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805 vote 0 2003.05.30 (16:36:27)

자동차에 비유해 보기로 하자. 다윈의 진화론은 자동차의 바퀴를 설명한 것과 있다. 확실히 자동차에 있어서 바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동차를 이해함에 있어서 반드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바퀴가 아니라 엔진일 수도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다분히 확률에 의거하고 있다. 그 확률을 담보하는 것은 충분한 『경우의 수』다.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확률을 담보할 만큼 충분한 경우의 수가 발견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포유류 동물에 있어서 진화를 가능케 하는 각종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을 낳는 경우의 수는 인체의 각종 기관과 조직, 신경계, 내분비계, 혈관계, 본능 등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게놈 유전자지도가 밝혀지면서 알게 된 것은 그 충분한 경우의 수가 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유전자의 숫자가 예상에 비해 훨씬 더 적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유전자의 숫자가 예상보다 적은 것일까?

예컨대 동물은 암컷과 수컷으로 나누어진다. 암컷과 수컷은 각각 정자와 난자를 생산하며 이 둘의 수정에 의해 자손을 번식시킨다. 극소수의 단성생식을 제외하고 본다면 여기서 예외는 거의 없다.

여기서 확률을 담보하는 충분한 경우의 수라는 것은 예컨대 그 성별의 숫자가 암컷과 수컷 둘이 아니라 한 1백개 혹은 10만개쯤 되는 경우를 상정해 보는 것이다.

왜 동물과 식물은 100만개쯤 되는 성별을 가지고 있지 않고 암수 단 둘 뿐일까?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포유류 동물은 어미의 자궁 속에서 조상의 진화과정을 그대로 반복한다. 즉 모든 포유류 동물의 조상이 되는 최초의 생물이 암/수 둘 뿐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계속 암수 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동식물은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 교환이라는 단 한가지 생식방법을 사용하여 자손을 퍼뜨리고 있다. 극히 일부 동식물의 단성생식을 제외하고 예외는 거의 없다.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어미의 자궁 안에서 동물의 성장은 조상의 진화과정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 조상에 있어서는 확률을 담보할 만큼 충분한 경우의 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 충분한 경우의 수를 낳는 인체의 각종 기관과 조직, 내분비계, 신경계 따위가 그 조상의 진화단계에 있어서는 원초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생물의 조상이 할 박테리아나 원생동물은 신체 내부에 복잡한 조직이나 기관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충분한 경우의 수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다양한 변이의 가능성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바이러스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포유류 동물에게나 있는 팔과 다리와 심장이 생겨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동물은 최초의 단순한 구조에서 점점 복잡한 구조로 진화해 왔다. 처음은 단순한 구조였기 때문에 충분한 경우의 수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 신체구조가 복잡해졌지만 최초의 단순한 구조였을 때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성별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충분한 경우의 수가 없이 단지 암컷과 수컷만 있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변이로 설명되고 변이는 확률적으로 일어난다. 포유류 동물의 몸통을 이루는 기관과 조직의 숫자는 매우 많다. 이는 100만개의 면을 가진 주사위에 비유될 수 있다. 충분한 확률이 있다.

그러나 5억년전 인간의 조상이었던 원생동물이 처음 암컷과 수컷으로 나누어지는 단계에서는 암/수 단 2면 밖에 가지지 못한 주사위와 같다. 2면을 가진 주사위를 던지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둘 뿐이다. 변이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감나무 밑에 누워서 입 속으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1만개의 감이 있다면 그 1만개의 감 중 하나가 내 입에 떨어질 확률은 매우 높다. 그러나 단 2개의 감 밖에 없다면 그 2개의 감 중 하나가 내 입에 떨어질 확률은 매우 낮다.

다윈의 진화론은 포유류 동물의 신체를 관찰하면서 그 내부의 다양한 기관과 조직을 보고 100만개의 면을 가진 주사위를 연상했다. 충분한 변이의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여기에 착오가 있다. 게놈유전자지도를 밝혀내고 보니 실은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에 있어서도 그 주사위의 면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었던 것이다.

문제는 모듈의 원리다. 모듈은 하나의 시스템이 단계적인 집적과정을 거쳐서 점차 복잡해지는 원리이다. 즉 100만개의 조직과 기관을 가진 동물이 1백만개의 경우의 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몇 개의 지극히 단순한 모듈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듈의 원리는 컴퓨터에 비유하여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컴퓨터는 무수하게 많은 숫자의 파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파일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낱낱의 파일들은 몇 개의 폴더로 통합된다. 그 폴더들은 다시 상위폴더로 통합된다. 파일들은 프로그램에 들어있고 그 프로그램들은 다시 OS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피라밋구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OS>프로그램>상위폴더>하위폴더>파일>정보로 내려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경우의 수를 증가시킨다. 반대로 1바이트의 정보>파일>폴더>프로그램>OS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경우의 수가 즐어든다.

이러한 모듈의 원리를 진화과정에 접목시켜 보면 게놈유전자지도가 왜 예상보다 적은 숫자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드러난다. 고등동물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가지 특징들이 유전인자 단위로 볼 때는 하등동물에서 이미 그 잠재적 요소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갈라파고스 군도의 핀치새는 갈라파고스로 옮겨가기 전에도 유전인자 차원에서 그러한 잠재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잠재적 인자가 갈라파고스의 특정한 환경에서 격발되어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핀치새의 부리 형태를 결정짓는 경우의 수는 무수하게 많지만 그 잠재적 인자가 되는 유전인자는 더 상위폴더에 존재하며 그 상위폴더의 숫자는 많지 않으므로 경우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모듈의 원리를 적용하면 진화는 우연에 의해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게놈유전자 단위로 진화를 촉발하는 진화의 인자가 있고 그 인자가 특별한 환경에서 방아쇠 역할을 하는 무언가의 영향을 받아 그 잠재된 인자가 겉으로 표현되는 형태로 일어난다.

여기서 그 잠재된 인자는 고등동물로 진화하기 훨씬 이전의 하등동물 단계부터 잠복해 있어왔다. 그러므로 고등동물의 많은 장기와 기관과 조직을 들어 경우의 수를 산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컴퓨터에 1만개의 파일이 있다고 해서 1만개의 경우의 수가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 1만개의 파일은 다시 1천개의 폴더에, 그 1천개의 폴더는 다시 1백개의 프로그램에, 그 1백개의 프로그램은 다시 10개의 상위폴더에 포함되어 있다.

진화는 그 폴더와 상위폴더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확률을 낳는 경우의 수는 매우 적어진다. 모든 포유류 동물이 암컷 아니면 수컷으로 단 두가지 경우의 수를 가지듯이, 경우의 수는 매우 적으므로 생물의 진화를 확률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개들의 생태를 관찰한 학자의 보고에 따르면, 개들도 사람처럼 체면에 매우 신경을 쓴다. 개들이 체면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무리 안에서 자신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이다. 체면을 깎이면 서열이 바뀌어지고 이는 무리를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는 개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개 뿐만이 아니라 많은 종류의 포유류 동물들은 몸집의 크기로 서열을 정한다. 영양무리에 속하는 어떤 종은 두 마리의 수컷이 나란히 걸으며 몸집크기를 비교해보고 서열을 정한다.

요는 몸집을 비교하여 서열을 정하는 행동이 포유류 단계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고기들도 몸집의 크기를 비교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종이 있다. 즉 고등동물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실은 하등동물 단계에서부터 유전인자 차원에서는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변이로 설명되고 변이는 확률로 설명된다. 확률은 경우의 수를 필요로 하고 경우의 수는 인체의 다양한 장기와, 기관과, 조직들의 숫자이다. 그 숫자가 매우 많으므로 충분한 확률이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모듈의 원리에 의해 그 조직과 기관들은 더 상위폴더에 소속되고 진화는 그 상위폴더 단계에서 일어나므로 경우의 수는 매우 줄어들고 따라서 확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 다윈의 진화론 - 여러 종류의 기린이 있었는데 그 중 목이 긴 기린이 살아남았다.

● 모듈의 원리 - 기린의 긴 목과, 그 목을 지탱할 수 있는 목의 근육과, 그 길어진 목을 사용하게 하는 본능과, 그 길어진 목과 균형이 맞는 적절한 길이의 다리를 만드는 유전인자가 모여서 하나의 모듈을 이루고 있으며, 그 모듈이 전체적으로 진화했고, 그 모듈은 기린보다 훨씬 더 하등동물 단계에서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환경의 영향을 받아 잠재된 유전인자에 격발이 이루어져서 그 잠재된 인자가 표면화되는 형태로 진화가 이루어졌다. 기린의 목이 길어지는 원리와 코끼리의 코가 길어지는 원리는 동일한 모듈에 속한다.

이 모듈의 원리를 적용하면 육상에서 생활하던 어떤 포유류 동물이 바다로 들어가서 고래와 물개와 바다사자로 각각 진화한 것이 아니라 공룡시절부터 있었던 어룡의 유전인자가 포유류 동물로 진화한 단계에서 잠복되어 있다가 고래와 물개와 바다사자와 매너티와 해달로 갈라져서 각각 별도의 경로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어룡은 공룡의 일종인데 고래처럼 수중생활을 했다. 어룡이 고래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포유류가 처음 바다로 들어갔는데 우연히 어룡과 비슷해진 것도 아니다. 모든 포유류의 유전인자에는 어룡이나 고래처럼 바다생활에 적절한 형태로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유전인자가 잠복해 있다. 그 유전인자는 파충류인 어룡보다 훨씬 이전 곧 양서류 단계에 이미 생겨나 있었다.

양서류 단계에서 이미 존재했던 어떤 인자가 모듈의 형태로 잠복되어 있다가 공룡단계에서 격발된 것이 어룡이며, 이와 무관하게 포유류 단계에서 격발된 것이 고래와 매너티와 물개와 해달이다.

많은 종류의 공룡들이 비슷한 형태의 특정한 포유류 동물과 외관상 닮은 점이 있거나 또 유대류에 속하는 호주와 뉴질랜드에만 있는 몇몇 동물들이 구대륙의 포유류 동물과 닮은 이유나, 오리너구리의 부리가 오리를 닮은 것도 이와 같이 모듈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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