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깨달음
언어와 그 언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 철학자는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하는 사람이다. 이 기록은 내가 구축한 나의 언어들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했다. 누군가가 반론하여 ‘아니다. 나는 인생을 낙(樂)으로 본다’ 하고 대든다면 어떨까? 틀렸다. 고집멸도의 사성제 전체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성제 안에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인과율의 시스템 구조가 숨어 있다. 비판하려면 석가의 고(苦)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인과논리의 이야기구조를 비판해야 한다. 이렇듯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이 맥락이다. 나는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비참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비참과 구원을 짝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인가 아닌가를 논하려 든다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석가가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짝지어 보이듯이 비참과 구원, 단절과 소통을 짝지어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선과 악이 짝을 짓듯이 미와 추가 짝을 짓듯이 자유와 억압이 짝을 짓듯이 구원과 비참이 짝을 짓는다. 어떻게 짝을 짓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개념들을 짝 지어 보인다. 하나의 단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의 측면에서 그 쓰임새를 구축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맥락이다. 내가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꽃도 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다'고 우기며 참견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내가 미인이 예쁘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미인의 뱃속을 내시경으로 들여다 보면 전혀 예쁘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세상이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이와 같은 무지는 극복된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의미는 단어가 아니라 맥락에 있다. 꽃이 아름다운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관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색즉시공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간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아직 관계망의 세계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다. 관계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꽃이 아름다우면 그 아름다움을 매개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한다. 인간이 선하면 그 선을 매개로 사회는 의사소통을 한다. 물론 장미에도 가시가 있다. 미인도 화장실에서는 추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인간도 악한 점이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소통하지는 않는다. 소통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맥락을 아는 것이다. 맥락을 알게 되면 세상에 논쟁할 일은 하나도 없다. 모든 논쟁은 언어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니 보수니 혹은 좌파니 우파니 혹은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세상의 모든 논쟁이 언어와 맥락에 대한 깨달음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난마처럼 얽힌 세상사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과 대립과 갈등과 오해가 일거에 해소된다. 선과 악, 음과 양, 여와 남, 밤과 낮, 하늘과 땅이 대립하지 않는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흐름 가운데 있다. 달리는 자동차의 앞과 뒤는 대립하지 않는다. 앞과 뒤가 대립하는 것은 그 자동차가 쓰임새를 잃고 그만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인생은 비참한가 아름다운가 만약 그렇게 질문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자동차를 멈추어 세운 것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말했지만 이는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당신이 ‘인생은 낙(樂)이야’ 하고 반론하려는 찰나 이어지는 집과 멸과 도가 스스로 그 고(苦)를 해체해 버린다. 위대한 반전이 그 가운데 있다. 나는 인생은 비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격하려는 찰나 바로 이어지는 구원에 의해 그 비참은 해소되어 버린다. 석가의 인연은 곧 인과법칙이다. 인과는 색과 공 그리고 공과 색 사이의 인과관계다.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 숨은 것은 무엇인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도(道)가 있다. 고집멸도의 도(道)다. 도(道)는 길이다. 길은 정거장과 정거장을 잇는다. 잇는 것이 관계다. 도가 관계다. 인생은 비참과 구원 사이에 있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라는 말은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더 완성되어지기를 소망해야 하고 스스로 더 세련되어지고 고상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래야만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글쓰기는 당신이 만약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만나고자 하는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조언은 이상주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미학적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려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창호를 만나 바둑을 두려면 이창호 만큼은 두어야 한다. 이창호와 한 판을 두고 싶은데 두지 못한다면 그것이 비참이다. 이창호만큼 실력이 늘어서 이창호와 한 판을 둔다면 그것이 구원이다. 그럴 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인생에서 최고의 사건은 최고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그 이외에 인생에 신통한 일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