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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5169 vote 0 2002.11.25 (13:03:00)

시민K (shiminK@freechal.com)
2002/11/25(월)

"정녕, 죽으면 죽으리라."

<1>
구약성경의 이야기이다. 기원전 바벨론 왕국에 ‘아하수에로’라는 왕이 있었다. 왕은 자신의 충복 ‘하만’을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혀서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부여했고 왕국의 모든 백성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지만, ‘모르드개’라는 유대사람은 결코 그에게 무릎을 꿇지도 절을 하지도 않았다. ‘하만’은 이에 분개하여 ‘모르드개’를 비롯한 모든 유대인을 멸족시켜버리려는 음모를 진행시킨다.

모르드개가 딸처럼 키운 ‘에스더’라는 유대 처녀는 강제적으로 후궁을 차출하는 바벨론 왕국의 횡포로 왕궁에 들어가 있었지만, 후궁으로서 왕에게 간택되기 위해서는 1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법으로 정하고 있는 왕국의 규율 때문에 모르드개로부터 하만의 엄청난 음모를 듣고서도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는 후궁이 제 마음대로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오랜 고민 끝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당신과 모든 유대민족은 나를 위해 삼일밤낮으로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한 후, 결연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정녕, 죽으면 죽으리라”

다음 날 그녀는 예복을 갖춘 후 왕이 기거하는 궁으로 향하고, 왕의 부름이 없는 후궁이 왕에게 나서는 것은 왕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이었음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 에스더를 본 아하수에로 왕은 그녀에게 금홀을 내밀어 그녀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하고 그녀를 받아들이고, 에스더의 소원대로 유대를 멸족시키려는 하만의 음모를 중지시킨다.


<2>

지난 번 필자의 글을 통해 잠시 밝힌 바처럼, 정몽준 진영의 몰염치하고 무리한 단일화를 여론조사 제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노무현 후보가 말했던 ‘아이가 솔로몬 왕의 재판 아래 놓여있다’는 긴박한 발언의 결과는 어젯밤의 극적인 승리로 반전이 되어 나타났다. 그는 재판의 칼 아래 놓여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던 것이지만, 그 이면엔 유권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바로 지혜의 왕 솔로몬이다. 지혜롭게 판정하라’라는 요구가 놓여 있었던 셈이다. 결과론적이지만, 유권자들은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결심을 보인 노무현을 ‘진짜 엄마’라고 판정을 내려준 셈이다.

우리는 흔히 ‘죽기를 각오하면 안 되는 게 없다’라는 격언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죽기를 각오할 만큼 중대한 일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조차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기 않은 이유로 그 ‘상식적인 격언’은 한낱 피상적인 ‘수사’로 머무르고 만다. 실제 그런 경우는 고작해야 <상도>와 같은 드라마를 통해서나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노무현이 보여준 승부를 두고, 우리는 흔히 ‘벼랑끝 승부’라고 표현한다. 일견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벼랑끝 승부’라는 것은 승부사의 ‘의도’가 들어 있을 경우에나 맞는 말이지 의도와 상관없이 벼랑끝으로 몰려가는 승부의 경우에는 말이 다르다. 예컨대 ‘벼랑끝 승부’의 가장 비근한 예는 지난 92년 3당 합당으로 민자당 대통령 후보직을 얻어내기 위해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부산으로 내려가버린 김영삼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김영삼이 벌렸던 ‘벼랑끝 승부’는 자신을 벼랑끝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벼랑끝으로 몰아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올해가 시작되면서 그 누구도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 예견하지 못했다. DJ정부 이전에 그는 소신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긴 했지만 군소 야당 의원이었고 한때는 원외를 떠돌기도 했으며 DJ정부 들어서는 종로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다시 입성했지만 지역주의 정치 타파를 위해 손쉬운 자리를 내 버리고 정치적 고향이지만 그를 배척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쓴 패배를 맛보기도 했다. 행정과 관련된 그의 경력은 1년이 채 못되는 해양수산부 장관직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보를 두고 ‘벼랑끝 승부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에게 ‘벼랑끝 승부사’라는 별명(사실 이것은 별명이 아니라 ‘딱지’다)을 붙여주기 위해서는, 오늘에 이르기 위한 지금까지의 그의 정치적 행적에 그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임을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기실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따라 살고죽는 일만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국민경선이라는 축제를 통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에 오른 그에게 본격적인 정치적인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의 정치적인 시련의 출발점에 그의 정치적인 신념과 소신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적이 한나라당이 아니라 우군이라고 여기고 있던 민주당 내에 있다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그의 정치적인 신념과 소신이 해석이 난해하거나 실행이 불가능할 만큼 이상적이거나 도덕철학으로 무장된 것도 아니고, 대부분 상식과 원칙에 기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같이 할 동지라고 여겼던 민주당 내에서조차 거부되었던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국민경선에서 패한 이인제과 그 계파의 경선불복종, 자기가 아니면 판을 엎어버리겠다는 이인제식 폭로 정치 행태로 인해 받은 상처, DJ아들들의 비리로 인한 구속, 월드컵 인기를 기반으로 한 정몽준 후보의 등장과 더불어 동교동계가 중심이 된 이른바 ‘후단협’의 파렴치한 노무현 발목잡기.. 그리고 김민새(나는 제정신이 붙어 있는 한 이 인간의 이름을 내 입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이 개새끼의 이름을 말이다.)의 잔머리 승부 훈수로 빚어진 정몽준 후보의 오락가락 단일화 제안에서 비롯된 불리한 조건의 여론조사 제안까지.

제정신을 갖고 이런 정치적 역경들을 통과하는 게 가능했을까. 이 모든 일들이 불과 8개월 사이에 일어난다는 게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3>

노무현, 그가 정몽준 후보의 최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 민주당 내의 그의 측근들은 오히려 ‘단일화 판을 깨자’고 했었다고 한다. 동시에 언론에 보도된 바로는 김민새(이 개새끼)가 “인간의 머리속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정몽준 후보가 밀리는 결과가 나오면 결과에 불복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합의문에 끼워넣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 후보를 외통수로 몰아붙이는 제안을 해 놓고 결론을 내라는 협박을 한 셈이다. 사실상 노무현 후보를 벼랑끝으로 몰아넣고 ‘칼을 내려놓던지, 아니면 뛰어내리던지 하라’라는 요구를 한 셈이다.

벼랑끝에 몰린 노무현 후보가 솔로몬의 재판정에 놓여 있는 ‘아이’를 예로 들면서 정 후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이인제가 경선 결과 깨끗하게 승복을 하고 그를 도왔었다면, DJ의 아들들이 말도안되는 비리혐의로 구속이 되지 않았었다면, 동교동계가 후단협을 결성하지 않고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더라면, 월드컵과 정몽준 후보가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었다면, 설령 그렇더라도 정 후보가 국민경선이라는 노후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또 한번의 국민경선을 치뤘었다면 등등.. 그의 목숨줄을 죄어 오던 이런 현실들이 없었더만, 그는 좀 더 손쉬운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은, 가정법을 통해 시간을 되돌리는 어리석은 망상을 단 한줄기도 허용치 않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정녕, 죽으면 죽으리라”..

그는,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달려드는 현실의 칼날 앞에 죽기를 각오한 결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결단을 내렸다. 유권자인 국민들이 그가 아니라 정몽준 후보를 원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런 결정을 내려준 국민을 존중할 각오를 한 것이다. ‘넌 이번에 죽어라’라는 국민의 명령에 승복할 각오를 그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신’에게 의탁했던 에스더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스스로 내린 결심에 안도하고 평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 후보의 제안을 받아들인 직후 시작한 후보단일화를 위한 TV토론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특유의 공격적이고 집요하면서도 논리적인 토론방식을 배제시키고 차분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논리를 동원하는 선에서만 토론회를 진행시켰다. 한번의 TV토론으로 전세를 뒤집기 위한 정 후보의 공세는 거세게 진행되었지만, 정 후보의 공세가 이미 예전에 지적되고 제기되었던 것에 머물렀던 만큼 재차 확인해 주는 선에서 정 후보의 공세를 방어했다.

TV토론에서 노 후보가 보여준 것은, ‘자신의 운명은 자기 손에 있지 아니하다’라는 것이었다. 지난 2000년 4.13 총선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이후 그의 운명은 사실상 그의 손을 이미 떠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운명에 관한 그의 ‘인식’이 그의 마음을 평정상태로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그가 자신의 운명이 다 한 것을 알고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라는 것을 인정했을 때, 국민들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무릎에 묻어 있는 흙을 털어 주면서 ‘다시 앞을 향해 발걸음을 떼 놓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미 그의 운명은 그의 손을 떠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의 운명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일까.

바로 당신이다.


시민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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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덧글을 붙이는 것은 내 ‘글쓰기’의 원칙이 아니다. 그러나 부득이한 사족 한마디를 위해 덧글을 단다. 너그러운 양해 바란다.

‘정치는 치열하면서도 냉엄한 현실’이라는 상식을 놓고 보자면 그는 정치인으로서 대단히 비현실적인 길을 걸어왔다. 그의 ‘비현실적 정치 행보’는 이번 대선을 통해 국민들을 통해 ‘심판(이건 가치 중립적인 표현이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올 한해 우리가 목격했던 바와 같이 국민들은 그의 ‘비현실적인 정치행보’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 하나의 ‘신화’를 만들고 있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신화’의 이름은 바로 ‘유권자 명예혁명’이다. 어제 노무현을 ‘심판’하는 유권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번 대선의 길이 보다 명확해졌다. 지금은 ‘혁명’전야이고, 모든 유권자들은 혁명이 시작될 신새벽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모두가 ‘명예혁명’이 성공하는 기쁨을 만끽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서, 어떤 기다림이 이렇게 기쁘고 가슴설레는 일은 처음이다. 내 아내가 들으면 몹시 서운하겠지만, 나는 예전에 그녀의 집앞 가로수 뒤에 숨어 그녀에게 장미꽃 다발을 전해 줄 순간을 위해 그녀가 가로등 아래로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그 때보다 더한 설레임으로 ‘유권자 명예혁명’의 신새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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