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문제해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김구라)
주어진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신해철)
상부구조를 친다는 것, 신과 일대일에 직면한다는 것은
결코 답을 찾는다는 태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도리어 우리에게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답을 찾으려는 태도에 있음을
이 영상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제의 답은 무엇일까?'란 질문은 거꾸로 뒤집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 문제에 답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답이 당신이 생각한 답과 틀리다면 어떨까요?
글쎄요. 아마도 대개는 내가 틀렸구나 생각하고 말겠죠.
혹은 영상 속 김구라처럼 문제의 편에 서서 애써 자신의 오판을
감추기도 하죠.
근데 말이죠.
내가 아닌 문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의문을 이내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틀렸다면 귀찮아지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가 틀렸는지 근거를 대야하고,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따져야 하고, 그러다가 부모님도 불러와야 하고, 게다가
잘못하면 반 아이들에게 잘못 알려져 잘난체 한다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포기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틀린 거야.
다행히 대개는 문제가 맞습니다. 대략 98%는 말입니다.
요즘 세상이 워낙 좋아지고 과학도 발달해서 99%는
문제가 맞으니 내 포기가 그리 불합리한 일만은 아니겠죠.
내가 맞을 확률은 1%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근데 99%, 1% 하니까 누군가 막.. 막.. 떠오르네요.
그.. 그건 바로
그리고 구조론에서 눈팅하셨던 분들은 다들 아실 겁니다.
이 말은
1%의 영감이 없다면 99%의 노력을 한다해도 천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1%의 영감이
저는 내가 맞고 문제가 틀릴 그 희박한 확률 1%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 문제의 답은 뭐지?"라는 합리적인 의문이 아니라
"왜 이 문제가 문제라는 거지?" 라는 비합리적인 의문이
영감에 가깝고, 1%에 가깝고, 이상에 가깝고, 진보에 가까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라는 거죠.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란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움직이고
또한 세상의 가치있는 것들은 귀하고 희소한 법이죠.
그런데 왜 우리는 희소한 의문에 대해서는 그리도 배타적인
걸까요?
도리어 희소한 의문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건
아닐까요?
결국 1%란 말은 소수자를 뜻하는 단위가 아니라
소중한 가치를 뜻하는 단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그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임에 동의합니다. 사유하는 시인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