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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4594 vote 0 2002.12.19 (08:27:34)

- 몽새는 날아가고 -

[아아 노무현, 그리고 시지프스]
지난번 국민경선 때, 인터넷 사이트 어디에선가 89년 '삼당합당' 당시 통일민주당의 마지막 의원총회에서 불끈 주먹을 쥔 손을 높이 쳐들며 "이의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노무현 후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그 현장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죠. 그렇지만 그 사진을 보니까, 그날 그 자리는 아니지만, 그러나 바로 그날 제가 본 노무현 의원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그때 통일민주당 당사는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에 있었고, 제가 아직 전업작가로 나서기 전 근무하던 회사가 바로 그 옆에 있었습니다. '신용보증기금'이라고, 통일민주당이 세들어 있는 '제일빌딩'과는 불과 수십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던 거지요.

그때 저는 그 건물 12층에 근무했습니다. 이쪽 건물 복도 끝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면 통일민주당이 세들어 있는 제일빌딩 마당이 마치 내 집 마당처럼 바라보였습니다. 평소에도 우리는 제일빌딩으로 차를 마시러도 자주 가고, 삼계탕을 먹으러도 자주 가고, 또 지하 횟집에도 자주 갔습니다. 또 그 옆에 있는 보신탕 집에도 자주 다녔습니다. 그러느라 당시 민주당 의원들 얼굴을 많이 봤죠. 찻집에서도 보고, 보신탕 집에서도 보고 자동차들이 드나드는 제일빌딩 앞마당에서도 보고...

민정당과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합당을 하고, 그래서 그걸 추인하며 당을 해체하는 의원총회가 열렸던 것이겠지요. 그 자리에서 노무현 의원 혼자 "이의 있습니다!" 하고 불끈 주먹을 쥔 손을 쳐들고, 어느 기자인가 그 사진을 찍었던 것이겠지요. 그날 제가 본 것은 그 다음의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근무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자주 복도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잡담을 하곤 했습니다. 복도 저쪽 끝은 아현동이 보이는 쪽이었고, 우리 부서 사람들이 아지트를 삼는 곳은 통일민주당이 세들어 있는 제일빌딩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쪽이었습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일빌딩 건물에서 마당쪽으로 나와 어수선하게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게 통일민주당 사람들인지 몰랐습니다. 안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구요.

"오늘 민주당 곗날인 모양이지?"
누군가 그렇게 말한 다음에야, "맞아. 삼당합당한다더니. 그래서 모인 모양이네." 하는 말들이 오고갔습니다. 전에도 민주당 곗날이면(우리는 그 건물에 의원이 많이 모이는 날을 그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늘 빌딩 앞이 어수선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빌딩 앞에 시멘트로 가슴높이 만큼의 단을 만들어 회양목을 심어놓은 화단에 올라가 혼자 오른손을 번쩍번쩍 치켜들며 구호를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실내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모습이라 구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삼당합당 반대 구호를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어, 노무현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정말 노무현이었습니다. 노무현 혼자 화단에 올라서서 건물 쪽을 바라보며 왼손은 옆구리에 붙이고 오른손을 치켜들며 삼당합당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은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YS와 같은 부산 지역구 사람이 아니던가요. YS의 권유거나 차출로 국회에 들어온 초선 의원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우리가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5공비리 청문회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경선불복의 대명사처럼 불리우는 이인제 의원 역시 청문회 스타였고,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모르는 김동주 전의원 모두 청문회 때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래. 노무현이면 저럴 만하지. 노무현이면..."
복도에서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 화단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노무현 의원을 끌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화단은 땅에서부터 제법 높고, 또 좁아 바지를 잡고 끌어내리면 그대로 아래로 끌려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노무현 의원은 다시 화단 위로 올라가 구호를 외치고, 아래 사람들은 노의원을 끌어내리고......

한참을 바라보다 저는 바로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가 제일빌딩 앞으로 갔습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몇 명 서 있던 민주당 의원들은 거의 다 흩어지고 구경하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노무현 의원은 끈질기게 화단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국민의 뜻 왜곡하는 삼당합당 취소하라!"
"삼당합당 밀실합의 즉각 취소하라!"

그러면 또 사람들이(아마 사무처 사람들인 듯) 끌어내리고, 끌려내려오면 다시 올라가 구호를 외치고, 이제 구경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데 노무현 의원 혼자 그러고 있었습니다. 올라가면 끌어내리고, 끌어내리면 다시 올라가고. 또 끌어내리면 또 올라가고......

나중에 완력으로 끌려갈 때까지 아마 30분은 더 그랬을 겁니다. 마음 속으로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함께 화단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고 싶었지만 부끄럽게도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어떤 힘도 보태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광경을 보며 신화 속의 한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시지프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신들의 떳떳치 않은 비행과 밀의에 대해 발설하길 좋아하고, 게다가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몹시 마뜩찮은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찍힙니다.

아무리 밀어 올려도 결국엔 다시 굴러 떨어지고 말 바위를, 또 그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을 받은 것도 자신이 엿본 제우스의 떳떳치 않은 비행을 발설한 괘씸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물이 귀해 몹시 고생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산위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날 저는 그런 노무현의 모습에서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를 떠올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의 모습 역시 그러했습니다.

삼당합당 이후 '인물도 정책도 없이 오로지 지역색만으로 치르는 선거'에서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부산에서 그 바위를 굴려올리다가 떨어지고, 시장 선거에서도 오로지 그 하나의 지역색으로 떨어지고, 어쩌다 보궐선거 때 힘들게 차지한 대한민국 정치1번지 종로조차 과감히 버리고 다시 부산에 내려가 치른 선거에서 또 떨어지고...... 중재를 위해 찾아간 노사분규 현장에서 계란 세례를 받고, 그러면서 또 찾아가고......

대체 그는 무슨 운명으로 태어나, 무슨 바위를 그렇게 산꼭대기 위로 밀어올리려고 했던 것인지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던 과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홀홀 단신으로 국민경선에 나서 국민후보가 되지만 때맞춰 터진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와 당내 분열로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당내의 온갖 음해와 '신문인지 아니면 그 신문을 발행하는 신문사의 사보인지, 또 그도 아니면 어떤 당의 선전 당보'인지 모를 이른바 수구 메이저 언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그는 다시 산 위로 바위를 밀어올립니다. 온갖 우여곡절과 온갖 양보 속에 받아들인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 단일화' 결정 과정도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13년 전 마포 통일민주당사 앞에서 본,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의 노무현을 생각합니다. 그때 함께 구호를 외치지 못하고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것,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의 빚처럼 당신에게 미안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불혹을 훨씬 넘긴 이 나이에도 눈물이 납니다. 당신은 전에도 아름다웠고, 지금도 아름답습니다.

지금은 그 바위가 그 산 어느 자리쯤 위치해 있습니까?

주먹 안에 가두면 채 한줌도 안되는 이땅의 부패 기득권 세력과 또 그들이 자신들의 부패 지배 구조의 발판으로 삼는 지역주의 망령을 물리치고 그 바위는 산 위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사익추구만을 위하여 가장 더럽고도 비겁한 방식으로 진실을 가리고 눈앞의 사실조차 왜곡하고 있는 저 수구 언론들의 온갖 훼방 속에서도 그 바위는 한국 민주주의 정상 위로 올라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거를 몇 시간 앞둔 날 밤, 당신이 친구처럼 동지처럼 믿었던 정몽준씨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느닷없이 당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얼마남지도 않은 시간 어떻게든 저 바위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하는데. 처음에 그것은 바위였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그를 비난한들 무얼 할까요?
또 그의 그릇을 탓한들 무얼 할까요?

이 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무어라고 기도해야 그 바위가 우리 앞에 다시 흔들리지 않을까요.
운명의 신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나요?

정녕 우리가,
우리 모두가 나서서 그 운명의 신을 대신할 수 없는지요.
그 '희망'을 붙잡을 수는 없는지요.
우리가 그를 지킬 수는 없는지요.

아아, 노무현......
당신을 생각하면 다시 이렇게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기어이, 기어이 쏟고 마는 눈물 속에서도 우리는 당신을 지킬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기운내세요, 당신.
우리가 당신을 지킬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지킬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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