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하는 교사가 가져야 할 태도가 뭘까 생각하니 존중과 사랑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대에서 사범대에서 교과지식과 교수법에 대한 얘기는 아무리 해도 완벽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했고, 높은 경쟁률을 뛰어 넘고 공교육의 교사로 임용되었으니 검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직관을 성직자, 전문직, 노동자 중 하나를 택일해서 정립하는 것이 현 시대에 맞고, 주로 전문직관을 내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 일반 전문가에게 사랑과 존중을 얘기하면 그건 참 군더더기처럼 보인다. 전문가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자기 분야의 일을 프로페셔녈하게 합리적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이에 비에 교직은 다르다. 한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다룬다는 말 조차 조심스럽다. 그러니 가르친다는 표현을 쓴다. 가르친다는 말도 이제는 어색하다. 그러니 "학생들과 함께 한다. 학생들이 배우도록 돕는다. 학생들과 함께 배운다." 라는 말을 쓴다. 거기다 학생들과 삶을 함께 하면서 교사로서 말과 행동을 보여준다. 교사로서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 보인다. 아이들이 교사에게 배우듯이, 교사도 아이들을 보고 배운다.
미성년의 아이들에게 학교는 사회 그 자체다.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나고, 어떤 경우 사회보다도 더 나쁜 면이 보이기도 한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학교폭력으로 인해 학생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존중이다. 학생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시작이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에 가깝다. 최근들어 학생들이 집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본다. 부모와 존중의 대화를 하지 못한다. 그러니 학교에서 학생들의 대화 속에 존중이 있을리 만무하다. 오직 교사만이 학생을 존중하여 학생 자신이 자신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할 수 있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존중하는 사람의 타인에 대한 관심은 사랑으로 나타나고,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의 타인에 대한 관심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자, 소외 회피의 다른 이름이다.
이 때문에 나는 교직은 전문직이 분명하나 자신을 존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학생을 존중하지 못하고 무섭게 대하는 것이 교권을 보호하고 학생을 바른 길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교사는 자신이 교직에 적합한 사람인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존중받는 사람이 존중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조직이나 5%는 쉽지 않다. 존중을 받아도 존중인지 모를 수 있다. 존중을 누리기는 하나 타인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규칙이 필요하고, 규칙 이전에 존중의 상호작용이 충분히 이뤄졌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존중이 존재로서 나타나면 인간존엄이고 관계로서 나타나면 인간존중이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고 존엄한 인간의 관계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존엄한 인간은 타인을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괴롭게 하는데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존엄한 자만이 자유를 누리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성취하여 공동체의 행복에 이를 수 있다. 다들 행복 행복하지만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을 잉태하고 있고, 행복하길 원하면서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나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은 물론 타인을 괴롭게 한다. 수많은 인성교육과 도덕교육, 민주시민교육이 있지만, 본질은 인간존엄의 교육, 인간존중의 교육에 다 들어 있다. 아무리 현란한 대화법과 오은영 솔루션으로도 안되는 이유는 존엄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금 자기 자신부터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교육은 시작된다.
*동렬님의 마음의 구조를 교육에 적용하여 표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