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집단과의 상호작용이고 죽음은 고립이다.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다면 죽은 것과 같다. 무인도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은 무수히 일어난다. 완벽한 고립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시험관에 갇힌 신세거나 아니면 이건희처럼 식물인간 상태이리라. 인간은 고립을 피하여 주변을 끌어들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삶이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읽고, 역할을 잃고, 동료를 잃고, 진리를 잃고 완벽하게 고립되면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포착한 위험을 집단에 보고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강박이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다. 드러난 위험이든, 잠복한 위험이든, 꾸며낸 거짓 위험이든 보고해야 한다. 그러다가 관종짓을 하게 된다. 그것은 집단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끌어내는 유전자의 장치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판을 키우는 것이고, 하나는 일을 줄이는 것이다. 전자는 집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후자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진보주의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두 방향의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진보는 집단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이면서 동시에 성소수자를 건들지 말라는 개인주의다. 노빠는 집단적이고 개인적이다. 딜레마가 있다.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마이너스다. 위기 때는 빠져나와야 하는데 집단 속으로 들어가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점. 이미 집단 밖으로 튕겨 나와 있는 사람은 어쩌지? 혼자 죽는다. 보수가 항상 화가 나 있는 이유다. 그들은 궁지에 몰려 있다. 한국의 보수는 대부분 노인빈곤과 핵가족화에 화가 나 있다. 몰릴 대로 몰려서 빡칠 대로 빡쳐 있다. 조국이든 윤미향이든 보이는 대로 두들겨 패서 화풀이를 해야 겨우 호흡을 유지한다. 인간은 언제든지 집단과 맞물려 돌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진보주의다. 그러다가 위태로울 때는 개인주의로 빠져나와야 한다. 올바르게 집단과 맞물리는 방법은 없는가? 그것은 공자의 길이다. 노자의 길은 집단에서 빠져나가는 길이며 그것도 한 번은 써먹을 수 있으나 두 번은 불가능하다. 이미 빠져나갔기 때문에 더 빠져나갈 수 없다. 궁지에 몰린다. 살아있다는 것은 상호작용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위태로울 때마다 하나씩 라인을 자른다. 더 자를 카드가 없을 때 인간은 죽는다. 결국 모두 죽는다. 어차피 죽지만 구경할 것 다 구경하고 천천히 죽는게 인생의 요령이다. 인간은 언제나 마이너스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플러스는? 그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국가나 민족이나 인류나 문명에의 소속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인간은 오로지 도망칠 수 있을 뿐이며 가담해 있어야 도망치는데 그것은 개인이 하는게 아니다. 국가가 없는데 국가에 소속될 수는 없다. 회사가 없는데 취직할 수는 없다. 부족민은 가정도 없다. 소속이 없다. 플러스는? 집단이 해줘야 한다. 가족을 얻으려면 부모가 낳아줘야 한다. 연결의 플러스는 남이 해주는 것이다. 자가발전은 불가능이다. 단절은 내가 할 수 있다. 개인은 어떻게 플러스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개인 위의 가족, 부족, 민족, 국가, 인류, 문명, 진리, 신과 연결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단 희미하다. 그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공자의 길이다. 1) 인간은 집단적 동물이다. 2) 인간은 고립될 때 죽는다. 3) 연결되면 환경변화로 문제가 일어난다. 4) 문제의 해결은 집단이나 환경과의 연결을 끊는 마이너스다. 5) 연결을 다 끊으면 고립되어 죽는다. 6) 연결하는 방법은? 그것은 남이 해주는 것이며 제 손으로 할 수 없다. 7) 스스로 연결하는 방법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희미한 연결고리를 찾아서 명확히 하는 것이다. 8) 연결되었다는 증거는? 환경변화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플러스는 불가능하다. 연결을 끊는 마이너스만 가능하다. 연결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먼 동창에게서 전화가 온다. 대통령에 출마하면 20촌 넘는 친척에게서 연락이 온다. 큰 싸움판에 뛰어드는 방법으로 희미한 연결을 살려낼 수 있다. 그것은 원래 있던 연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