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104 vote 0 2002.09.10 (11:55:01)

모든 예측은 빗나가기 위해 존재한다. 필요한 것은 점장이의 쪽집게 예언이 아니라, 전문가의 과학적인 분석이다. 이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알아맞히기 위함이 아니라, 예측은 빗나가더라도 대강의 큰 흐름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그동안 축구계의 큰 화두는 포메이션이었다. 포메이션은 처음 풀백 두 명을 두는 2-3-5에서 출발해 스토퍼시스템, 리베로시스템, 토털사커 등으로 발전해 왔다. 월드컵에서 어느 나라가 우승하는가는 어느 나라가 새로운 수비포메이션을 선보이느냐로 결정된다.

포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수비개념이다. 우선 수비를 튼튼히 한 다음에 한 명의 스트라이커가 골을 뽑아주면 이기는 것이 축구다. 정 안되면 승부차기가 기다리고 있고.

한국축구의 한계는 수비력의 한계였다. 수비가 안되다보니 일단 홍명보를 뒤로 뺀다. 홍명보가 뒤로 빠지니 미드필드에서부터 밀린다. 그래도 미드필드가 약한 아시아에서는 이 방법이 통했는데 유럽에서는 안통한다.

2002한일월드컵에서 발견되는 신조류는, 이러한 포메이션 개념이 일정한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피버노바의 위력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골이 많이 나오면서, 수비위주의 축구가 한계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은 다시 공격력이다.

또 하나의 화두는 조직력 위주의 유럽이냐 아니면, 개인기 위주의 남미축구냐다. 그동안 월드컵은 유럽과 남미를 왔다갔다 했다. 홈 어드밴티지를 살려 개최국이 있는 대륙으로 우승컵이 옮겨가곤 한다. 그러다가 최근 10여년은 남미축구가 한풀 꺾이면서, 유럽이 싹쓸이하는 분위기로 가곤했다.

2002한일월드컵의 의미는 프랑스의 저조와 함께, 유럽의 싹쓸이 분위기가 한 풀 꺾이고, 피버노바의 위력을 살려, 남미축구가 다시한번 부활하는 날개짓으로 보여진다는 점이다. 일단 현재스코어로 그러하다. 프랑스가 다시 살아날지 알 수 없지만.

이 쯤하고 법칙들을 보자.

법칙 1)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법칙 - 왜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없을까? 큰 경기일수록 수비를 강화한다. 세기의 대결에는 골이 많이 터지지 않는다. 본질에서 승부는 수비 후 공격이다. 야구도 일단은 투수놀음이다.

홈런타자들이 하위팀을 상대로 골은 잘 넣지만, 강팀과의 대결은 결국 투수력이다. 그러므로 조직력 대 개인기를 단순비교하면, 하위팀과의 경기에서는 개인기가 빛을 발하지만, 강팀과의 대결에서는 조직력이 빛을 발함을 알 수 있다.

결국 화려한 개인기, 빛나는 득점력이라는 것은 예선용임을 알 수 있다. 세계축구는 점점 평준화하고 있다. 다른 요소들이 대등할 때는 조직력이 개인기 보다 한 수 위다.

법칙 2) 체력>조직력>개인기>스피드>정신력의 순서로 승부가 결정된다. 많이 뛰는 현대축구는 일단 체력이 앞선 팀이 이긴다. 체력이 있어야 조직력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력이 대등하면 조직력이, 조직력이 대등하면 개인기가, 개인기가 대등하면 스피드가, 스피드가 대등하면 정신력(경기경험)이 앞선 팀이 이긴다.

이러한 원리들을 적용해서 2002한일월드컵을 분석해보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평준화현상이다. 사우디와 중국, 폴란드가 많은 골을 먹었지만, 그래도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골을 많이 먹는 이유는, 한 번 조직력에서 밀리면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한국도 98년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5골을 먹고 3차전에서 벨기에와 1: 1로 비긴 적이 있다. 폴란드가 포르투칼에 4골을 먹고 무너졌지만, 다음 미국전에서는 이미 탈락했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무심축구를 하면 혹시 이길 지도 모른다.

공은 둥글므로 해봐야 안다. 그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다.

대등해진 이유는 수비포메이션의 연구가 일정한 한계에 달해서,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뭔가가 나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선진축구'라는 것이 없어졌다. 물론 중국과 사우디는 후진축구를 하고 있지만 이는 예외로 봐야하고.

고로 이번 2002한일월드컵의 의미는 토털사커니 리베로시스템이니 442포메이션이니 하는 새로운 전술 보다는, 아프리카아 아시아의 퓨전축구 강세, 남미축구의 재조명, 한국과 일본의 스피드, 이런 쪽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체력>조직력>개인기>스피드>정신력의 승부를 결정하는 요소들에서 1순위 체력과, 2순위 조직력에서의 향상이 세계적으로 평준화되었으므로, 3순위 개인기와 4순위 스피드에서 승부가 결정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특정 경기에서의 승패는 두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는 실력이고 둘째는 궁합이다. 팀간의 경기스타일에 따른 궁합이 있다. 한국과 미국은 궁합이 잘 맞지 않아, 예측하기 힘든 경기였다. 실력이 골로 반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궁합이란 무엇인가? 반은 전략이고 반은 징크스다. 98년의 경우를 보자. 이기는 경기를 할 것인가 안지는 경기를 할 것인가? 98년 일본은 이기는 경기보다는 안지는 경기를 했다. 그 결과 한국처럼 대패하지는 않았지만 3패를 하고 말았다.

일본의 안지는 경기>1점차로 전패한다.
한국의 이기는 경기>대패하거나 비긴다.

이것이 실력없는 팀의 운명이다. 98년의 한국은 94년의 한국보다 더 향상된 팀이었다. 그러나 98년 한국은 이기는 경기를 택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5 : 0으로 깨졌다. 실력이 안되는 팀이 억지로 이기려 하면 코피터진다. 94년은 안지는 경기를 택했기 때문에 그나마 선전했다. 결과는 94년이 낫지만 실질적으로는 98년이 더 향상된 실력이었다. 이걸 알아야 한다.

대신 처녀출전한 일본은 어차피 16강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기기 보다는 안지려고 했다. 그 결과 전패했다. 대신 한국처럼 개망신은 당하지 않았다. 그러면 뭐해? 승점도 한 점 못올렸는데?

폴란드가 포르투칼에 4 : 0으로 진 것은 실력이 꽝이라서가 아니라, 첫 번째 한국과의 경기에서 이미 졌기 때문에, 16강을 위하여 필승전략으로 나간 때문이다. 한국이 98년 첫 경기를 멕시코에 1 :3으로 지고, 2차전 필승을 노리다가 대패한 것과 같다.

3차전은 어차피 탈락했으므로 무심축구를 해서 비겼다. 폴란드도 탈락이 확정되었으므로 어깨에 힘을 빼면 미국을 잡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미국이 16강에 대한 집착이 없어서 원래부터 무심축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연봉을 올리는게 목적이다.

어제 한미전을 분석해 보자. 숙명적으로 적은 점수차가 날 것으로 내다보았다. 1 : 0 승리쯤. 물론 예측은 늘 빗나가지만 큰 흐름은 대충 맞았다.

미국은 1차전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기는 경기보다는 안지는 경기를 했다. 이 경우 대패하지도 대승하지도 않는다. 약팀이 강팀을 이기려고 하면 대패하지만, 안지려고 하면 비기거나 1점차 패배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말하자면 14일 포르투칼 전에서, 한국이 설사 포르투칼에 전력이 뒤진다고 해도, 안지는 경기로 가면 비길 수는 있다는 뜻이다. 강팀이 골이 안터져 약팀과 비기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강팀이 많은 골을 넣는 경우는, 약팀이 주제넘게 이기려고 덤볐을 때이다.

또 하나 어제 한국은 정신력에서 졌다. 결국 상대가 오노의 미국이라는 부담을 떨치지 못했다. 오노가 문제였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집념이, 어제같은 2차전의 애매한 상황에서는 손실이다. 반면 미국은 1차전에 이겨 여유가 있었다. 미국은 무심축구를 했다.

어제 한국은 미국을 이겼어야 했다. 미국이라는 부담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영원히 한국은 미국 앞에서 주눅들 수 밖에 없다. 징크스를 만들어서 안된다. 자기도 모르게 한 수 져주고 시작한다. 상대가 미국이 아니었다면 3 : 1 이상으로 충분히 이겼을 것이다.

'미국' 그 이름만으로 심리적으로 꼬인다. 콤플렉스란 말의 의미는 뭔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반드시 이긴다는 집념도 지나치면 콤플렉스다. 그런데 이 징크스는 일본처럼 이겨본 경험이 여러번 있을 때는, 반드시 이기는 방향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기는 것도 습관이다. 우리가 일본은 늘 이겨보았으므로 당연히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스코어로 이기는 징크스에 도달하지 못했다. 일본만 만나면 이기듯이 미국만 만나면 이기는 징크스를 어제 만들어야 했다.

상대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나라라면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 그러나 뭔가 인연이 있는 나라이면 반드시 징크스가 생긴다. 이기는 징크스가 아니면, 꼬이는 징크스다. 어제 선전하고 비기므로서 꼬이는 징크스가 생겨버린 것이다.

체력>조직력>개인기>스피드>정신력의 요소들이 있다. 여기서 체력>조직력>개인기>스피드>의 요소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남은 것은 정신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실은 정신력의 요소 뿐이다. 정신력의 반은 징크스고 반은 팀 간의 궁합이다.

징크스는 일본이나 미국처럼 특수관계가 있는 나라에는 반드시 생긴다. 영국이 아르헨티나에 오랫동안 져온 것도 그러한 징크스의 일종이다. 영국은 베컴의 패널티킥으로 그 징크스에서 탈출했다. 궁합은 상대와 우리의 16강 진출 경우의 수에 따른 전략의 변수에서 생겨난다.

물론 정신력은 위 요소들 중 최하위의 요소다. 즉 다른 것에서 승부가 결정되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정신력이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정신력은 첫째가 경기경험, 두 번째는 상대팀과의 징크스, 셋째는 앞선경기의 결과가 미치는 영향 곧 16강 경우의 수다. 물론 홈경기의 이점도 정신력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흔히 정신력을 '필승의 집념'으로 착각하는데, 경기경험도 없으면서 집념으로 이기는 경우는 없다. 집념은 오히려 콤플렉스의 일종이다. 필승의 집념이 필패의 징크스를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마음을 비우고 무심축구를 해야한다.

일단 포르투칼은 정신력에서 불리하다. 그들은 필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기기만 해도 된다. 한미전에서 한국의 정신력이 밀린 것은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싸웠기 때문이다. 미국은 무심축구였다. 폴란드가 대패한 것도 더 많은 부담을 졌기 때문이다.

많은 팀들이 두 번째 경기에서 골이 적게 터지는 이유는, 1차전에서 대강의 향배가 결정되어 전략적인 잔머리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양팀이 다 잔머리를 굴리므로 경기가 꼬여서 대승도 대패도 안된다. 또 세 번째가 남아 있으므로 2차전은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3차전이다. 총력전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생쥐가 고양이를 만나면 겁을 집어먹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생쥐도 무심해진다. 고양이를 문다. 어떤 한계상황을 넘으면, 심리적 압박에서 해방된다. 어제 한국은 부담감에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포르투칼과의 3차전은 부담없이 싸울 것으로 본다. 퇴로가 없으니까.

행운을 기대하지 말고, 상대방의 실축을 기대하지 말고, 실력대로만 싸우면 이길 수 있다. 실력에서 앞서니까. 왜? 승부의 요소는 체력>조직력>개인기>스피드>정신력의 다섯 뿐, 체력에서 밀리지 안고, 조직력에서 이제 세계축구와 대등해졌고, 개인기에서 밀리지 않으면 스피드와 정신력에서 우리가 앞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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