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거대한 역사의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패러다임이란 하나를 바꾸면 결국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를 바꾸지 않으면 그 하나조차도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 개혁을 시작할 때 가이드라인을 정합니다. 딱 요기까지만 하자는 거지요. 그러나 실패합니다. 부작용이 더 빨리 나타납니다. 아니한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입니다.
역사의 필연에 의하여.. 결국 모두를 바꾸게 됩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개혁이란 무엇일까요? 혹자는 권력의 교체라 하고 혹자는 세대의 교체라 하고 혹자는 문화의 교체라고 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하나를 바꾸면 모두가 바뀝니다. 모두가 바뀌지 않으면 그 하나조차도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멈추자? 불가능합니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실용주의? 적을 방심시키는 전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규모의 전쟁을 시작해 버렸는지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아래는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기준 사태로 본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
개혁은 드러난 문제를 한건주의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성공사례를 발굴해야 한다. 왜인가? 코드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은 관현악단의 연주와 같다. 모든
악기가 지휘자에 의해 일률로 통제된다. 각자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다.
먼저 성공사례를 발굴한
다음 거기서 보편적인 응용을 가능케 하는 성공모델을 수립해야 한다. 그 성공모델이 전파되고 응용되어야 한다. 비로소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가능하다.
“목수가 오전 내내 연장만 벼르고 있길래 일을 안하는줄 알았더니 오해였다. 오후와 와서 보니 그
사이에 집을 한 채 뚝닥 지어놓았더라.”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문제는 도목수가 오전내내 연장을 벼르는 동안 다른 일꾼들은
무엇을 할것인가이다. 오늘은 공치는 날이구나 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버린다면? 그래서 코드가 맞아야 한다.
목수가 연장을 벼르는
동안 잡역부는 워밍업을 하며 기다려주어야 코드가 맞다. 이를 위해서는? ‘일머리’를 알아야 한다. 일머리를 알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그 일의 전과정을 책임져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작은 일이라도 좋다. 밑바닥 일이라도 좋다. 40여명의 선수를 움직이는
프로야구팀 감독이든, 30여명의 스태프를 지휘하는 영화감독이든, 100명의 사수대를 이끈 운동권 학생이든 좋다.
어떤 하나의 조직을 장악하고
독자적인 책임아래 일을 성공시켜본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부른다. 역대 미국의
대통령들은 입지전적인 인물이 당선되는 경향이 있었다. 부시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되었지만 스스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여기고 있어서 참모나
각료를 대거 입지전적인 인물로 뽑았다고 한다.
윤락녀 아들에 고교 중퇴의 이력을 가지고 입지전적 인물로 명성을 얻은 버나드 케릭을
장관으로 지명했다가 불법가정부 고용, 탈세 등의 비리가 드러나 철회한 사건이 그 예다. 파월이나 라이스도 입지전적인 요소가 있다.
입지전적인 인물의 특징은 일머리를 알아서 보스와 손발을 잘 맞춰준다는 거다. 눈치가 빠르고 코드가 맞다. 꽉 막힌 책상물림 꽁생원
샌님들과는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머리를 중시한다. 이기준 임명은 부시의 케릭 임명과 닮은 점이 있어서
씁쓸하다.
(지나친 일머리의 강조는 좋지 않다. 일머리의 강조는 패러다임을 바꾼 태종임금의 방식일 뿐 세종의 치세에는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므로 일머리
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지난번 김혁규의 총리인선 때 필자는 대통령이 김혁규를 기용하려 한 이유-실용주의-를 설명하는 것을
보고 김혁규는 아니다 하고 감히 단언했다. 필자의 예견은 적중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이기준 기용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곧 짤릴 것임을 알았다.
(증권가 애널리스트의 예측이 맞지 않아도 주가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듯이 정치예측은 빗나간다 해도
필요하다. 군중심리에 의한 파시즘적 광기를 막아준다.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제공해서 심리적 안정을 준다. 탄핵의 광기는 예측력의 결여에 의한
것이다. 설사 틀린 예측이라도 정치예측은 정치안정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왜 대통령은 김혁규를 버릴 결심을 하고서도 그를
두둔했을까? 짜르고 난 다음에 해명하면 너저분한 변명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반박자 빠르게 미리 설명해 둔다. 그것이 일머리를 아는 사람의
방식이다.
대통령을 모시려면 코드가 맞아야 한다. 대통령은 항상 반박자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 한다. 수순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수순은 통상적인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무엇인가? 대통령은 이해찬과 김우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청해서 마속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중요한 결정은 모두 내 책임 하에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방법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이해찬과 김우식을
구한 것이다.
대통령은 그렇게 사람을 살린다. 대통령의 측근 챙기기는 유별나다. 대통령 밑에서 잠시라도 일했던 사람은 나중에라도
부름을 받는다. 강금실을 인권대사로 기용한 것이 그 예다.(이 외에도 측근챙기기 사례는 매우 많다.)
대통령이 안희정을
청와대로 불러서 동업자라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이 대통령이 안희정에게 내준 정치적 퇴직금임을 알았다. 대통령은 그런 방식으로 챙겨주면서 떠나보낸
것이다.
동업해서 앞으로 같이 해먹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퇴직금 줘서 독립시킨 것이다. 이 속깊은 의미를 아는 사람이 이 나라에 몇이나 될까.
대통령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의 앞뒤를 살짝 바꾼다. 일머리를 아는 사람의 행동요령이다. 왜인가? 노무현 모델의 성공을 위해서다.
왜 모델의 성공이 아니면 안되는가?
삼국지의 유비 삼형제 에피소드와 같다. 조조는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중국 역사의 성공이지
조조모델의 성공은 아니다. 유비는 실패했지만 유비모델은 여전히 살아있다.
유비모델은 미완성이지만 민중의 호응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수천 수만의 유비가 생겨나는 것이다.
수호지의 예가 그렇다. 삼국지와 수호지는 유비의 작품도 나관중의 작품도 아니다. 민중의 공동작품이다. 유비는 그 씨앗을 제공했을 뿐이다.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한솥밥을 먹고 한 침대에서 잘 때, 그 모델이 전파되어 흑송강도 화화상 노지심, 표자두 임충과 한솥밥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유비모델은 인격적 의미의 성공으로 하여 역사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반면 조조의 실패는 인격적 실패다. 한 명의 조조는 역사를 위해 필요하지만 두 명의 조조는 필요없다.
우리 모두가 유비가 될 필요는 있지만 우리 모두가 조조가 될 필요는 전혀 없다. 실패한 조조모델의 전파는
불필요하다. 또 해롭다.
노무현 정치의 성공은 곧 노무현 모델의 성공으로 승화될 때 한하여 유의미하다. 수천 수만의 작은 노무현들이 탄생할 때 진정한 성공이 된다.
노무현 개인의 성공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측근을 아낀다. 사람을 아낀다. 모델을 성공시키고 전파하기 위해서다. 일머리를 아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종의 방식, 승부사의 방식은 굷고 짧게 한번으로 끝내야 한다. 다음 정권에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단락 지어놓고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세종의 방식이 찾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