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죽었다 그리고 부활한다
유명 유튜버 올리버 쌤의 동영상에 의하면 미국인의 50퍼센트는 중 2 수준의 영문을 독해하지 못하는 사실상의 문맹이라고 한다. 글자는 읽는데 책을 못 읽는 사람들이다. 미국인의 25퍼센트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는가 하면 11퍼센트는 세계지도에서 미국의 위치를 찾지 못한다고 한다. 매우 무식하다고. 그 이유는 학교 예산의 8퍼센트만 연방에서 지원하고 나머지는 지자체가 지원하는데 가난한 지역은 돈이 없어서 학교를 폐쇄하고 교사를 해고하는 중이라고. 교육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기본적으로 교육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 때문이다.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적대한다. 지식인은 대중을 이용해 먹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존 듀이가 미국을 망친 것이다. 실용주의 사상의 폐해다. 미국인이 교육을 등한시하는 이유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땅이 넓다. 사람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꼴보기 싫은 사람은 피하면 된다. 그렇게 살아도 밥 먹는데 지장이 없다. 금주법 시대에 미국 남자들은 술 먹고 아내와 자식을 때렸다. 그래서 금주법이 생긴 것이다. 왜 때렸을까?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은 남편이 구타하면 부인은 이웃집으로 피신한다. 동네사람이 참견하게 된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이웃집이 50킬로 거리에 있다. 시골에서 왕처럼 행세해도 주변에 말릴 사람이 없다. 텍사스 사람들은 집집마다 지하실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기형아를 지하실에 감춰둬야 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문제는 왜 텍사스냐다. 이웃집이 50킬로나 떨어져 있으면 이성을 사귈 기회가 없어서 근친상간이 일어난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이웃과 적극 왕래해야 한다. 한국인이 교육에 열중하는 이유는 사람대접을 받기 위해서다. 못 배운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못 배우면 괄시받는다. 한국 특유의 엘리트주의가 있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필연 그렇게 된다. 철학의 역사는 명목론과 실재론, 유물론과 유심론, 경험론과 합리론이 대결한 역사다. 실용주의는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따지지 말고 경험적으로 검증된 것만 취하자는 태도다. 이건 철학의 포기다. 미국은 철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망가졌다. 한국은 철학을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면 죽는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래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철학이 없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땅은 넓고 자원도 많고 돈도 많다. 세계의 두뇌를 뉴욕과 LA에 모아놓고 있다. 한국은 미국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이기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가 없다. 실용주의가 명목론과 실재론, 유물론과 유심론, 경험론과 합리론의 이원론적 대결구조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양쪽의 견해 중에 경험적으로 검증된 것만 취하겠다며 사실상 철학을 버리고 철학을 부정하는 반철학적 태도라면 구조론은 일원론이며 이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선행하는 상부구조다. 구조는 어떤 하나를 지목하지 않는다. 왜? 하나는 존재가 불성립이기 때문이다. 명목과 실재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 세상은 하드웨어인가 소프트웨어인가? 둘 다 아니다. 둘은 하나다. 하드와 소프트는 구분되지 않는다. 숫자 1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호두 한 알일까 아니면 지목하는 손가락 하나일까? 둘 다 아니다. 맹기를 두는 바둑기사는 바둑판과 바둑알 곧 하드웨어 없이 소프트웨어만으로 바둑을 둔다. 바둑판과 바둑알이 하드웨어라면 기보는 소프트웨어다. 어느 쪽이 진짜 바둑일까? 둘 다 아니다. 바둑은 머릿속에 있다? 아니다. 합의된 룰이 바둑이다. 바둑판은 바둑이 아니고 두고 난 다음의 기보도 바둑이 아니다. 하드웨어도 진짜가 아니고 소프트웨어도 진짜가 아니다. 양쪽은 이원론적인 대칭구조를 보인다. 명목과 유물과 경험이 한 편이고 그 반대쪽에 실재와 유심과 합리가 한 동아리를 이룬다. 둘 다 아니다. 어떤 가리켜 지목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짜다. 명목과 유물과 경험은 돌멩이나 나무토막과 같은 작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가족이나 국가나 인류나 신과 같은 큰 것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물론자는 작은 것에 집착하여 원자를 쪼갠다. 그런데 큰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작은 것으로 도망친다는 사실이 웃기지 않는가? 웬 원자타령? 한 명은 딱 지목할 수 있지만 가족은 손가락으로 지목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의사결정단위가 있으면 존재가 있는 것이다. 유심론은 대상을 지목하지 않는다. 존재는 곧 의사결정의 단위다. 의사결정은 어떤 지목되는 대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 안에 1은 절대로 없다. 1은 변화를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지해 있는 것은 계속 정지해 있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인다는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1은 계속 정지해 있으므로 반응하지 못한다. 반응하지 못하므로 1은 없는 것이다. 2는 움직이므로 1이 아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 유물론은 관측자와 대칭된 관측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맞은 편에 관측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함정이다. 관측대상은 수동적 존재인 것이다. 유물론은 존재를 수동적으로 보는게 실패다. 곤란해진다. 그렇다면 에너지는? 공간은? 시간은? 정보는? 유물론은 추가로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건 뭔가 아니잖아. 직관적으로 아닌건 아닌 거다. 존재 따로, 에너지 따로, 공간 따로, 시간 따로, 정보 따로면 이 많은 것들을 누가 통합해주지? 그러므로 유물론은 존재론을 구성할 수 없다. 유물론은 하나의 관점이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을 나누어서 보는 이상한 관점이다. 유심론은 존재를 능동적으로 본다는 점이 각별하다. 유심의 심은 관측자가 자신을 복제한 것이다. 유심론의 장점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유심의 심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딱 봐도 유물론이 틀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반대로 1초 만에 유심론이 틀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둘 다 틀린 것이다. 존재는 의사결정의 단위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의 주체인 심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심론은 얼버무린다. 그런데 그 심의 정체가 뭐냐고? 있다는 것은 주체가 있는 것이다. 유물론으로 보면 주체는 작은 것이고 계속 쪼개야 하는데 양자역학까지 쪼개다가 막혀 있다. 유심론의 장점은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큰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얼버무리고 있다. 가족의 중심은 가장인가? 국가의 중심은 대통령인가? 구조론은 존재가 어떤 둘의 사이에 있다고 본다. 존재는 유물론이 말하는 관측대상도 아니고 유심론이 말하는 관측주체도 아니고 둘의 사이에 상호작용으로 있다.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유심론으로 보면 가장이 곧 가족이다. 이러다가 짐이 곧 국가로 된다. 구조론으로 보면 가족관계가 가족이고 국가시스템이 국가다. 의사결정주체가 곧 존재다. 유물론은 쪼개다가 망하고 유심론은 주체를 선언할 뿐 제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어떤 둘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바둑은 바둑판에도 없고 바둑 기보에도 없다. 바둑은 두 사람 사이에 합의된 룰에 존재한다. 축구는 공격과 수비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존재한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다. 20세기에 와서 철학은 죽었다. 유심론도 죽고 유물론도 죽었다. 명목론도 죽고 실재론도 죽었다. 합리론도 죽고 경험론도 죽었다. 변증법적 유심론도 죽고 변증법적 유물론도 죽었다. 철학이 죽고 반철학이 득세하니 상대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반지성주의다. 그것은 지식에 대한 모독이다. 21세기에 죽었던 철학은 다시 살아난다. 정답은 구조다. 관계다. 사건이다. 동적균형이다. 에너지다. 존재는 둘의 관계다. 가리켜서 지목되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무엇이 나오는가? 순서가 나온다. 순서는 둘 사이에 있다. 존재는 사이다. 존재는 관계다. 의사결정단위가 존재다. |
저도 이번에 선생님의 "경험론자 듀이 비판" 시리즈에서 꽤 많은 자극을 받았는데,
특히 한국의 저널리즘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에 대한 한가지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언론도 1990년대 이후 이른바 "팩트"를 숭상한다는 "경혐주의자"들이 장악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널리즘=팩트파인딩"이라고 목표를 정하고, 꾸준하게 민주세력이 얼마나 부패하고 능력이 없는지, 북한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우리에게 해로운 지를 증명하려고 노력을 해왔죠. 그렇게 기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좋은 기회를 활용해 쌓아온 "경험주의의 탑"이 현재의 언론들이 보이고 있는 "극우주의적 행태"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말 그대로 기자는 남들보다 "체험"을 많이 할 수 있는 직업이죠. 그런데, "당신의 경험을 믿으라"라는 경험주의에 경도되는 순간, 철학도 버리고, 사상도 버리고, 합리적인 이성이 대화할 수 있는 공론장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기자들이 경험한 "팩트"라는 좁아터진 안경을 쓰는 순간 말이지요. 다시 생각해 보니, "듀이"가 참으로 나쁜 놈이긴 한 것 같습니다.
중요한 지적이네요.
검사들도 정치인의 부패를 많이 봐 와서
자기들이 지구를 구한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철학이 죽고 반철학이 득세하니 상대주의,경험주의, 실용주의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반지성주의다."
문제는 상대/경험/실용주의 등이 스스로를 자연/신(종교)/타 문명(문화) 등에 대하여 지성주의보다 더 겸손(?)한 자세라고 포장(주장)을 하고 있고, 그것이 대중에게 먹히는 것 같습니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비겁한 태도라고 폭로해야 합니다.
그게 대중을 어린아이로 보고 어린이를 어르듯이 얼룰루 까꿍 하는 추태지요.
진리는 겸손이 없습니다.
태양이 늦잠 자는 어린이를 위해 겸손하게 구름 속에 숨어서 떠오르고 그러지는 않지요.
'사이'에 있는 존재
'사이'에 있는 세상
'사이'에 있는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