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주어진 일
그것은 재현하기다.
그대가 우연히 흘낏 보았던 것.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다음 몇 번이고 되돌아 본 것.
그리고 지금껏 잊지 못하는 것.
그대의 기억 속에서도
이제는 바래어져서 알듯모를듯 한 것.
누구나 경험하듯이
유년의 어느 날 엄마 손에 이끌리어
낯선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혹은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에서 한 점의 그림을 보고 문득 전율하게 된다.
금방 매료된다.
그러면서도 갈등한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것.
용기있는 이 만이 자기 자신에게 그러한 매료됨을 허락한다.
혹은 형들을 쫓아간 숲에서
계곡에서 들판에서 자연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무덤가에서 나풀거리는 한 마리의 나비.
산비탈에서 뛰노는 한 쌍의 고라니.
처음 보았을 때 느끼는 그 가벼운 설레임.
한 인간이 그 어떤 끌림에 이끌리어
그 어떤 자연스러움에 자기 자신이 온전히 동화됨을 발견하고
그 자연의 숨결에 흠뻑 취함을 발견하고
감염된듯 열병에 걸린듯 안타까워 하다가
온전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부분이 전체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 매료됨을 자기 자신에게 허락할 것인가 말것인가?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
삼화령 미륵 삼존불의 부처님 엄지발가락은
금지선을 넘어 슬쩍 들어와 만져본 아이들의 손때로 반질반질 하다.
부처님의 발가락을 슬쩍 만져본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인생은 그 이후로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한 매료됨을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기로
내 인생을 관통할 운명의 룰을 정할 것인가 혹은 무시할 것인가?
부분이 전체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순간의 판단이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지점이 있다.
그 작은 한 지점에서 인간은 온전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온전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고서는
신을, 그리고 그 신의 완전성을 만날 수 없다.
온전히 신과 만나지 않고서는
온전히 신의 완전성과 감응하지 않고서는
부분이 전체와 만나는 운명의 작은 지점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부르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서는
타인과 온전한 사랑을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