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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860 vote 1 2008.12.30 (23:37:35)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인간이 진리와 반응하는 이유는 존엄 때문이다. 존엄은 중요성이다. 긴장하게 하는 것이다.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다. 눈 뜨게 하는 것이다. 일어서게 하는 것이다. 자연의 완전성이 인간을 눈 뜨게 한다.

바위나 돌이 존엄하지 않은 이유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 뜨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하지 않고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을 보고 달려가서 향기를 맡아보는 동물은 사자도 아니고 개도 아니고 인간이다.

여러 사건들은 어떤 하나에 맞물려 있으며 그 하나의 움직임에 연동되어 일어난다. 그 하나가 인간이다. 인간이 존엄하다. 인문주의가 강조하는 인간의 존엄성 혹은 불교에서 화엄의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높고 존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찮은 것도 있다. ‘존귀하다’는 표현은 봉건시대의 직관적 판단이므로 엄밀하지도 않고 차별주의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명백히 자연의 완전성에는 여러 사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가 있다.

사건들의 중심이 있다. 가정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아기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그 집에 아기가 있으므로 이웃집 할머니들도 방문하고 가족들도 화기애애하다. 떠들썩한 이야깃거리가 생겨난다. 아기가 존엄하다.

여러 사건들을 한 줄에 꿰어내는 테마가 있다. 그것이 화엄이다. 존엄이다. 의미와 가치를 묶어내고 부분과 전체를 결합한다. 사람이라면 가족의 유대감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유지시킨다. 그러므로 존엄하다.

혈연관계를 중요시 하는 사람에게는 핏줄이 존엄이다. 종교인이라면 교리가 존엄이다. 심과 날이 있다. 심이 존엄하다. 가치는 심을 붙잡아 스스로를 지탱하고 의미는 날을 타고 사건들을 전개시킨다.

생명이 존엄한 이유는 많은 사건들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인간의 공동체를 묶어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을 해칠 때 타인도 해치게 된다. 공동체의 동그라미를 해친다. 이해관계를 쫓아 귀납으로 판단할 때 서로 해치게 된다.

헤브라이즘은 존엄을 신성에서 찾는다. 신은 존귀하게 여기고 인간은 천하게 여긴다. 기독교의 그들은 존엄을 찾았지만 멀리했다. 자기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을 인간 자신에게 내면화 하지 않았다.

헬레니즘은 자연의 사물에서 존엄을 찾는다. 모든 완전한 것이 존엄하다. 인간 역시 존엄하다. 인간 내부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특히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의 몸 속에 존엄의 원소가 숨어있을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존엄은 존재에서 의미로, 의미에서 가치로 상승하며 진리를 향하여 나아감이다. 인간과 진리 사이를 매개한다. 진리와 즉각 반응하는 것이 존엄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알아채지 못할 때 인간은 존엄을 잃는다.

● 기독교 관점 - 완전성은 신성(神聖)에 있다. 인간이 그것을 받는다.

● 그리스 관점 - 자연의 완전성에 신성이 있다. 영웅들은 신성하다.

천부인권설은 기독교의 관점이다. 완전한 것은 하늘이며 하늘이 인간에게 완전성을 조금 떼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존엄이 있고, 인권이 있고, 자유가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가? 이는 증명될 수 없다.

기독교 중에서도 복음주의 계열이 이 논리에 빠져있다. 그들은 특별히 선택된 자들은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믿는다. 인권은 신에게서 받는 것이며 부자나 천재나 미인들은 더 많이 그것을 받았다고 믿는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교회에 십일조를 많이 내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목사도 있다. 인권은 하늘이 주는 것이 아니다. 인내천이다. 인간이 곧 하늘이다. 존엄은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는 능력 그 자체다.

인간의 존재가 진리와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에게 그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건을 만든다. 인간의 존엄성은 신에게서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건의 주인공인 인간이 그 사건으로하여 신과 직통하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원래 없고 만인이 각자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 생존경쟁의 원리에 의해 저절로 경제가 발전하여 자연히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이다. 천만에! 아름답지가 않다.

이기적인 행동은 공동체를 파괴한다. 자연을 파괴한다. 생명을 파괴한다. 전쟁을 유발한다. 그것은 떳떳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존엄이 아니다. 옳지 않다.

어린이가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기심이 아니다. 어린이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경쟁심이 아니다. 어린이는 목적과 의도를 앞세우지 않고 자신과의 관련성을 따지지 않고 아무런 논리없이 순수하게 행동한다.

어떤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루 종일 악기를 연습하고 어떤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깔깔거리며 뛰어논다. 그들은 매혹된 것이다. 인간이 가진 본래의 완전성이 반응하였기 때문에.

끝나는 것이 완전하다

완전한 것은 무엇일까? 끝 나는 것이다. 어디에서 끝이 나는가? ‘end’의 어원에는 이(齒)라는 뜻이 있다. 이처럼 뾰족한 부분이 끝부분이다. 모서리 혹은 바늘끝처럼 뾰족한 부분에서 사건은 끝난다고 여긴 것이다.

이 계통으로는 edge, exit, ear 등이 있다. 귀(ear)가 있는 귀퉁이가 끝부분이다. 점점 작아져서 마침내 사라지는 것이 끝단이며 끝이 나야 완전하다. 그러므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야 맞다. 그래야 완결된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전체는 크고 부분은 작다. 바늘끝처럼 작다. 그리고 사라진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점점 확대된다. 이래서는 사건이 끝나지 않는다. 완결되지 않는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꼬리가 끝이다. 그러므로 몸통에서 꼬리로 나아감이 옳다. 연역이 옳다. 일본 만화처럼 개인간의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된 사건이 우주적으로 확대되어서는 끝이 나지 않는다.

어떨 때 완결되는가? 통할 때 완결된다. 건너뛸 때 완결된다. 공명할 때 완결된다. 울림과 떨림이 전파될 때 완결된다. 인간은 이해관계를 쫓아 귀납논리를 전개하여 의미와 가치를 판단한다. 그것은 끝 나지 않은 것이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는 10미터다. 그 사이를 점프한다. 이 글을 쓰는 나의 손과 자판과 컴퓨터와 서버와 랜선은 모두 연결되지만 최종적으로 독자의 눈 앞에서는 점프한다. 모니터와 눈의 점프 거리는 50센티다.

몸통에서 꼬리로 나아간다. 그리고 점프한다. 최종적으로는 건너뛴다.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되지 않으므로 귀납논리로 추적할 수 없다. 꽃의 아름다움과 내 마음이 반응하는 거리는 3미터다. 점프한다.

건너뛰기 때문에, 점프하기 때문에, 공명하기 때문에, 울림과 떨림으로 전파되기 때문에 인간은 연역논리를 포착하지 못한다. 정교한 연역의 매커니즘을 포착하지 못한다. 직관으로 판단한 것을 억지 변조하여 귀납논리로 해석한다.

흔히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사회가 발전한다고 말하고, 혹은 천부인권에 의하여 신에게서 무언가를 받았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대충 둘러댄 것이다. 진실로 말하면 인간의 본성이 진리와 직접 반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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