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치는 다 나쁜 놈이다.
2) 그런데 내가 만나본 나치장교 아무개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3) 알고보니 나치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더라.
이것이 변절의 공식이다. 알아야 한다. 낮에는 독가스실을 운영하고 밤에는 가족들과 함께 생일케이크를 자르는 선량한 나치장교들의 이중성을.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독가스실을 운영한 나치의 야만성이 아니라, 그러면서도 가족과 함께 단란한 하루를 보내며 선량한 가장으로 돌아가는 나치의 이중성이다.
왜 친일파들은 변절했는가? 변절의 공식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에 기초한 문제들을, 개인의 선악의 문제로 환원시키기 시작하는 것이 변절의 공식이다.
알아야 한다. 친일파 이완용도, 변절의 춘원 이광수도, 조선일보의 방상훈도 알고보면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그들은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가 아니었다.
처음엔 춘원 이광수도 일제의 만행에 대해 분노했다. 상해 임정에 참여하며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지식인 이광수가 일본인들과 접촉을 늘려가면서 상황은 변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일본의 지식인들이었고 엘리트들이었다. 고리타분한 조선의 양반 찌꺼기들보다는 차라리 대화가 되는 선량한 친구들이었다.
“어? 알고보니 일본사람도 나쁘지 않네. 일본인이라고 해서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는 아니네? 외려 내가 만난 그 어떤 조선인보다도 매너있고 정중하고 지적인 사람들이네?”
그 순간 “왜놈은 전부 악귀다” 하는 허구의 공식이 무너져 내리고, 드디어 변절의 코스로 진입하는 것이다.
손호철, 임지현, 문부식, 진중권들.. 낮에는 안티조선하고 밤에는 조선일보와 술을 마시는 자들의 이중적 행태와 춘원 이광수들 변절의 공식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춘원 이광수나 미당 서정주의 눈에는 고상하게 철학을 논하는 일본인 친구들이 선량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고 왜의 시체를 토막내고, 왜의 시뻘건 피를 들이마신 백범 김구가 오히려 악귀처럼 보였을 것이다.
알아야 한다. 일제는 나쁘지만 일인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나치는 나쁘지만 나치 장교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가 일제의 심장에 방아쇠를 겨누는 것은 그들 선량한 일인 개개인에게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곧 죽어도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개개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들이 뿔달린 도깨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조선일보에 머리에 뿔이 달렸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악귀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들은 한겨레를 비판하고 오마이뉴스를 비판한다. 그렇다. 백범이 왜의 시체를 토막내고 왜의 심장을 도려내고 왜의 피를 들이마셨다.
왜의 지식인들과 고상한 철학을 논하면서 그들에게는 백범이 악귀처럼 보이고 한겨레가 야차처럼 보이고 오마이뉴스가 뿔달린 도깨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학식을 갖추고 매너도 좋은 나치 장교들이 차라리 예술과 인생을 논할만하고 무식한 시골농부들로 구성된 레지스탕스들이 외려 산도적처럼 보였을 것이다.
2) 그런데 내가 만나본 나치장교 아무개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3) 알고보니 나치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더라.
이것이 변절의 공식이다. 알아야 한다. 낮에는 독가스실을 운영하고 밤에는 가족들과 함께 생일케이크를 자르는 선량한 나치장교들의 이중성을.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독가스실을 운영한 나치의 야만성이 아니라, 그러면서도 가족과 함께 단란한 하루를 보내며 선량한 가장으로 돌아가는 나치의 이중성이다.
왜 친일파들은 변절했는가? 변절의 공식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에 기초한 문제들을, 개인의 선악의 문제로 환원시키기 시작하는 것이 변절의 공식이다.
알아야 한다. 친일파 이완용도, 변절의 춘원 이광수도, 조선일보의 방상훈도 알고보면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그들은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가 아니었다.
처음엔 춘원 이광수도 일제의 만행에 대해 분노했다. 상해 임정에 참여하며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지식인 이광수가 일본인들과 접촉을 늘려가면서 상황은 변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일본의 지식인들이었고 엘리트들이었다. 고리타분한 조선의 양반 찌꺼기들보다는 차라리 대화가 되는 선량한 친구들이었다.
“어? 알고보니 일본사람도 나쁘지 않네. 일본인이라고 해서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는 아니네? 외려 내가 만난 그 어떤 조선인보다도 매너있고 정중하고 지적인 사람들이네?”
그 순간 “왜놈은 전부 악귀다” 하는 허구의 공식이 무너져 내리고, 드디어 변절의 코스로 진입하는 것이다.
손호철, 임지현, 문부식, 진중권들.. 낮에는 안티조선하고 밤에는 조선일보와 술을 마시는 자들의 이중적 행태와 춘원 이광수들 변절의 공식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춘원 이광수나 미당 서정주의 눈에는 고상하게 철학을 논하는 일본인 친구들이 선량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고 왜의 시체를 토막내고, 왜의 시뻘건 피를 들이마신 백범 김구가 오히려 악귀처럼 보였을 것이다.
알아야 한다. 일제는 나쁘지만 일인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나치는 나쁘지만 나치 장교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가 일제의 심장에 방아쇠를 겨누는 것은 그들 선량한 일인 개개인에게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곧 죽어도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개개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들이 뿔달린 도깨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조선일보에 머리에 뿔이 달렸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악귀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들은 한겨레를 비판하고 오마이뉴스를 비판한다. 그렇다. 백범이 왜의 시체를 토막내고 왜의 심장을 도려내고 왜의 피를 들이마셨다.
왜의 지식인들과 고상한 철학을 논하면서 그들에게는 백범이 악귀처럼 보이고 한겨레가 야차처럼 보이고 오마이뉴스가 뿔달린 도깨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학식을 갖추고 매너도 좋은 나치 장교들이 차라리 예술과 인생을 논할만하고 무식한 시골농부들로 구성된 레지스탕스들이 외려 산도적처럼 보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