은 적어도 15살이 되어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데도 5살때부터 그림만 시킨다거나 그림에 재능이 있는데도 7살 때부터 피아노만 시킨다면 그런 식의 영재교육은 오히려 재능을 죽이는 거다.

그러므로 적어도 15살이 될 때 까지는 마음껏 놀게 해서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게 경쟁을 유보하고 보호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MBC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과학에 관한 국가전략’에 있어서 한국의 과학을 어린이로 볼 것이냐 아니면 성인으로 볼 것이냐이다. 어린이로 보고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고, 성인으로 보고 국제사회와 대등한 윤리기준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 MBC들의 입장이다.

어느 쪽이 맞을까? 답은 역사가 결정한다.

조선왕조가 왜 망했을까? 대원군 입장에서 보면 개화를 해도 망하고 안 해도 망한다. 어차피 망할 거면 버틸 수 있는 한 버텨보는 것이 맞다. 그러니 개화를 안하는 것이다. 대원군 입장에서는 맞는 결정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조선왕조가 망해도 단지 이씨들의 왕조가 망할 뿐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라가 결단이 나더라도 개화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은 떠밀리는 형태로 개화를 했다. 그래서 망했다. 그러나 이씨들의 왕조가 망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계속 간다. 여기서 역사의 필연을 읽어야 한다.

무엇인가? 대원군이 오판한 것은 개화의 속도다. 개화는 천천히 해도 되므로 일단 왕권을 강화해서 내부적인 힘을 기르고, 국력이 강해지면 그때 가서 개화하자는 것이 당시 양반들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19세기라는 세기가 눈부시게 빠르게 변화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범선이 오더니 다음에는 증기선이 왔다. 처음에는 조총을 갖고 오더니 다음에는 연발총을 가지고 왔다. 이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생각했다. 중화가 문명이고 나머지는 다 오랑캐인데 중화는 청나라 오랑캐가 짓밟아서 문명이 죽었고, 그 문명이 조선으로 옮겨왔으니 지구촌에 유일하게 조선만 문명국인데, 그 문명은 이제 완숙하므로 여기서 별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자 우리가 지금 어떤 시점에 서 있는가?

진중권들의 생각은 서구문명이 인류문명의 최종적인 귀결점이고, 종착지이며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으므로 여기에서 새로운 업그레이드 버전은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므로 핀랜드나 노르웨이를 모방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라는 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견해가 다르다. 서구문명은 20세기 문명에 불과하다, 조만간 새로운 버전이 나올 것이며, 그 버전은 한국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명의 룰은 누가 정하는가?

룰은 문명을 주도하는 자가 정한다. 우리가 주도하면 우리가 룰러다. 서구기준? 웃기고 자빠졌네. 우리가 룰을 정하는데 무슨 개소리야.

우리는 20세기 서구문명에 막차를 탄 것이 아니라 21세기 신문명에 기관차를 탔다. 어느 시대나 룰은 앞서가는 자가 정하기 마련이며, 이제는 우리가 룰을 정할 것이므로 서구의 개소리는 개무시가 정답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옳을까? 정답은 역사가 결정한다. 정답은 당신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결론하자.

우리는 20세기 서구문명의 막차가 될 것인가 21세기 신문명의 기관차가 될 것인가? 서구문명의 막차를 탈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진중권을 추종하라. 신문명의 기관차가 될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스스로 룰을 정하게 하라.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다. 우리는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앞두고 민감해져 있는 것이다. 지금은 구문명의 완숙기가 아니라 신문명의 맹아기다.

맹아기에 할 일은 거름을 주고 북을 돋우는 일이다. 이 문명이 성숙하면 그때 가서 잡초를 솎고 병든 것을 솎아내도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후발주자의 잇점이 있다. 기존의 관행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적들이 일군 영국도 그랬고 청교도들이 일군 미국도 그랬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기존의 관행을 개무시하고 자기들 스스로 룰을 정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서구추종 사대주의자들의 개소리는 개무시가 정답이다. 우리가 새로운 문명의 기관차라는 확신이 있다면 말이다.

나라면 해적 소리를 들어도 영국이 갔던 길을 간다. 양키 소리를 들어도 미국이 갔던 길을 간다. 그 길은 새로운 길이며 남이 개척해 놓은 남의 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개척한 바로 우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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