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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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809 vote 0 2018.02.27 (22:41:26)


    다들 비겁한 거다. 진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 문명사 1만 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없었다. 70억이나 있다는 인간군상 중에 한 명도 없다.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내게는 오래 묵은 울화가 있다. 대화가 되어야 말이라도 해보지 참! 치명적인 것은 말을 꺼낼 기회 자체가 원천봉쇄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혼자 생각해왔다. 안타깝다.


    2001년에 나온 영화 '슈렉'이다. 늪에 사는 녹색괴물 슈렉이 용의 성에 갇힌 피오나 공주를 구한다. 1편 마지막 장면에서 피오나 공주는 예언대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되는데, 그의 진정한 사랑이 슈렉인지라 녹색괴물 오우거의 모습으로 고정된다. 그 장면에서 다섯 살 꼬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드림웍스가 디즈니를 비튼다는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디즈니 영화라면 당연히 피오나 공주는 녹색괴물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면사포를 쓴 백설공주의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끝이 났을 것이다. 어쨌든 타락한 어른들이 순수한 아이를 울렸다. 그 장면에서 왜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을까? 어른들이 잘못했다. 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공주가 뭐길래? 다섯 살 꼬마가 공주를 알아? 공주가 되어서 뭐하게?


    어린 시절 본 만화의 설정은 비슷하다. 주인공 꼬마는 거지 차림이지만 사실은 고귀한 신분이었던 거다. 어떤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비밀을 찾아가는 단서를 알려준다. 한류드라마라면 출생의 비밀 어쩌구 한다. 사실은 재벌의 숨겨진 자식이었다나 어쨌다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순수한 모습이라는 거다. 인간들 원래 그런거 좋아한다. 인정하자.


    다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한다. 이걸 노골적으로 말하면 차별주의가 된다. 다들 귀족이고 양반이고 왕자에 공주라면 평민은 누구이고 하녀는 누구인가? 좋지 않다. 그러나 이게 유전자에 새겨진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면 진지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당신은 고귀한 존재인가? 천한 상것인가?


    우리는 배워서 안다. 그게 낡은 신분제도의 잔재라는 사실을. 귀족도 없고 평민도 없는 시대에 왕자를 어디서 찾고 공주는 또 어디서 찾는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이건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되겠고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은 다르다. 인간을 움직이는 에너지의 9할은 여기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흔히 열등의식이라고 한다. 콤플렉스다.


    우월이나 열등이나 같은 말이다. 우월의식이 열등의식이다. 비교하는건 같다. 남보다 위라면 아래일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스스로 위라고 믿고 그걸 확인하려는게 우월의식인데 왜 굳이 서열을 확인하려고 하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왜 불안하지? 그게 열등의식이다. 오만한 자는 불안한 자다. 그것은 원초적 분리불안이다. 집단에서 밀려나는 불안감.


    아기는 항상 중앙에 있다. 가족들의 눈동자가 아기에게로 모인다. 모두의 시선 안에서 아기는 편안하다. 그 지켜보는 시선을 잃으면 불안하다. 까꿍 하고 다시 나타나면 숨바꼭질 놀이다. 이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이다. 왜 아기들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할까?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의사결정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왜 내가 그것을 해야 하지 하고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어른이 되기도 싫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싫고, 돈을 벌기도 싫고, 잘 살기도 싫고, 성공하기도 싫고 다 싫은데 어떻게 하지? 훌륭한 사람이 되면 남들이 나를 쳐다볼 것이다. 그 시선이 불편하다.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겠다. 혼자 있어야 편하다. 이런 생각들은 하지 않는 것일까?


    바둑을 둔다면 첫 번째 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두 번째부터는 편하다. 상대방이 두는 돌 근처에 두면 된다. 상대방을 따라가며 두어도 되고 반대쪽에 대칭시켜도 된다. 상대와 나의 관계에 의해 상대적으로 위치가 정해진다. 첫 번째 수는? 관계가 없다. 상대성이 없다. 그래서 족보다. 두 번째 수부터 상대논리로 두지만 첫 번째 수는 절대논리로 둔다.


    족보라는 말은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의 위치는 정해져 있다. 자식이 엄마에게 오늘부터 내가 엄마할께 엄마 니는 내 자식이나 해라. 이럴 수는 없다. 친구끼리는 내가 대장할께 네가 졸병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상대성이다. 부모와 자식의 서열은 절대성이다. 비가역적이다. 우리가 찾는건 사람의 족보가 아닌 진리의 족보다. 


    일단 족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은 특별해야 한다. 다섯 살 꼬마가 왕자를 알면 얼마나 알고 공주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아기가 봉건왕조 시대의 신분제도를 연구했을 리가 없다. 그냥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거다. 그래야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것은 연결이다. 모든 연결에는 서열이 있다. 진행하는 방향성이 있다.


    다만, 자신의 행동이 그냥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서열처럼 사전에 정해진 족보를 따라 질서를 따라 수순을 따라 그 이전에서 지금을 거쳐 그 이후로, 그 위에서 지금을 거쳐 그 아래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 연결구조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낄 자리가 있다. 그래야 내가 세상에 할 말이 있다. 의사결정구조는 에너지의 연결구조인 거다.


    어른들은 이미 게임이 시작되어 게임 속에 존재하므로 상대방이 둔 위치를 보고 자신이 둘 위치를 정하지만 아이는 순수하다. 게임에 끼어들 자격을 묻게 된다. 니가 뭔데? 너 꺼져! 너 여기 왜 왔어? 얼쩡대지 말고 저리 가! 곤란하다. 첫 한 수는 게임에 뛰어들 자격을 정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자격이 있어야 한다. 나는 특별한 존재여야만 하는 거다.


    아이는 언제라도 바둑의 첫 한 점을 두는 마음자세다. 아직 세상이라는 게임판에 선수로 뛰어들지 않았다. 내게 자격이 있을까? 나는 선수가 맞나? 링 위로 올라가도 되나? 남의 시합에 잘못 끼어들어 망신당하고 쫓겨나면 어쩌지? 그러므로 아이는 공주여야 하고 왕자여야 한다. 반드시 거기라야 한다. 운명의 바둑돌을 아무데나 두어도 된다면 곤란하다. 


    반드시 거기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절대 포지션이 있어야 한다. 왜? 그것이 아이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룰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첫 수를 손따라 두면 평생 손따라 둘 것이다. 첫 수를 아무데나 두면 평생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렇다. 아이였을 때 당신은 당연히 왕자였고 또 공주였다. 


    당신은 그냥 얼떨결에 태어난게 아니라 온 우주를 대표하여 특별히 태어난 것이다. 의사결정을 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사건의 중앙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이 대표성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첫 번째 발걸음은 온 우주를 대표하여 결정된다. 달에 도착한 암스트롱이 첫 왼발을 내딛듯이. 인류를 대표하여 내딛는 한 걸음이 된다. 


    두 번째부터는 상관없다. 남들 하는거 보고 적당히 맞춰가면 된다. 분위기에 편승하면 된다. 사람들이 철학입네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다들 상대가 이쪽으로 붙으면 나는 저쪽으로 붙겠다는 상대성의 세계이니 첫 번째 수는 아니다. 많이 진행된 게임이다. 그런데 너는 초대받고 온 게임인가? 너의 무대인가? 자격은 있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의 의미는 당신이 어디에 두든 알파고는 바둑판 전체의 돌을 모두 연산하여 정한다는 것이다. 지금 바둑판 한 귀퉁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당신은 바둑판 전체를 대표하여 일 수를 가한다. 바둑판 안에서 외딴 구석은 없다. 동굴속에 숨어 박쥐똥을 먹더라도 천하와 연결되어 의사결정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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