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read 18576 vote 0 2008.09.19 (17:08:52)

“멍청아! 영화는 영화라니까!”
‘야생에서 온 불청객이 세상을 바꾼다’

평론가들이 늘 하는 소리가 있다. ‘작품성이 중요하지, 흥행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그러나 김기덕 감독만은 예외다. 그들은 180도로 태도를 바꾼다. ‘외국에서 상 받아와 봤자 무슨 소용이야. 국내에서 흥행이 안 되는데!’

김기덕 필름이 제작하고 장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추석영화 ‘영화는 영화다’의 흥행 소식이 반길만하다. 순제작비 6억 5천(재미없는 작가주의 영화로 알려질까봐 15억으로 부풀려 발표했다고)으로 이 정도면 지난해 ‘디워소동’ 이후 급몰락한 충무로가 앞으로 헤쳐가야 할 길이 충무로의 이단아 김기덕 감독에 의해 제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돌파구’라는 이름으로 15명의 제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고 ‘아름답다’의 전재홍, ‘영화는 영화다’의 장훈이 데뷔한 실정으로 보면 이제는 김기덕 사단이라 불러도 좋을듯하다. 더 이상 그는 충무로의 이단아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니다. 주류의 전복이다. 멋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여전히 헛다리 짚기에 분주하다. 그들은 여전히 김기덕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본질이라 할 김기덕 영화의 미학을 논하는 사람은 아직 없다. 그들 대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에 뭔가 있어. 뒤집어 봐야 해! 현실은 현실이야! 이것이 작가의 메시지라구!”

과연 그럴까? 김기덕과 장훈은 ‘현실은 현실이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제작한 것일까? 물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고 그것도 재미있는 하나의 관점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격에 미치지 못한다. 수준 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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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데르센의 우화 ‘벌거숭이 임금님’의 ‘순진한 꼬마’로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거짓과 위선에 빠져 있을 때 거짓이라곤 모르는 순진한 꼬마는 말한다. “임금님이 벌거숭이야!” 그게 영화다.

그렇다. 이 위선적인 사회에 순진한 꼬마가 필요하다. 원시의 소년이 필요하다. 야생에서 온 타잔이 필요하다. 문명사회 바깥에서 온 불청객이 필요하다. 꼬마는 말해야 한다. “임금님 꼬추 보인다! 쥐통님 꼬리 보인다!”

영화에서 꼬마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프리카에서 온 부시맨이 되기도 하고, 말아톤의 초원이가 되기도 하고, 맨발의 기봉이가 되기도 하고, 포레스트 검프가 되기도 하고, 슈퍼맨이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하고, 은행털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깡패가 되기도 한다.

공통점은 뭔가 약간 모자란다는 점, 이방의 고립된 환경에서 홀로 지내다가 불청객 되어 갑자기 문명한 도시로 난입한다는 점, 괴력의 소유자라는 점! 고집불통이라는 점! 그리고 사소한 일에 목숨 건다는 점.

깡패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많다. 그런데 왜 하필 깡패일까? 깡패는 멍청함과 힘 그리고 순진함을 동시에 갖추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임금님의 꼬추를 도발하는 대책 없는 꼬마의 자격이 있다.

영화도 영화 나름이지만 ‘깡패를 미화한다’거나 혹은 ‘또 깡패 이야기냐!’는 식의 반응이라면 영화의 본질을 이해 못하는 태도라 하겠다. 깡패로 표현해 놓았지만 깡패의 이름과 이미지를 빌렸을 뿐 본질은 벌거숭이 임금님의 꼬마다. 그 꼬마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멍청아! 영화는 영화라니까!”

이건 단지 영화일 뿐이다. 철부지 스타가 깡패를 만나 철 드는 이야기다. 벌거숭이 임금님 강지환은 당돌한 꼬마 소지섭을 만나고서야 자신이 벌거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뭐 그런 이야기다.

결말에 이르러 강지환은 덕분에 훌륭한 배우로 거듭나게 되고 소지섭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여 ‘형님 좋고 아우 좋고’ 식의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는 관객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고, 소지섭은 다시 어둠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천만에! 그건 아니올시다.

표면의 사실을 보지 말고 이면의 진실을 보라! 영화는 영화다. 미학은 미학이다. 곧 죽어도 아름다운 건 양보 못한다.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주인공들은 지독한 탐미주의자들이다.  

제멋대로 살아온 깡패는 진짜 배우를 만나 녹록지 않은 인생을 배우고 철부지 배우는 한 ‘고수’ 하는 깡패에게 초식을 전수받아 진정한 연기가 뭔지 깨닫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벌거숭이 임금님의 추악한 이면은 당돌한 꼬마에 의해 폭로된다. 야생환경에서 난입한 도시의 불청객은 그 담백함으로 문명사회를 난도질해 버린다. 그럴 때 진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김수현류 주말연속극이라면? 배배 꼰다. 단순화하지 않고 복잡하게 꼰다. 꼰데 또 꼰다. 인물들의 관계는 얽히고설킨다. ‘알고 보니 이복형제였네’ 하는 식. 무슨 운명적인 사연이 그리도 많은지 참! 김기덕은 그것을 단칼에 잘라버린다. 어떻게? 리얼 액션의 제안이다. 너 죽고 나 죽기다.

강패는 처음 보는 여자에게 기습 키스를 한다. 남녀가 만나 키스에 이르기까지 정해져 있는 온갖 절차는 생략된다. 그렇게 단순화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가능하다. 부시맨이라면 가능하다. 타잔이라면 가능하다. 포레스트 검프라면 가능하다. 꼬마가 임금님을 향해 ‘임금님 꼬추 봤다!’ 해도 된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다. 부디 이르노니 현실과 혼동하지 말라!

강패의 기습 키스는 김동인의 탐미주의 소설 ‘광염소나타’에서 미친 음악가가 집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다. 그 순간이 지극히 아름답기 때문에 탐미주의자는 그 순간을 절대로 놓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렇게 살다간 귀싸대기 왕복으로 맞고 쇠고랑 차는 수 있겠지만. 그래서 친구야! 영화는 영화라니까!

미학적 관점이 중요하다. 어떤 하나의 소재가 어떻게 복선이 되어 다양한 링크를 가지는지, 또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다각적인 외부와의 접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전체가 어떻게 하나의 타이틀에 의해 대표되는지. 부분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게 설계된 타이트한 구조를 어떻게 이루었는지! 이러한 미학적 관점에서의 창의와 신선함이 깃들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왜 결투는 갯벌인가? 갯벌은 컬러를 흑백으로 바꾼다. 단순화된다.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억센 소나기와 같다. 이중섭의 모든 그림에서 아이의 몸은 굵은 선으로 변한다. 고흐의 강렬하고 굵은 선과 같고 박수근의 안개처럼 뿌연 캔버스와도 같다. 그림에 톤을 주는 것이다. 깊이감을 준다. 그 방법으로 대칭성을 드러내고 긴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기덕의 모든 영화는 소재만 다를 뿐 같은 이야기다. ‘나쁜 남자’의 남자와 여자가 이번에는 남자 대 남자로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흥행하고 어떤 영화는 비난받는다. 그렇다면 누가 문제일까?

아웃사이더가 주류를 친다. 밑바닥 시스템을 바꾸려고 시도한다. 반드시 저항이 일어난다. 그 저항 때문에 영화는 정치성을 띤다. 그 정치 때문에 영화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모두가 정치하고 있다. 왜? 제 밥그릇 지키려고.

그런데 이번에는 비난받지 않을듯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두 배우의 연기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김기덕의 눈높이를 이해하지 못해도 강지환과 소지섭의 캐릭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둘이 그동안 브라운관에서 닦아 놓은 기반이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친구’가 크게 흥행한 이유는 범일동 산복도로 골목길 같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공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도 다 마찬가지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아온 공간에다 아는 얼굴이 나오면 확실히 이해를 돕는다. 앞에서 말한 ‘단순화시키기’의 효과가 있다.

필자가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평소에 필자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 그의 영화에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무수히 보고 온 것이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이다. 역시 단순화다. 내겐 김기덕의 세계가 단순화되어 있고 그들에게는 단순화되어 있지 않다. 그 차이다.  

결국 한국에서 김기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인들이 유럽인에 비해 생각이라는 것을 덜 하고 산다는 반증일 뿐이다. 생각 좀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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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이 주인공은 문명사회의 불청객이다. 김기덕이라는 불청객도 마찬가지. 주인공들이 가진 것은 순수뿐. 순수는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시킨다. 얽히고설킨 것을 잘라서 단면을 보여준다. 단순화하면 보인다. 무엇이? 사랑이!

그 단순화 과정을 사람들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통은 실패! 그러나 소통의 장벽은 이렇듯 하나씩 제거된다. 결국 모두 통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15명의 제자와 수십만의 지지자가 있으니까.

김기덕 영화의 본질은 그의 미학에 있다. 미학은 사회적인 소통을 위한 가치판단의 기준 제시다. 가치란 짝짓기다. 멋스럽게는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는 늘 짝 짓고자 한다. 그러나 소통이 막혀서 짝짓기는 실패다.

그럴 때 방법은? 얽히고설킨 것을 토막 쳐서 단면을 드러내기다. 이를 위해서는 야생에서 난입해 온 불청객이 필요하다. 괴력과 순수함 그리고 고집과 무모함을 동시에 갖춘! 그래서 강패는 지독한 탐미주의자다.

탐미주의자는 곧 죽어도 드라마의 완성을 원한다. 그는 아름답게 그 중단된 영화를 완성시켰고 또 아름답게 그 중단된 복수를 완성시켰다. 그리하여 불청객다운 자신의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현실은 현실이다’고 외치며 어둠의 세계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영화는 영화다’를 외치며 꿈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디 이르노니 그 꿈에서 깨어나지 말라!

또 다른 짝짓기의 방법은? 미학적 기교에 의한 단순화다.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가 단순화시키고, 갯벌의 두터운 질감이 단순화시킨다. 그물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기둥줄은 하나다. 그 기둥줄이 벼리다. 벼리를 당기면 전부 끌려온다.   

대칭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가능하고, 긴장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가능하고, 익숙한 공간의 제시로 가능하고, 벼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가능하고, 톤을 주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거기에 숨은 과학이 있다.

영화의 핵심은 미학, 미학은 소통을 위한 기준 제시, 기준 제시의 방법은 단순화, 단순화의 방법은 불청객에 의한 토막 쳐서 단면 드러내기. 역시 어려운가? 무수한 소설가와 시인과 예술가들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이 짓을 해왔는데도?

www.drkim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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