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 유심론 구조론
복습하자. 하버드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윌리엄 제임스에 의하면 실용주의는 철학이 아니고 문제해결 방법이며 철학사의 양대산맥인 명목론과 실재론, 유물론과 유심론, 경험론과 합리론의 이원론적 대칭구조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철학 없이 그냥 쓸 만한 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20세기에 철학은 파산했다. 그리고 지금 재건되어야 한다. 크게 보면 유물론과 유심론이다. 유물론은 관측자가 있다. 관측대상은 물질이다. 그런데 존재는 의사결정 단위이므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찾으려고 물질을 쪼갠다. 찾는 사람이 있는 거다. 존재는 점차 수동적이 된다. 존재가 해야 할 의사결정을 관측자가 하고 있는 것이다. 관측대상은 숨어서 자신이 발견되기만 기다린다. 의사결정하지 않는다. 의사결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존재일 수가 있지? 존재는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의 다섯 가지 성질을 가진다. 이 다섯이 작은 원자 속에 숨어 있다는 말인가? 근데 그것들이 왜 그 비좁은 곳에 다 기어들어 갔지? 인간이 존재를 파헤칠수록 존재는 수동적이 되고 작아진다는 모순이다. 존재가 존재답지 않다. 존재는 의사결정할 수 있어야 하므로 에너지를 쥐고 공간을 차지하며 시간을 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맹랑하다. 설사 궁극의 입자를 찾았다 한들 그 궁극의 입자가 어떻게 에너지를 가지고 물질의 형태를 취하며 공간으로 연결되고 시간으로 이행하며 정보로 나타나는지는 첩첩산중이다. 문을 하나 열었더니 또 다른 문이 나온다. 계속 노가다를 해야 한다. 이건 아니다. 유물론이 관측대상에 매몰된다면 유심론은 관측자 자신을 반영한다. 그런데 관측자가 반드시 사람을 의미하는건 아니다. 존재는 반응해야 하고 의사결정해야 하며 그러려면 상호작용 대상이 있어야 한다. 1은 존재가 불성립이다. 그래서 추가되는 것이 관측자이다. 인간이 인격을 가지듯이 존재도 어떤 격을 가져야 한다. 그 격은 앞에서 말한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아우르는 성질이다. 존재가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심이다. 유심론은 관측자가 자신을 투사한 것이다. 구조는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관계다. 인간이 물질을 관측하면 셋이 존재한다. 일단 인간이 있고 물질이 있고 관측행위가 있다. 관측자의 작용과 관측대상의 반작용이 있다. 그런데 관측행위가 하나의 사건이고 사건은 곧 존재다. 의사결정이 존재다. 그러므로 구조로 보면 가족도 있고 국가도 있고 인류도 있고 신도 있다. |
"관측행위가 하나의 사건이고 사건은 곧 존재다. 의사결정이 존재다."
- http://gujoron.com/xe/1201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