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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는 없다."
그러면 어두운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파악한 세계의 본질은 무엇일까? "만물은 흐른다."라는 것이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한다. 강물도 흘러가지만 나도 또한 변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고 있다. 게다가 그는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말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대립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의미를 갖는다. 피곤이 휴식을 즐겁게 하고 배고픔이 없으면 배부름도 없듯, 모든 것은 대립되는 다른 쪽과의 '투쟁'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세상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 움직이지 않는 불이란 생각할 수도 없듯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져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링크 본문 중)
파르메니데스 "존재하는 것은 일자(一者) 뿐이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당연하다. 뭐 이런 말을 하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말은 충격적이다. "없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사실 우리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없다."의 형태로 어림짐작 할 뿐, '없음 자체'를 머리에 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없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는 있는 것 하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여러 개 있으려면 있는 것 사이에 허공(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 데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에는 하나의 있는 것, 즉 '일자(一者) 존재' 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운동과 변화도 있을 수 없다. 허공(없는 것)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법, 하지만 앞서 논변이 증명하듯 허공은 없다. 그렇다면 운동도 없다.(링크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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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 알려져있다. 변화를 부정하는 파르메니데스의 학설은 논박의 여지가 많았으며, 처음부터 무수한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제논은 스승의 학설을 비판적 논박에서 지켜내는 것을 자신의 주요과제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논의 역설(아킬레스와 거북이, 날아가는 화살)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변화(운동)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상은 하나이면서 다수일 수 있는가? 둘 중에 하나만 찍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보자. 우리는 일원론자가 아닌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합해야 진리가 나올 것 같다. 어떻게? 계를 설정하면 된다. 사실 둘 다 말솜씨가 없었다. 세상은 불변과 변화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단위가 필요하다. 제논의 역설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관측자, 즉 관측단위이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이나, 화살이 날아간다고 여기는(!) 이유는 당신이 이미 그것을 관측계에 묶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우주 공간에서 아킬레스와 거북이, 그리고 화살을 보지 않았다. 당신은 지구상에서 제3의 대상과 비교하며 저것들에 대한 판단을 했다. 사실 제논은 사기를 쳤다. 그가 말한 역설의 핵심은 청자의 관심을 계 내부로만 한정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대상을 관찰하고 판단할 때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제3의 대상과 비교하여 그것을 판단한다.
가령 어떤 여자를 보고 그녀가 예쁘다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여자와 비교한 것이다. 어떤 판단(형용사)은 반드시 상대적 개념이다. 무인도에 그녀와 당신만 있다고 치자. 그녀가 예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없다. 제논이 당신에게 사기를 치는 방법이다. 무인도에 당신을 가두고 그녀를 판단하라고 시킨 것이다(당신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무인도에 갖힌 당신에게 세상은 (초딩의) 일원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인도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이 다양하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중딩의 다원론). 그런데 왜 세상은 다양한가?
당신이 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계는 계 외부와 내부의 정의에 의하여 정의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계는 내부 방향이다. 당신이 계 내부에서 미녀와 추녀를 구분했다면 당신은 그 이전에 미라는 기준으로 여성을 바라본 것이다. 여기서 방향성이 생긴다. 미에서 여성으로 미녀에서 추녀이다. 미녀와 추녀는 여성으로 미로 일원화되고 동시에 다원화된다.
하지만 착각이다. 왜냐하면 자연에는 미녀도 추녀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사회의 잣대로 바라본 것이다. 당신이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이 들통나는 순간이다. 니 눈에 뭐가 보였다면 당신은 당신의 기준이 아니라 사회의 기준으로 그것을 본 것이다. 구조론이 말하는 관측자를 개입시키지 말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당신을 무조건 배제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라는 관측 기준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관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자연의 기준도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관측 기준 자체를 자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결론을 말하자. 일원론과 다원론은 공존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준자라는 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관측대상과 관측기준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대딩의 일원론) 즉 관측기준에 따라 다르다. 기준으로 일원이 되고 대상으로 다원이 된다. 가령 머신비전(인공지능)이라면 이런 것이다.
주) 피쳐(특징, 요소), 레이블(라벨, 이름, 분류기준), 머신비전(이미지를 보고 이름 알아맞추기)
머신비전 기술의 핵심은 특징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징의 단위가 어떻게 정해지는 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분해야할 이름을 어떻게 사전 정의하는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즉 이름분류 > 특징분류가 된다. 일반인이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과 전문 브리더가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일반인은 귀여운지, 키울만한지를 기준으로, 브리더는 유전적 형질이 어떻게 나타날 지를 기준으로 고양이를 바라본다. 즉 기준이 다르다.
1. 일반적으로 머신비전을 트레이닝 시킬 때는 1) 사전에 이름의 개수와 종류를 세팅하고, 2) 그것에 해당하는 백만장(말이 그렇다는거)의 사진에 라벨(태그)을 붙여놓고, 3) 알고리즘으로 라벨을 분류할 수 있는 특징을 찾는다. 즉 머신러닝 알고리즘의 주된 목적은 특징(피쳐) 찾기이다.
2. 트레이닝이 끝나고 테스트할 때는 알고리즘에 이름(라벨)이 없는 사진만 보여주고 사진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피쳐의 조합을 찾아내어 이름(라벨)을 맞춘다. 이는 이미지 인식의 개략적인 과정이며, 텍스트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알파고인데? 알파고는 이름 맞추기가 아니잖아? 알파고가 사용하는 강화학습이라는 것도 같은 것이다. 기보가 만들어내는 형을 특징으로 두고, 그것의 결과가 승패(라벨)가 된다. 다만 강화학습은 게임의 형식을 따르므로 특징을 규정하기가 좀 더 까다롭다. 상대방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철학적 개념이 머신러닝 엔지니어들에게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숱한 삽질을 한다. 라벨을 함부로 바꾸는 미친짓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라벨과 특징, 데이터는 한 몸이다. 라벨분포가 바뀌면 특징도 바뀐다. 하지만 모른다. 특징(속성)이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물론 알고리즘은 그렇지 않다. 다만 엔지니어도 그 알고리즘을 만든 놈도 잘 모를뿐) 그래서 자율주행이 잘 안 된다. 특히 잘 안되는 것은 관측자가 일반인인지 브리더인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계나 관점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들에게는 없다.
그나마 요즘엔 맥락(context, 상황인식)이라고 해서 상황에 따른 인식의 변화를 논하고는 있으나,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상황이 틀린 말은 아니나, 관점의 개념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해야 한다. 맥락과 사건을 절대적으로 놓고 속성을 상대적으로 놓아 알고리즘을 설계해야 하나, 맥락의 개념이 없으므로 속성을 더 많이 쪼개는 짓을 한다. 그래서 끝내 속성의 집합으로 대상을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다. 물리학과 비슷한 방향이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