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감 → 이론 구상
창의력 → 이론과 검증결과의 일치
신뢰도 → 직감의 높은 확률의 집계
당신이 10가지 이론을 구상해서 검증을 해보니
10개 중에 8개가 맞았더라
그러면 직감 확률이 80%이며
검증결과가 없어도 당신이 하는 말의 신뢰도는 80%이다.
신뢰도가 높은 사람은 창의력이 높다.
하지만 이론 구상에 검증 결과가 없으면 4차원이라고 불린다.
어린아이들은 블럭을 끼우거나 그림을 그리지만
이런 매체들은 규칙성이 애초에 잡혀 있다.
블럭은 누가 어떻게 끼우든 블럭의 규칙으로 검증된다.
그림도 원근법 같은 기법은 제외한다면 회화 매체라는 규칙으로 검증된다.
이런 매체에서는 어린아이의 다양한 이론 구상은 즉각적으로 검증된다.
만약 여기서 어린아이의 매체가 과학으로 된다면 과학적 규칙이 없는 어린아이는
과학적 검증 결과를 낼 수 없어 바로 4차원으로 불릴 것이다.
최종적으로 블럭은 블럭이란 세계관으로 좁혀져 있고 그림도 그렇다.
유치원 선생님이 인정을 해주니 원근법을 무시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닫아 놓은 세계관은 내 것이 아니며 열린 세계관을 검증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창의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언어의 사전적 정의나 문법 어휘력 틀릴 수도 있는데
그런 거 무시하고 임의로 정의할게요.
직감 → 선험적인 경험
검증 → 과학적 결과
신뢰도 → 선험적인 경험과 과학적 결과의 통계적 일치성
창의력 → 선험적인 경험을 신뢰도를 측정해서 가치 규정
점쟁이 할매가 10번 점을 쳤는데 이것은 직감이다.
이후 10번 점친 것 중에 8개가 검증되었다.
점쟁이 할매의 직감은 신뢰도가 80%다
신뢰도가 높은 직감은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경험한 것의 신뢰도인가요?
이렇게 바꿉니다.
창의력은 선험적인 경험의 가치 규정인가요?
선험이면 경험이 아니고
경험이면 선험이 아닌데
선험적인 경험이라니 이건
살아있는 죽은 것. 죽은 산 것.
뭐 이런 헛소리 아닙니까?
도무지 말이 안됩니다.
점쟁이 할매가 점을 맞추는 것은
고객들을 만나며 데이터를 축적한 것인데
그게 어찌 창의력이겠습니까?
기억력과 눈썰미죠.
점쟁이 수법은 복제에 표절인데
복제와 표절이 어찌 창의가 되겠습니까?
직감 → 선험
검증 → 과학적 결과
신뢰도 → 선험과 과학적 결과의 통계적 일치성
창의력 → 선험을 신뢰도를 측정해서 가치 규정
이러면 말이 되죠?
데이터 축적이 창의라는 겁니다.
점쟁이 할매가 가상의 인물을 그려서 점친다면 가능 하겠죠.
새 박사가 첨 보는 새를 보고 새를 연구하기 전에 결과물 정도야 추측할 수 있겠죠.
선험이 경험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의 가치가 창의력을 규정한다는 겁니다.
직감은 거의 경험인데
선험이라고 우기면 곤란하죠.
개들이 사람 눈치를 잘 봅니다.
공을 던지면 개는 공을 물어오는데
고양이나 늑대나 여우나 소나 말이나 안 물어옵니다.
그렇다면 개는 창의력이 발달한 동물일까요?
개는 본능적으로 눈치가 발달한 거죠.
개는 직감으로 사람이 공을 원한다는걸 알아요.
직감은 창의의 적입니다.
창의는 부단히 직감을 배제해가는 것입니다.
직감은 흔히 편견, 선입견이라고 하죠.
직감을 고정관념 혹은 주관이라고도 합니다.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주관을 타파하고
편견을 타파하고 선입견을 타파하고
예단을 타파하고 지레짐작을 타파하고
형식논리와 도그마를 타파하고
본능도 버리고 생각도 버리고
일체의 먼저 와서 자리깔고 있는 것을 버리고
의식의 표백이라는 절차를 밟은 다음에야
창의에 소용되는 마음의 백지가 펼쳐지는 법입니다.
점쟁이는 척 보면 왜 왔는지 알고
베테랑 형사는 척 보면 치정사건임을 압니다.
그게 직감이라는 거죠.
그래서 점쟁이나 형사가 벤처해서 돈벌까요?
천만에! 창의는 직감을 버리는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이너스 시키고 그 버리겠다는 생각까지 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깡통은 동조화 되지 않습니다.
자연의 진리와 공명하지 않습니다.
주파수가 맞아지지 않습니다.
완전히 비워서 제로가 되었을 때 커다란 공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의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표절해놓고 창의라고 우길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대부분의 창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때려부수는 전투의 과정에서 얻어집니다.
스스로 꾀를 내어 이기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적진을 망원경으로 살피다가 헛점을 포착하고
두들겨 패는 과정에서 창의가 얻어집니다.
나폴레옹이 천재라서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한게 아니고
망원경으로 딱 보니까 적진의 헛점이 관찰된 거죠.
적이 진지를 갖추기 전에 보병의 행군속도를 두 배로 올려서
병사들이 녹초가 되도록 몰아붙여서 적의 본진을 그대로 들이칩니다.
이는 초딩도 할 수 있는 전술이지만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창의는 부단한 관찰과 타파에서 얻어집니다.
무조건 때려부수는게 창의입니다.
창의하는 사람의 특징은 끝까지 물고늘어진다는 점입니다.
안철수가 항복할때까지 까는게 창의입니다.
점쟁이는 척 보면 왜 왔는지 알고
베테랑 형사는 척 보면 치정사건임을 압니다.
그게 직감이라는 거죠.
그래서 점쟁이나 형사가 벤처해서 돈벌까요?
천만에! 창의는 직감을 버리는데서 시작됩니다.
선험을 경험과 일치시키는 것은 직감이고
그럼 창의와 직감이 어떻게 다른 지가 궁금합니다.
갈릴레이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자연의 표절을 통해서 직감한 것이 아닌가요?
직감은 창의의 반대말로 보면 됩니다.
창의는 직감, 본능, 예단, 선험, 경험, 눈치, 분위기, 눈썰미, 데이타, 교리, 논리, 지식, 시스템 등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것을 타파해가는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관찰을 통해 알아낸 것입니다.
지구가 둥근 것은 눈으로 보면 보입니다.
직감, 본능, 예단, 선험, 경험, 눈치, 분위기, 눈썰미, 데이타, 교리, 논리, 지식, 시스템 등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것은 자연의 표절에서 나온 거 같은데
자연의 표절을 때려 부순다는 건가요?
자연의 표절을 부순다고 하면 제 세계관은 충격입니다.
어휴 지금 창의를 논하고 있는거 아닙니까?
자연의 표절이든 뭐든 열거한 것들은 이미 해먹은건데 해먹은게 어떻게 창의입니까?
대충 이해는 갑니다. 때려 부순다는 것은 시스템 업데이트인데 과거의 학자들이 알던 자연과 지금의 학자들이 알고 있는 자연 그리고 앞으로의 자연의 대해서 업데이트가 된다면 그게 창의라는 거군요. 세계관을 깨부수는 것이 창의다. 헌 집을 헐고 새 집을 짓는다.
창의 잘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평불만이 많고 시비를 잘 거는 사람입니다.
일본 만화가 발달한 것은 오타쿠들이
하루종일 집에 처박혀 있으니 불평불만이 많아서
자꾸 시비를 걸어서 그런 거에요.
에너지를 원해서 시비 걸어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군요.
위플래쉬 플래처 교수가 에너지를 원하니 제자에게 시비를 건다 이렇게 보면 되겠군요.
에너지를 원치 않는 사람은 안락되고 안정된 상태를 원하는 것 노예 포지션
창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며
그러려면 불가피하게 기존 질서를 때려부숴야 합니다.
그냥 창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대부분 남의 것을 훔친 다음 그것을 개선합니다.
남의 약점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 창의합니다.
자연을 복제한다는게 생각대로 잘 되지가 않습니다.
벌이 육각형 집을 지으니까 나도 육각형집을 짓자.
이런건 개소리고 창의가 그런 식으로 안 됩니다.
자연의 건축은 지구의 중력을 쓰는데
중력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복제가 안 됩니다.
처음에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다가
거기서 하나씩 빼나가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창의가 됩니다.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고자 하나 모방이 안 됩니다.
그게 잘 안 되는 이유를 깨달으면 창의가 됩니다.
처음에는 사실주의 곧 리얼리즘으로 가서 자연을 그대로 복제하다가
거기서 어떤 질서를 깨달으면 재질서화를 할 수 있는데
거기서 위대한 창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대개 리얼리즘으로 시작하지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어떤 핵심을 남기고 군더더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근원의 질서를 포착하게 되며 그것은 보나마나 에너지의 결입니다.
오! 크게 한방 먹었습니다.
질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창의력이 직감의 신뢰도인가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것소.
표현이 자연스럽지 않네요.
'지식은 무식의 신뢰도인가요?' <- 이런 말이 허용됩니까?
직감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창의는 경험하지 못한 것인데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경험한 것의 신뢰도인가요?
아무래도 이상한 말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