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짜 지식은 관성이다. 나머지는 부스러기다. 존재는 안과 밖이 있다. 관성은 존재의 안이다. 구조론은 관성을 해명한다. 존재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인류가 지금껏 본 것은 밖이다. 안에 대해서는 에너지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안에서 무슨 일을 하지? 모른다. 관성은 현재 상태를 변화시키는 외부의 힘에 저항하는 내부의 질서다. 내부에 무언가 있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이 없으므로 관성을 부정한다. 원자론과 관성론은 모순된다. 관성은 내부를 긍정하고 원자는 내부를 부정한다. 원자론은 외부를 보고 관성론은 내부를 본다. 원자론의 사유에서 관성론의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외부 관측자 중심 사유에서 내부 자체 질서 중심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존재는 내부가 있다. 지식은 존재를 잘게 쪼개서 관찰한다. 존재를 쪼개면 내부의 구조가 파괴된다. 인간은 산 것을 죽여서 관찰하고, 움직이는 것을 멈추게 해서 관찰하고, 연결된 것을 단절시켜 관찰한다. 쪼개지 않고 안을 관찰하려면 구조의 눈이 필요하다.
### 인간이 실패하는 이유는 내부의 관성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성공하려면 먼저 관성을 죽여야 한다. 내부에는 자체 질서가 있다. 외부에서 작용하면 밸런스의 복원력이 작동하여 되돌린다. 먼저 뻣뻣한 것을 말랑말랑하게 해놓고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헤겔의 정반합이 단서가 된다. 반은 외부에 있다. 합은 내부에 있다. 모든 변화는 밖에서 안으로 간다. 그 반대는 없다. 헤겔이 잘못 말했다. 합은 합쳐져서 증가하는 플러스 방향이다. 우주의 기본 방향은 척력이 인력으로 바뀌어 좁아지는 마이너스 방향이다. 모든 변화는 외부를 내부화한다. 생물의 진화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변화를 내부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변화로 바꾼다. 눈과 코와 귀와 입은 외부의 자극을 신체 내부로 끌어들인다. 자연의 변화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갈수록 안으로 들어간다. 우주의 기본방향은 밖 > 안, 척력에서 인력, 확산에서 수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 열린사회 후 닫아걸기다. 먼저 문을 열어 외부 자원을 끌어들이면 내부가 말랑말랑해진다. 관성이 죽고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다. 다음 닫아걸고 내부를 압박해야 한다. |
방향이라는게 원래 헷갈립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좌표가 필요한 거지요. 닫힌계를 부여하는 이유입니다.
오른쪽 왼쪽이라고 하면 헷갈리고
진행방향 기준으로 시계방향, 반시계방향이라고 해야 합니다.
질량이 뉴턴은 내부에 있다고 했고, 아인슈타인은 장을 이야기하므로 외부에 있다고 합니다.
뉴턴은 객체(닫힌계) 내부에 있다고 하고 아인슈타인은 물질(원자론) 외부에 있다고 말하므로 같은 것입니다.
구조론은 닫힌계를 중심으로 사유합니다.
닫힌계는 닫아거는 것이며 이는 그 이전에 열려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관계는 A와 B의 관계인데 관계는 관측자인 A나 B의 밖이지만
A와 B를 합친 닫힌계의 안입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나 바깥의 파트너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가족 혹은 집단 안에서 발생하는 내부의 변화입니다.
왜 이게 중요한가 하면 완전히 밖이면 사랑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예) 원시 부족민.. 그럼 애는 어떻게 만들지? 전쟁 중에 집단 거시기.. 그거 성범죄인데?
밖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여도 닫힌계를 부여해서 나의 밖이 아니라
집단의 안이라고 규정해야 하는데 호르몬은 집단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밖 - 우연히 확률적으로 구조가 작용하면 밖이다.
안 - 필연적, 절대적으로 구조가 작용하면 안이다.
결론..
1.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는 것이 진보다.
2. 우연을 필연으로 바꿔서 해석해야 재현이 가능하다.
춘향이 몽룡을 만난 것은 우연이다. 춘향이나 몽룡의 밖에서 연애가 일어났다.
춘향이 몽룡을 만난 것은 필연이다. 집단 안에서 연애가 일어났다. 집단을 의식한 행동이다.
기준을 정하기에 따라 밖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안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구조론은 필연의 절대성을 추적하므로 닫힌계를 걸어서 밖을 안으로 바꿔놓고 논합니다.
밖이라고 하면 관측자인 내가 기준이 되고
안이라고 하면 닫힌계가 기준이 됩니다.
관계냐 구조냐.. 같은 것을 바깥에 있다고 하면 관계이고 안에 있다고 하면 구조입니다.
안이라고 하려면 한 차원 더 올라가야 하고 거기서 압력을 걸어야 합니다.
길은 집 바깥에 있다.
길은 집과 집 사이에 있다. 집에서 마을로 한 차원 상향. 마을에는 압력이 걸려 있음.
구조론의 방향전환은 계 내부의 압력인데 그건 수학으로 해명됩니다.
만약 고유한 속성이 있다면 수학으로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저도 그 부분이 헷갈리는데
예전에 동렬님 저서인 '생각연구' 라는 책에서 '사건이냐 사물이냐'라는 목차가 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내용이 존재의 성질은 사물이 아니고 사건이고
사물은 안이고 사건은 밖이며
양파껍질 아무리 까도 양파에 대한 뭔가가 나오지 않으니
양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밖이 되는 환경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배운 내용은 존재의 성질은 사물의 안쪽을 볼 게 아니라
사건인 바깥쪽과 연결시켜 봐야 한다 이렇게 이해했는데
최근에는 오히려 밖을 볼 게 아니라 안을 봐야 한다고 하니 개념이 뒤바뀐 거 같아 헷갈렸다가
제 나름대로 '안'이라는 단어를 '계 안"으로 바꾸니깐 모든 문장이 납득된 거 같긴 합니다
"부분은 전체 안에서 봐야 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옛날에 사용하던 개념이랑 결이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남녀의 사랑은 집단 안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면 헷갈리지 않습니다
최근에 사용하는 밖이란 뜻도 계 바깥에 이런 뜻으로
종교쟁이들이 믿는 신화적인 것들이 물리학적 전제 밖에 내용이니 틀렸다고 이해됩니다
우주의 독립적 존재는 하나도 없고 만물은 외력의 영향을 받는데
이걸 계 안에서 만물은 외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이해하면
동렬님이 왜 안을 강조하는지 납득되긴 합니다
설령 외계인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같은 우주의 계 안에서의 존재라면 같은 물리법칙을 공유하고 있으니깐
지구에 사는 인간이랑 별다를 게 없다고 필연적으로 선험이 가능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물리법칙 밖에 존재인 거지요
영화 고질라처럼요 (연비는 높은데 연료는 없는 모순 상태)
안이나 밖이라는 말이 헷갈릴 수 있으므로
깔때기 구조를 생각해야 합니다. 깔때기 밖에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좁혀진다는 거지요.
밖이 먼저니까 밖을 강조하게 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까 그 점을 강조하면 헷갈릴만 하군요.
그래서 닫힌계를 정해야 합니다.
구조론의 고민은 적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뭔가를 반대한다고 떠들어야 사람들이 주목하는데
구조론은 지당한 말씀이라서 뭔가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경마장에 가서 돈을 잃지 않는 방법은? 베팅을 안하면 됨.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큰손들은 다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 기술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면
들어올 말을 찾는게 아니라 확실하게 아닌 말을 배제하면 됩니다.
보통은 자신이 추적하는 말을 대가리로 잡고 몇 가지 조합을 만드는데
복식에서 하나가 자기가 만든 조합 밖에 있는 말이 들어오면 속이 쓰리지요. 반은 맞췄는데.
그래서 피아노를 칩니다. 즉 자신이 관심을 둔 말과 나머지 모든 말의 조합
이건 뭐냐면 살짝 비켜갔을 때의 속쓰림을 예방하는 베팅법.
대부분 이런 뻘짓을 하다가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거지요.
성공확률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실패 속쓰림 방지에 투자하는거.
근데 인간들이 정치도 이딴 식으로 합니다. 장사도 이딴 식으로, 연애도 이딴 식으로.
뭐냐면 돈을 따야 한다는 본질이 안이고
살짝 빗나갔을 때 속쓰림 방지는 거기서 벗어난 밖인데
인간들이 다들 바깥을 보고 있다는 거.
객관.. 객체를 중심에 두면 안을 보게 되는데
주관.. 자기를 중심에 두므로 밖을 보게 되는거.
근래에 관성이라는 말을 쓰게 된 이유는
구조론과 원자론이 대립각을 세우는데 조금 애매하지요.
원자도 단위라는 점에서는 구조론과 통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천동설과 지동설은 자기중심적 사고와 객체중심적 사고입니다.
자기를 중심에 세우므로 자신의 밖을 보게 되고 자연히 원자론적 사고
관성은 외력의 작용에 저항하므로 당연히 안입니다.
구조는 당연히 안입니다. 건축구조든 자동차구조든 뭐든 구조는 안입니다.
객관적 닫힌계 내부냐, 주관적 관측자 외부냐 대립각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입니다.
요즘 한 1~2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 이전에는 바깥을 봐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다가
최근에는 내부를 봐야 한다로 논조가 바뀌었는데,
나름 다각도로 생각해봤으나 개인적으로 개념이 합쳐지질 않습니다.
표현이나 자구에 매달리지 않고 맥락에 따라 해석을 하려고 해도
제 개인적으로 해석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꽤 있네요.
"관성은 내부를 긍정하고 원자는 내부를 부정한다. 원자론은 외부를 보고 관성론은 내부를 본다. 원자론의 사유에서 관성론의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특히 이런 표현을 보면 헷갈리는데,
"우주의 기본방향은 밖 > 안, 척력에서 인력, 확산에서 수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 열린사회 후 닫아걸기다. "
이 서술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관성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점(내부나 외부)이 아니라 방향(내부 > 외부 or 외부 > 내부)을 말씀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어지럽네요.
물리학을 보면, 질량이 관성에 의한 것인데,
질량이 뉴턴은 내부에 있다고 했고, 아인슈타인은 장을 이야기하므로 외부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성이 내부에 있는 것이라면 속성처럼 들리는데,
그건 아닐 것 같고, 설명 부탁드립니다.
내부에 저항력(반작용)이 있는 게 당연하긴 한데,
구조론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에 의한 관점으로 서술하며
외부와 내부의 사이를 보게 되므로
더욱 헷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