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620 vote 0 2002.09.10 (11:57:43)

어떤 일을 계기로 연변관련 사이트를 몇군데 방문했습니다. 연변사람들에게는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순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서울에서 순수를 찾기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격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 순수하다는건 무엇일까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은 도박에서 유리한 패를 손에 든 사람의 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손에 든 패는 꽁꽁 감추고 상대방의 패는 알아내려고 온갖 머리를 쓰지요. 그래서 상대방이 마침내 자기의 패를 순순히 공개하면 볼것없다는 듯이 떠나버립니다.

그것은 데이트하는 연인의 심리와 같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스스로 자기의 진실을 감추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시시콜콜 알아내려고 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면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떠나는 거죠.

굳이 비유로 말한다면, 남자는 여성에게 몸을 허락하기를 요구하고 여성이 몸을 허락하면 비난하고 떠납니다. 쉽게 몸을 허락하는 하찮은 여자라 이거죠.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현재 당장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를 따지고 들지요. 미래를 위한 모험적인 투자는 없습니다. 언제 배신하고 떠날지 모르니까 있을 때 챙기자는 약은 전술.

그러므로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거죠. 이건 피곤한 겁니다. 서울에서는 이미 진정한 로맨스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삭막해졌지요. 어쩌면 오히려 그것이 좋은 건지도 모릅니다. 닳고 닳은 서울사람들에게는. 그게 더 어울리는 거죠.

사랑? 로맨스? 서울사람에게는 당치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사랑을 말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기어이 로맨스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가 왔습니다. 남은 것은 손해보지 않는 장사지요.

그러나 아직도 순수함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월드컵에서 조국 프랑스를 등지고 세네갈팀을 맡아 조국 프랑스를 격파하고 세네갈을 8강에 올려놓은 '브루노 메추' 감독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도박에서 유리한 패를 들지 않은 것입니다. 고로 단 한번의 주어진 기회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물론 히딩크감독이 보기에는 연봉을 몇십억씩 받는 유럽의 스타들보다 한국선수들이 순수한 거지요.

한국 선수들은 최소한 흥정하려 들지는 않으니까요. 흥정거리를 내세워서 감독을 길들이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닳고 닳은 서울사람들은, 자신이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어서, 자신의 손 안에 꽁꽁 감춘 그 패가 언젠가 자신에게 큰 이익이라도 줄 것으로 믿고, 이사람과 저사람을 저울질 해보곤 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시효가 지나면 그 패는 쓸모없게 됩니다.

연변에는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습니다. 자신의 패는 꽁꽁 감추고 언제나 상대방이 먼저 패를 공개하기를 요구하고 상대방이 먼저 패를 공개하면 비난하고 떠나는 그런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드물게는 서울에도 괴짜같은 순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순수한 사람은 괴짜로 통합니다. 워낙 없으니까.

초장부터 자기의 모든 패를 공개하고, 진실을 위해서 남김없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된 사람, 저울질 하지 않고, 떠보지 않고, 감추지 않고, 흥정하지 않고, 마지막 결정은 신에게 맡기고, 전부 아니면 전무를 향해, 마구 달려가는 그러한 사람!

순수 -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순수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게 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만의 하나 그것이 성공한다면, 드라마가 되고 영웅담이 되고 전설이 되는 거지요. 하나의 만남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모든 이루어진 일들은 하나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남 - 그것은 가능성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모든 씨앗에서 싹이 터주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싹도 나지 않을 것이고, 더러는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을 것이고, 더러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씨앗을 뿌리지 않고 수확에 성공한 농부는 없습니다. 모든 만남이 결실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만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먼 미래를 위해, 조금씩 행운의 확률을 높여놓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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