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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177 vote 0 2008.12.30 (12:26:59)

 

삶과 철학


논어 학이편(學而篇)은 공자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이는 아래와 같이 해석될 수 있다.


기쁨이 동기다.

소통으로 기쁨은 얻어진다.

스스로를 완성할 때 소통할 수 있다.


기쁨(說乎)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다. 이는 논의의 첫 출발점을 찍는 문제이다.


기쁨은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인간은 또한 자연의 일부다. 자연이 논의의 근거가 된다.


자연은 인간의 의도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토대가 되는 것이며 그 단단하게 다져진 토대 위에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은 ‘왜 학문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질문은 동시에 ‘왜 도전하는가?’ 혹은 ‘왜 사는가?’ 하는 다양한 질문으로 연역될 수 있다. 


공자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 가운데서 인간은 줄곧 기쁨을 선택해 왔고 그 결과로 오늘날 인간의 삶이 얻어진 것이다.


기쁨은 생리적인 본능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자연의 본능에 충실할 때 인간의 삶은 자연스럽다. 기쁨의 추구는 자연의 본성과 일치한다.


기쁨은 만남(有朋)과 소통(自遠方來)에 의하여 얻어진다. 그러므로 서로는 만나야 한다. 만나서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무엇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가? 완성이다. 개인의 인격이 독립적으로 완성될 때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 군자(君子)의 모습이다.


공자는 첫째 구절에서 기쁨(說乎)을 말하고 둘째 구절에서 소통(有朋)을 말하고 셋째 구절에서 완성(君子)을 말하고 있다.


세 구절은 수미일관하여 전체적으로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룬다. 머리와 꼬리가 만나 하나가 된다. 기승전결을 갖추어 미학적으로 완결된다.


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승..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전.. 人不知而不慍

결.. 不亦君子乎


무엇인가? 인간의 삶은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데 의미가 있다. 신의 완전성은 자연의 평형원리로 전개하여 나타나고 있다.


기쁨 + 소통 = 완성

인간의 본성 + 자연의 평형원리 = 신의 완전성의 재현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에 욕망이 있다. 욕망에 의해 자연과 인간이 인과관계로 연결된다. 그 인과의 연결고리가 곧 기쁨이다.


자연은 평형을 좇는다. 자연을 본받아 인간은 본래의 평형을 회복하려는 본성을 가진다. 평형을 회복할 때 기쁨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평형의 추구가 곧 소통이다. 그런데 소통하려면 완전해져야 한다. 타자에 의존하고 종속되어 있어서는 소통할 수 없다.


종속과 의존을 끊고 스스로 완전해 졌을 때 인간은 능동적으로 외부세계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다. 그럴 때 인간의 모습은 자연과 닮아 있다.


인간은 본래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환경의 지배에 의해 불완전해진다. 엄마 품의 아기는 완전하지만 성장기의 소년은 불안정하다.


환경의 지배를 극복해야 한다. 환경의 도전에 부단히 응전하면서 환경과의 능동적인 소통을 통해 소년의 불완전성을 극복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독립적 인격으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며 공자는 이를 군자(君子)라 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 이치는 평형의 원리다. 자연은 언제나 평형을 이루고자 한다. 물은 낮아질수록 평형에 가까워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본래 완전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성장이 자연의 평형을 깨뜨리고 있다.


사회의 발전과 문명의 진보가 자연의 평형을 깨뜨리고 있다. 인간은 점차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었다. 인간은 점점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환경과의 지속적인 교감을 통하여 본래의 평형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소통이다. 소통할 때 인간은 기쁨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어떤 환경에서든 평형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 완성된 사람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을 닮아간다. 마침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커다란 동그라미를 이룬다.


자연의 원리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그것은 평형이다. 자연은 운동한다. 운동의 결과 평형이탈이 일어나며 이때 힘이 축적된다.


그 힘이 작용하여 자연은 다시 평형을 회복한다. 이 과정은 부단히 반복된다. 인간의 문명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평형이탈과 평형회복의 연속이다.


산업의 발전이 평형이탈을 낳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된 힘을 사용하여 문명은 다시 평형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양된 정신이 필요하다. 산업과 정신의 불균형 그리고 역학과 미학 간의 불균형이 평형이탈을 낳는다. 문명은 점차 위태로와진다. 


홍수와 지진으로 파괴된 대지는 숲이 복원하고 바다가 정화한다. 국지적인 평형이탈이 무수히 일어나지만 큰 범위로 보면 자연은 늘 평형을 회복하고 있다.


빅뱅은 거대한 평형이탈이다. 그 평형이탈의 크기만큼 힘이 비축되었다. 그 힘의 작용에 의해 은하계가 탄생하고 우주는 평형을 회복해 왔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해 언젠가 우주가 완전한 계의 평형에 도달했을 때 에너지는 제로가 되고 우주는 완전히 호흡을 정지한다.  


산업화는 빅뱅과 같은 거대한 평형이탈이다. 그 평형이탈의 크기만큼 힘이 비축된다. 그 축적된 거대한 힘을 과연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인간의 정신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마침내 산업이라는 거대한 힘을 통제하는데 실패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인간이 스스로 완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차원 위의 존재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깨뜨려진 평형을 회복하기 위하여.


기쁨이 슬픔보다 낫다. 인간은 소통할 때 기쁨을 얻는다. 참된 소통은 인간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으로 하여 가능하다.


꽃은 피어서 완성되어야 나비를 만날 수 있고 애벌레는 허물을 벗고 한 마리의 나비로 완성되어야 꽃을 만날 수 있다. 비로소 꽃과 나비는 소통할 수 있다.


당신이 완성되지 못한다면, 유년의 어린이로 머물러 있다면, 허물을 벗지 못한 애벌레로 머물러 있다면 그대는 진정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공자는 군자(君子)라는 이름의 인격적 완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학문의 수양을 통하여 군자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대가 군자로 완성될 때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것이며, 그렇게 찾아온 벗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소통의 결과로 기쁨을 맛볼 것이다.


석가는 열반(涅槃)이라는 이름의 완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깨달음을 통하여 니르바나에 도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대가 깨달음을 완성시킬 때 그대의 아트만이 우주정신 브라흐만과 소통할 것이며 그러한 소통의 기쁨으로 부처님의 미소를 얻을 것이다.

존재는 소통으로 완성된다. 인간은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꽃을 피우고 나비를 만나고 열매를 맺는 가운데 기쁨이 있다.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극한 나로 지극한 너와 소통할 때 내 안에 주어진 본래의 완전성을 찾아낼 수 있다. 신의 완전성을 재현할 수 있다.


완성은 독립적 인격의 완성이다. 내 몫의 자유의 완성이다. 그 완성은 나아가 사회의 완성, 문명의 완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완성으로 연역되고 확장된다.


그렇게 진리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이며, 자연의 완전성과 호응하는 것이며, 신의 완전성을 삶이라는 무대에 재현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내 안의 진리를 발견하고, 내 안의 자연을 찾아내고, 내 안의 신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과 소통의 채널을 이어가는 것이다. 


완성해야 독립한다. 독립해야 자유롭다. 자유로와야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 만나야 소통할 수 있다. 기쁨이 그곳에 있다.


무엇을 완성해야 하는가? 가치를 완성하는 것이 완성하는 것이다. 가치는 어디에서 찾는가? 가치는 의미의 배달에서 찾아진다.

의미는 어디에서 얻는가? 지식과 사실과 기호에서 얻는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사실과 기호와 지식이지만 그 안에서 취해야 할 것은 의미다.


의미로 하여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의미를 내포한 사실 그것이 진실이다. 의미를 내포한 기호 그것이 진리다.


의미를 내포한 지식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렇게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가치다.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껴서 밝혀낸 사실과 기호와 지식에 주저앉아서 안 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조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상대성 속에서 새롭게 인식된다.


밝혀낸 사실과 기호와 지식을 세계라는 이름의 환경과의 상대성 안에서 새롭게 파악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의미요 맥락이다. 정보는 그렇게 가공되어야 한다.


가치는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한다. 값어치를 매긴다. 정보를 가공하고 사실을 조리하고 지식을 평가한다. 우선순위와 접근경로가 지정된다.


발견된 사실과 정보와 지식에서 필요한 하나를 선택하고 불필요한 하나를 배제하여 의미와 맥락이라는 방향성을 지정하는 것이다.


가치는 무엇을 취하는가? 성속(聖俗) 중에는 성(聖)을 취한다. 진위(眞僞) 중에서 진(眞)을 취한다. 선악(善惡) 중에서 선(善)을 취한다.


미추(美醜) 중에서 미(美)를 취하고 자유와 억압 중에서는 자유(自由)를 취한다. 그것은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이다.


인간은 부단히 선택 앞에 선다. 용기있게 나아가야 한다. 결단을 내려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 그른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취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다.


세계는 커다란 하나의 ‘계’다. 그 ‘계’의 평형이 존재한다. 그 평형의 중심에 추가 존재한다. 그것은 정상(頂上)이다. 정상을 바라보는 것이 이상주의다.


이상주의를 취하는 것이 비전이다. 우리 비전이라는 나침반을 얻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 가치판단으로 가능하다.


성(聖)과 진(眞)과 선(善)과 미(美)와 자유(自由)를 지향하는 가치판단이 그 나침반이 된다. 등대가 되고 북극성이 되고 삶의 지표가 된다.


먼저 비전을 취해야 한다. 이상주의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길을 떠나기 앞서 정상(頂上)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번이라도 정상을 본 자가 그 추억되는 정상의 모습에 비추어 보아 성(聖)과 진(眞)과 선(善) 미(美)와 자유(自由)를 자유를 판단할 수 있다.


성(聖)의 모습이 정상부를 닮아 있다면 속(俗)의 모습은 말단부와 닮아있다. 진(眞)과 선(善) 미(美)와 자유(自由)가 하나같이 정상의 모습과 닮아있다.


내 안에 정상을 품어야 한다. 내 안에 성과 진과 선과 미와 자유를 품어내는 것으로 인격은 완성된다. 군자가 되는 것이며 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인격과 깨달음을 완성할 때 그 울림과 떨림에 의해 나아가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을 완성할 수 있고 역사와 문명의 완성상을 제시할 수 있다.


기쁨이라는 자연의 방아쇠에 의하여 촉발된 그대가 깨달음의 기쁨이라는 보상을 얻을 때 머리와 꼬리는 이어진다. 비로소 신과 소통할 수 있다.


자연은 본래 완성되어 있어서 자연스럽다. 그대 자신의 완성이 지극하여 자연스러움에 도달할 때 그대는 평정심을 얻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연역되고 전개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대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내기다.


내 마음 안 깊은 곳에 감추어진 소통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 그 열쇠로 기쁨의 문을 열고 자연의 완전성 안으로 용기있는 걸음을 성큼 내딛어야 한다.


소통한다는 것은 깊이 만나는 것이다. 겉으로 만날 뿐 아니라 속으로도 만나자는 것이며 부분으로 만날 뿐 아니라 전체로도 만나자는 것이다.


눈으로 만나기에 그치지 말고 마음으로도 만나야 한다. 소통의 열쇠를 열고 대화의 빗장을 열고 마음의 뜰 안으로 깊은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소통한다는 것은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온전해지는 것이다. 의존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간직한 채 하나가 된다.


인간은 내땅, 내집, 내가족, 내차, 내돈, 내것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남의땅, 남의집, 남의 가족, 남의 것이 막히어 그만 차단되고 만다.


말이 많아서 수다를 떠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단순한 의견교환은 소통이 아니다. 의미 너머에 가치가 있고 가치 너머에 완성이 있다.


소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내땅, 내집, 내가족, 내차, 내 돈이 나를 존재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 친구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 그 친구와의 사귐의 깊이가 나를 보증한다. 나의 존재의 증명은 나의 소통의 질적 양적 범위 만큼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교감이 없이는 나의 존재가 인정될 수 없다. 나라는 현존재는 나의 역사와 나의 문명과 나의 세계와의 사귐이 보증한다.


그러므로 역사와의 호흡이 없는, 세계와의 교감이 없는, 문명과의 대화가 없는, 신과의 소통이 없는 고립된 나로는 그 존재가 허무할 뿐이다.


내가 완성되고서야 소통할 수 있다. 친구와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역사와 소통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신과 대화할 수 있다. 깊은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


내 안에 숨겨진 열쇠를 찾아 자기 내부에 잠재한 가능성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의 임무를 다할 때 나의 존재를 실현된다.


총알이 날아가는 이유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아쇠가 당겨졌기 때문이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이다.


과녁을 맞추기 '위하여'가 아니라 방아쇠의 격발에 '의하여'다. 무릇 ‘위하여’로 설명되는 것은 모두 가짜다. ‘의하여’로 설명되는 것이 진짜다.


왜 사는가? 기쁨을 얻기 위하여가 아니라 기쁨이라는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이다. 기쁨은 자연과 인간의 접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이라는 방아쇠가 인간의 욕망을 격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기쁨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그런 뜻에서이다.


자연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은 격발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인간의 삶은 결론이 나는 것이다.


처음 작은 기쁨을 맛보았을 때 삶의 질문을 얻은 것이며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을 때 그 질문에 답을 찾은 것이다. 그것으로 자물쇠와 열쇠가 맞는다. 


작은 하나의 씨앗에 미래의 뿌리와 잎과 줄기가 배아(胚芽)로 갖추어져 있다. 그렇다. 씨앗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씨앗은 축소된 한 그루의 나무다.


그대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단지 열쇠로 그 문을 열고 그 완성의 씨앗 속에 감추어진 잎새와 줄기와 가지와 꽃을 펼쳐보이기만 하면 된다. 


본래 흙에서 싹으로 돋아 나왔으니 다시 씨앗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과 끝은 만난다. 한 바퀴를 돌아 1사이클을 완성한다.


어떻게 자연의 본래로 돌아갈 수 있는가? 자연의 완전성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완성할 때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소통의 수단으로 언어가 사용되지만 언어로의 소통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언어의 편리함이 도리어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편리함에 기대어 언어만으로 가능한 낮은 수준의 소통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타락이 된다. 


텔레파시가 있다면 언어를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을 것이나 인간에게는 텔레파시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이 필요하다.


가족이라면 언어 없이도 소통할 수 있다. 타인과의 만남이기에 언어가 필요하다. 나의 경계를 넘어설 때 모두가 가족이 된다. 깨달음은 나를 넘어서기다.


전략을 쓰기 때문에 또한 인간의 소통은 한계가 있다. 연인이라면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불리하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라도 전략을 쓴다.


먼저 상대방의 카드를 보고 나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결정하려 하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전략을 버려야 한다. 그 의도를 버려야 한다. 희망과 야심을 온전히 말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을 표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와 나 사이에 벽이 있다. 그 벽은 전략의 벽이다. 그 벽은 게임의 벽이다. 그 벽은 희망과 야심과 수단의 벽이다. 그 벽을 넘어서야 한다.


먼저 너의 의도를 파악하고 난 다음에 나의 의도를 결정하려는 상대주의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너의 의도가 어떠하든 나의 길은 항상이어야 한다.


인간은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전략과 의도 때문이다. 희망과 야심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는 소통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온전하다면 전략은 불필요하다. 언제라도 고백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해져야 한다. 네가 내고 내가 네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사랑이라는 레퍼토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은 전략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가족 간에도 역할분담이 있다. 그 역할을 극복해야 한다. 온전히 네가 내여야 한다.


나를 완성한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서 역할의 벽, 게임의 벽, 전략의 벽, 상대성의 벽 그리고 언어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나는 일찍이 구조를 보았고 그 구조는 불완전과 완전 사이에 존재하며 그 구조가 완성될 때 소통할 수 있음을 보았다. 소통할 때 전율이 있었다. 


완성은 미학적 완성이다. 개인은 깨달음을 통하여 완성된다. 삶은 사랑을 통하여 완성된다. 사회는 변혁을 통하여 완성된다. 존재는 소통을 통하여 완성된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그 무대 위에서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여 보이는데 있다. 그것이 불교의 깨달음이고 기독교에서는 부활이고 구원이다.


미추 중에는 미로서 완성하고, 성속 중에는 성으로 완성하고, 선악 중에는 선으로 완성하고, 진위 중에는 진으로 완성한다.


자유와 억압 중에는 자유로 하여 완성된다. 완성으로 의미를 얻고, 의미로 방향성을 얻으며, 전개하여 가치를 실현하며 가치의 완성으로 진리에 이른다.


완성의 이미지를 가슴에 품는 것으로 처음 일어서고 신의 완전성을 그 무대 위에 재현하여 보이는 것으로 하여 자연의 본래로 돌아온다.


희망과 야심을 말소하고 매 순간에 그 순간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획과 의도를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완성해 보여야 한다.


순간이 완성되지 않으면 전체는 완성되지 않고, 부분이 완성되지 않으면 전체는 완성되지 않는다. 시야는 넓혀지지 않고 전모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대의 작은 걸음마에 우주 전체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순간 바람도 잎새도 속삭임을 멈추고 그대의 위대한 한 걸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지금 이 순간에 완성되지 않으면 신의 창조는 실패다. 하나가 완성되지 않으면 우주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 완성된 것과 완성된 것이 소통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빛난다. 완성은 연역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정답을 알고 가는 길이다.


먼저 완성의 이미지를 그려야 한다. 동그라미를 가슴에 품고 가야 한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려는 꿈을 포기해서 안 된다. 그렇게 끝까지 가보기다. 


삶을 철학하기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 베르그송과 키에르케고르, 샤르트르를 위시한 일련의 실존주의 철학의 계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과학과 실증의 한계를 넘어 사유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철학이 점점 문학으로 변한다는데 있다.


니체는 시와 수필에 담았고 샤르트르는 소설에 담았다. 철학은 다만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미학이다. 미학은 ‘계’의 완성에 대한 탐구이다. 문학과 예술은 미학을 탐구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을 과학함은 부분을 볼 뿐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과 실증으로는 부분에 집착할 뿐 전모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은 일정부분 문학 및 예술과 일정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미술과 음악을 모르고 자연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은 본래 완전하며 음악과 미술이 그것을 끌어내 보이고 문학은 그 자연의 완전성을 인간의 삶에 대입하여 보인다.


그러므로 진정 위대한 철학은 자연과 충분히 교감하고 있어야 한다. 음악과 회화와 제 예술, 문화분야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존재의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이다. 자연 그대로를 파악함이 아니라 파악된 결과를 토대로 독립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며 지혜는 방향성이 부여된 정보다. 의미맥락과 가치판단이 존재한다. 특정한 타켓에 겨냥하여 맞춘 거다.


겨냥이 있고 맞춤이 있고 자체완결성과 자기일관성이 있다. 내재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세상을 이해함이 아니라 인간의 주도하에 재구성함이다.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있었던 세계에 적응함이 아니라 인간 이후 새롭게 재창조함이다. 철학은 사회를 재창조하며 문명을 재창조하고 개인을 재창조한다.


사실과 의미와 가치와 지혜와 진리는 서로 연결된 개념이다. 궁극적인 겨냥은 소통이다. 소통은 인식의 일이다.


구조론에 따르면 존재는 곧 일이다. 일은 ‘받기, 쌓기, 틀기, 풀기, 주기’가 일 사이클 구조를 이룬다. 인식에 있어서 일은 소통이다.


인식은 소통이라는 일을 한다. 그 소통의 안쪽은 진리와 지혜와 가치와 의미와 지식이 단계적이고 입체적인 형태의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공간에 맞선다는 것이다. 일정한 물리 공간을 점유하고 시간의 흐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화를 낳는다.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맞서는 것이 존재다. 그것이 일이다. 일함으로써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함을 우리는 삶이라고 한다. 그 삶의 성취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나와 외부세계와의 관계맺기다.


삶이라는 일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또 사랑이라는 성취를 일구기 위하여 외부세계를 향한 창구를 개설해야 한다. 그섯은 인식이다.


인간은 존재를 통하여 시공간의 물리적 환경에 맞서며 또 세계의 인식을 통하여 그 시공간의 흐름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존재는 일한다. 존재함은 일함이다. 자연의 일은 생태계의 진화로 나타난다. 인간의 일함은 소통으로 나타난다.


그 소통의 과정에서 그 소통의 밀도에 따라 기호와 의미와 가치와 지혜와 진리가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하여 인간은 소통을 성공시켜 가는 것이다.


존재는 일이다.

인간의 일은 삶이다.


인간은 존재를 통하여 시공간의 물리적 환경에 맞서고

인식을 통하여 그 환경의 변화에 맞선다.


자연의 일은 생태계의 진화이고

이에 대응한 인간의 일은 세계의 인식이다.


삶의 성취는 사랑이고

인식의 성취는 소통이다.



● 받기 - 진리, 입력(계, 소통, 보편, 신)

● 쌓기 - 지혜, 저장(평형, 아트만, 일반, 개인)

● 틀기 - 가치, 제어(힘, 판단하고 선택한다.)

● 풀기 - 의미, 연산(운동, 실어서 보낸다. 머금는다.)

● 주기 - 지식, 출력(량, 정보, 사실)


철학은 지혜를 추구한다. 그 지혜는 가치와 의미라는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심층적인 지식이다. 개별 정보가 팀을 이루고 세트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사실 보다는 의미를, 의미 보다는 가치를, 가치 보다는 완성을, 완성 보다는 소통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환경과의 소통, 자연과의 소통이다.


인간은 기쁠때 웃는다. 웃음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만날 때 기쁘다. 나의 바깥으로 나를 확장할 때 인간은 만난다.





완성은 평형의 완성이다. 구조라는 말은 알려져 있지만 그 의미가 약하다. 구조주의라는 것이 있지만 철학의 형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로 시작해서 의미까지 갔는데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가치 너머에 평형이 있고 평형 너머에 계가 존재한다.


계와 평형과 구조가 있다. 사람들이 계도 알고 구조도 아는데 평형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계도 모르고 구조도 모르게 된다.

평형을 이해해야 계와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공자의 중용이나 석가의 중도나 노자의 무위나 조주의 평상심이나 다 평형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이다.


그러나 계를 발견하지 못하므로 평형을 찾지 못하r 있다.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평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찾아보지만 중간에는 평형이 없다. 그물의 기둥줄이 그물의 한가운데 묻혀 있지 않고 나무의 기둥이 잔가지 속에 묻혀 있지 않다. 


기둥은 뿌리와 가지 사이에 있지만 가지들 속에 섞여 있지는 않다. 대문은 담장과 골목길 사이에 있지만 마당 한가운데서 대문을 찾을 수는 없다.


평형은 집의 대문과도 같다. 그것은 극점에 있다. 맨 앞에 있다. 선두에 선다. 거함의 함교가 꼭대기에 자리 하듯이.


왜인가? 그 평형은 나와 너 사이에서 소통의 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담보하는 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자랄 수 있기 위하여 기둥은 잔가지들을 모두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홀로 외롭게 나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평형은 전진하여 나아가는 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들 가운데 중용이 없고 어중간하게 눈치보는 중도는 없다.


평형은 위대한 극점이다. 정상의 경지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와도 같은 미묘하고 섬세하고도 호쾌하고 장엄한 거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부단히 제 3자를 개입시키는 거다. 내가 꽃을 보면 너도 꽃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너와 나 사이에 제 3의 것을 놓아보기다.


세차게 부는 바람을 놓아보기도 하고 와당탕 퉁탕 흐르는 물을 놓아보기도 한다. 한여름 뜨거운 볕을 놓아보기도 하고 한겨울 차가운 눈보라를 놓아보기도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너와 나 사이에 소통의 접점을 키워나가는 거다. 집과 골목길 사이에 대문을 가다듬어 나가는 거다. 그것이 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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