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과학이 대칭성을 포착하는 방법은 분석이다. 덩어리를 잘게 쪼개서 내부를 뜯어본다. 그런데 생명을 뜯으면 어떻게 되지? 죽는다. 존재를 뜯으면 에너지가 이탈한다.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다.
내부를 뜯어보기 위한 인간의 개입이 본래의 완전성을 훼손한다. 불완전하다. 복원해야 한다. 에너지를 태워 도로 살려내야 한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어떤 것이 완전한가?
완전한 구조는 창조한다. 창조하여 낳는다. 낳아서 증식하고 번성한다. 생명은 낳음에 의해 성장한다. 역사의 진보도, 문명의 발전도 낳음에 의해 일어난다. 자본의 증식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분석적 접근은 자본의 본질이라 할 ‘시장지능’을 해체한다. 살아 움직여가는 자본의 생명성을 포착 못한다. 사회의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좌파들이 집착하는 제도나 법률의 진보는 껍데기다.
불질적 부나 마음의 행복 또한 진짜가 아니다. 집단지성에 의한 사회지능의 발달이 진보의 참된 본질이다. 개인의 사회적 지능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성 자체가 일종의 지능을 가진다는 말이다.
금융, 증권, 보험에 의하여 관계의 밀도가 향상됨으로써 시장의 아이큐가 올라가는 것이 자본의 발달이다. 언론, 집회, 선거로 사회관계의 밀도를 증대하여 사회의 아이큐를 올리는 것이 진보다.
분석적 방법은 기왕에 만들어져 있는 사물을 해체하여 피상적으로 관찰할 뿐 처음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 생생한 낳음의 현장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에너지 개념을 빠뜨린다.
‘계’에 밀도가 걸려 있으면 에너지다. 분석적 방법으로는 밀도차를 포착하지 못한다. 밀도는 관계의 밀도이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되 입으로만 말고, 눈과 귀로도 즐긴다면 관계의 밀도가 증가한다.
음악을 듣되 리듬과 템포, 멜로디, 화성, 하모니를 두루 챙겨본다면 관계의 밀도가 증가한다. 사람 사이에서 관계의 밀도를 증가된다면 그것이 사랑이다. 밀도차에 의한 계의 방향성이 에너지다.
기관차와 객차사이, 엔진과 바퀴사이에 밀도차에 의한 방향성이 있다.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계가 통합되어 전체가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분석은 관계를 해체하므로 방향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기관차와 객차를 분리해놓고 어디고 앞이고 뒤인지 모른다. 계의 방향성은 밖으로 열려있는 상부구조에만 있다. 닫혀있는 하부구조는 방향성이 없다. 방향성이 없으니 에너지를 태우지 못한다.
에너지가 없으니 진보와 보수가 서로 발목잡고 교착되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 방향성 개념을 얻어야 한다. 계에 밀도차가 있다.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가 있다. 그것을 가진 완전성이 있다.
구조의 이해는 첫째 근대과학의 토대라 할 대칭성의 이해다. 둘째 그 대칭성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게 하는 완전성 개념의 이해다. 에너지를 태웠을때 성립하는 계가 진행하는 방향성이 완전성이다.
우주는 팽창하고 생물은 진화한다. 문명은 발달하고 역사는 진보한다. PC는 업그레이드 되고 인터넷은 빨라진다. 자본은 시장지능이 발달하고 공동체는 사회지능이 발달한다. 점점 아이큐가 높아진다.
명백히 계가 진행하는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가는 길이 있다. 도(道)가 있다. 그 방향성을 알았을 때 교착은 타개되고, 위기는 수습되고, 문제는 풀려진다. 구조론이 문제를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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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는 외부와의 관계의 밀도이구려.
그러한 밀도는 분석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겠구려.
밀도를 느낄려면 외부와 부딪히는 현장에 있어야 할 터이니,
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것이 사랑이다.
위의 문장 하나로 책 한권을 써도 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