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죽음...>
오늘, 이 말이 참 좋다.
이거...책 제목으로도 좋겠는 걸~~..킾!! 까묵지 말아야지...ㅋ~
누구나라 하면 좀 아닌 걸까...
인간은 이라 하면, 사람보다는 어감이 객관적 느낌을 주니 좋다.
사회학적 존재의 죽음... 이란, 명제를 떠올리고 보니...이런저런 생각들이 피어 난다.
인간은 사회학적 죽음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그 사회학적 죽음에 매몰되어 버릴까...
돌이켜보면 사회학적 죽음을 너무나 많이 보아버린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소리에 질식할거 같았던 순간이 한두번이었을까...지금도 사회학적 죽음은 곳곳에서 횡횡하고 있다. 무덤에서 매일 밥먹고 산다. 이러니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온다. 마음이나 몸은 이리 나의 감정과 상상력에 대해 그대로 반응한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반응하고 있다.
사회학적 죽음을 인식 했을때, 나의 마음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도무지 그 마음으로는 사람으로는 살 수 없을거 같을 때, 그럴때 자기가 짐승처럼 느껴질때...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는거 같다. 생물학적 죽음을 직접 시행하게 되는거..., 그러나 인간은 그 고독한 허무에서 생물학적 죽음을 시행하지 않게 될때, 이미 끝을 본 것이라고 여긴다...연명, 남은 생이 그저 연명이라면, 인간은 그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다시 부활하거나 철저하게 외면하거나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방법이 없을때...인간은 또 어찌될 것인가... 철저하게 외면하고 사는 그 방식도 역시 세상에 대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회적 복수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하게 되었을때...인간은 어떠할까...? 그렇다고해서 한번 겪은 허무가 사라질까.... 아니다. 상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덮어줄 뿐이다. 계속해서 상흔을 통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허무를 고운 가루로 뿌려줄 뿐이다. 그 고운 가루는 아마도 사랑인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에서 사랑은 다양하다.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존엄은 여러가지가 될 수 없고 딱 하나이고. 자유는 크기가 있을 뿐이고 사랑은 확장되고... 그렇다면,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사랑인 것이다. 하나뿐인 것은 자기안에 챙겨야 하고, 커져가는 것은 자기만이 조절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에서부터는 대상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무엇인가 자꾸 어긋나거나 일치를 보기가 어렵다.
인간이 욕망하는 사랑의 종류들... 그렇다면, 사랑이 자신의 삶과 일직선이 된다면 어떨까...인간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그 삶에 대해 완성이 어렵게 될때, 인간은 사회학적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존재가 죽어가는 모습을 매순간 보면서도 인간은 쉽사리 도와줄수가 없다. 불일치성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맞지 않는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다름을 극복하기 위해 소통이 있다. 원하고 바라는 것의 욕망의 층위를 높이는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는 해결 된다.
그러나, 제도적 문제가 인간의 사회학적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일종의 이건 방치와도 같다. 풀수 있는 것은 풀어야 한다. 그러나 관습이라는 명분하에 너무나 많은 사회학적 죽음을 몰고 온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모른다. 그건 그만큼 사회학적 죽음에 대해 이 사회가 관대하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사회안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허무가 절절하게 넘쳐 흐른다. 그러나...일상이라는 또는 일상이라는 조금씩의 다름으로 그것을 묻는다. 사회학적 죽음을 체험한 이들의 일상..., 그것은 눈물나는 인간의 투쟁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생을 완주 하려는 의지.
오늘, 이 말이 참 좋다.
이거...책 제목으로도 좋겠는 걸~~..킾!! 까묵지 말아야지...ㅋ~
누구나라 하면 좀 아닌 걸까...
인간은 이라 하면, 사람보다는 어감이 객관적 느낌을 주니 좋다.
사회학적 존재의 죽음... 이란, 명제를 떠올리고 보니...이런저런 생각들이 피어 난다.
인간은 사회학적 죽음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그 사회학적 죽음에 매몰되어 버릴까...
돌이켜보면 사회학적 죽음을 너무나 많이 보아버린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소리에 질식할거 같았던 순간이 한두번이었을까...지금도 사회학적 죽음은 곳곳에서 횡횡하고 있다. 무덤에서 매일 밥먹고 산다. 이러니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온다. 마음이나 몸은 이리 나의 감정과 상상력에 대해 그대로 반응한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반응하고 있다.
사회학적 죽음을 인식 했을때, 나의 마음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도무지 그 마음으로는 사람으로는 살 수 없을거 같을 때, 그럴때 자기가 짐승처럼 느껴질때...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는거 같다. 생물학적 죽음을 직접 시행하게 되는거..., 그러나 인간은 그 고독한 허무에서 생물학적 죽음을 시행하지 않게 될때, 이미 끝을 본 것이라고 여긴다...연명, 남은 생이 그저 연명이라면, 인간은 그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다시 부활하거나 철저하게 외면하거나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방법이 없을때...인간은 또 어찌될 것인가... 철저하게 외면하고 사는 그 방식도 역시 세상에 대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회적 복수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하게 되었을때...인간은 어떠할까...? 그렇다고해서 한번 겪은 허무가 사라질까.... 아니다. 상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덮어줄 뿐이다. 계속해서 상흔을 통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허무를 고운 가루로 뿌려줄 뿐이다. 그 고운 가루는 아마도 사랑인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에서 사랑은 다양하다.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존엄은 여러가지가 될 수 없고 딱 하나이고. 자유는 크기가 있을 뿐이고 사랑은 확장되고... 그렇다면,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사랑인 것이다. 하나뿐인 것은 자기안에 챙겨야 하고, 커져가는 것은 자기만이 조절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에서부터는 대상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무엇인가 자꾸 어긋나거나 일치를 보기가 어렵다.
인간이 욕망하는 사랑의 종류들... 그렇다면, 사랑이 자신의 삶과 일직선이 된다면 어떨까...인간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그 삶에 대해 완성이 어렵게 될때, 인간은 사회학적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존재가 죽어가는 모습을 매순간 보면서도 인간은 쉽사리 도와줄수가 없다. 불일치성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맞지 않는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다름을 극복하기 위해 소통이 있다. 원하고 바라는 것의 욕망의 층위를 높이는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는 해결 된다.
그러나, 제도적 문제가 인간의 사회학적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일종의 이건 방치와도 같다. 풀수 있는 것은 풀어야 한다. 그러나 관습이라는 명분하에 너무나 많은 사회학적 죽음을 몰고 온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모른다. 그건 그만큼 사회학적 죽음에 대해 이 사회가 관대하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사회안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허무가 절절하게 넘쳐 흐른다. 그러나...일상이라는 또는 일상이라는 조금씩의 다름으로 그것을 묻는다. 사회학적 죽음을 체험한 이들의 일상..., 그것은 눈물나는 인간의 투쟁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생을 완주 하려는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