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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와 후세인 문명시대의 부족민들

“돼지잡는 날이면.. 돼지를 묶을 때부터 고기를 나눌 때 까지 사사건건 참견하며 입으로만 감놔라, 배놔라, 틀렸다, 그렇게 하면 되간디, 거긴 아니여.. 뒷짐지고 호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서서 칼질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일하는 사람의 부아를 돋우고 약을 올리는 이가 한두 분쯤 어느 마을에든 있다.”

“돼지 잡는 일뿐 아니라 동네 길가에 난 풀을 베거나 동네 앞길 청소할 때, 동네 징검다리 손볼 때, 아무튼 자기 일이 아닌 동네의 공동부역이 있을 때.. 반듯하게 서서 빗자루만 들고 왔다갔다 하거나 낫들고 풀 한주먹 베어들고 그 풀을 끝까지 들고 다니면서 자기가 가장 동네를 생각하는 것처럼 입으로만 온갖 일을 참견하고 걱정하는 분들이 동네마다 있기 마련이다.”

“그런 분이 진메에도 있다 아직 생존해 있다.” (어이쿠! 이거 이래놓고 수습이 되려나. 섬진강 김용택 시인의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뒤에 있다’를... 읽다말고.. 이쯤 되면 책갈피를 끼워놓은 채 커피라도 한 잔 타와야 한다.)   

(이 양반이... 아직 생존해 계시는 동네 어른을 욕하고 있잖은가. 전국의 독자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일은 저질러 졌다. 김용택 시인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는 더 지켜볼 밖에..)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잡아 묶을 때 동네 사람들 뒷전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일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간섭하고 시비걸고 찍자붙고 탓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돼지 발목을 그렇게 묶는 것이 아니여, 저울추가 그렇게 밑으로 가면 되간디. 헤리고만 아니 세고만, 물이 안뜨겁고만, 칼이 안드는고만, 그러다가 창자 터지겠다. 나도 술 좀 더 달라...”

“맛있는 데는 자기가 다 먹고.. 자기가 하는 말이 다 옳고.. 자기가 아니었으면 돼지가 살아서 도망을 가기라도 할 것처럼, 자기가 아니었으면 돼지고기가 닭고기로 될 것처럼, 자기가 아니면 돼지곱창이 싱겁고 짜서 못먹을 것처럼, 시종일관 따라다니며 큰소리 치고 비웃는 사람, 그래서 동네 사람들한테 무시 당하고 핀잔받고 욕을 얻어먹는 사람... 그 분이 바로 문계선씨다.” (이렇게 얄궂은 글을 써 놓고는 진메마을 문계선씨 사진을 떠억 하니 실어놓았다.)

“돼지를 잡는 일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다. 칼날이 번득이고 피가 낭자하고 돼지의 몸이 하나하나 해체되는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판에 아무 소리도 없이 숨을 죽이고 피와 칼에 잘리운 돼지의 몸을 보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으스스하다. 그 침묵과 공포의 시간에 죽음을 살려내는 이가 바로 그분인 것이다. 으스스한 죽음의 판을 말로 살려내어 살판으로 만들어내는 분 그분을 나는 마을의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글에 이문열의 이름을 잇대어야 하다니.. 내 팔자야.. 하여간 이문열이라면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이문열의 글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비열한 사기꾼이 있다. 온갖 속임수로 어리석은 추종자들을 속여먹다가 막판에 감옥에 가거나 자살하거나 살해당한다.

● 비열하고 악랄한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이 있다.
● 그는 구세주처럼 행세하고 어리석은 대중은 멋모르고 그를 추종한다.
● 그 사기꾼은 자칭 민주투사, 좌파, 진보, 운동권이다.

이문열 공식이다. 무엇인가? 이문열의 모든 글은.. 비유로 보면 문계선씨에 대한 비난이다. 어린 시절 마을마다 꼭 한사람씩은 있기 마련인 영양 어느 시골마을의 문계선씨에게 조롱 당하고 트라우마에 걸려버린 것일까.  

질서가 있다. 법과 제도가 있다.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감옥에 가야하는 수가 있다. 무질서는 악(惡)이며 질서를 어기는 자는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이문열은 뇌구조는 대략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김용택 시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진메마을의 훼방꾼 문계선씨를 잔뜩 욕해놓고는 갑자기 마을의 예술가라고 추켜세운다. 그는 인생의 역설을 아는 사람이다. 새옹지마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가 똑부러지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김동인의 ‘붉은산’을 연상할 수도 있다. 정익호는 삵으로 불리운다. 진메마을의 문계선씨는 주로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삵은 수준이 다르다. 투전과 싸움과 행패로 날밤을 세운다. 하루도 사고를 치지 않는 날이 없다. 완벽한 마을의 기생충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김용택 시인도 어려서는 문계선씨를 미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분도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동네에서 돼지를 잡을 일이 별로 없고 잡는다 해도 두어 사람뿐이니 그분이 끼여들어 잔소리 할 데가 없는 것이다. 돼지잡는 판이 그분 때문에 쌈판이 되고 칼질을 몇이고 멈추고 칼을 던지며 나가던 왁자하던 일도 이젠 없어졌다. 어찌 보면 돼지잡는 일이 없어진 뒤로 동네는, 진메는 끝이 난지도 모른다.”

“죽음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타고난 솜씨를 가진 ‘마을의 예술가’ 문계선씨”로 하여 김용택시인은 돼지잡는 날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문계선씨가 없었다면 돼지는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처리되었을 것이다. 일은 짧은 시간에 금방 끝났을 것이다. 아이들이 몰려가 구경할 새도 없이 말이다. 김용택 시인의 머리 속 깊은 곳에 돼지잡는 날의 그 풍경이 새겨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판이 아니라 죽은판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쉬다가 이 글을 끝맺는다. 해가 졌다. 산그늘이 서늘하게 온 동네를 덮자 할머니 한 분이 하얀 옷을 입고 뒷짐을 지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강물 흐르는 쪽으로 걷는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그림같이 걷는다. 단순한 고요의 절정이다.”

돼지잡는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흰옷입은 할머니는 또 왜 나와?.. 돼지잡는 날의 시끌벅적한 도떼기판에 느닷없이 푸른 산에 고요의 절정이라고라고라? 진메마을 돼지잡는 이야기와 교사인 김용택 시인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쓴 맺는 글 사이에는 커다란 여백이 있다. 하늘만큼 크고 땅만큼 넓은 여백이다. 이야기도 약간 더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서점을 찾아볼 일이고 필자는 그 하늘만큼 크고 땅만큼 넓은 여백에 가려진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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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졌다. 패배는 예고되어 있었다. 월남전 패배의 교훈이 멀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왜 전쟁을 결정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멍청이니까. 그는 오판한 것이다. 멍청이가 멍청이짓을 한 것이다.

이걸로 이야기를 끝내서 안 된다. 만약 부시의 목적이 석유에 있다면 그는 승리했다. 원하는 석유를 얻었으니까. 네오콘의 목적이 군산복합체의 판촉에 있다면 그들은 성공했다. 무기를 팔았으니까. 그러나 과연 그들은 성공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전쟁이 부시 혼자의 전쟁이 아니다. 네오콘들만의 전쟁이 아니다. 부시가 선동하고 수억 미국 유권자가 동조하였다. 이 전쟁은 미국의 전쟁이다. 부시부자가 전쟁에 들인 수천조의 돈을 제 3세계 지원에 썼다면 미국은 지금 세계의 존경을 받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수지 안맞는 장사를 했다. 실패다.

지나친 부시 때리기, 네오콘 때리기에는 도리어 속임수가 있을 수 있다. 진짜 나쁜건 미국 유권자들이다. 그들이 전쟁이라는 사치를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냉전에서 승리하고 오만해졌다.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승자들은 제후를 소집시켜 놓고 회맹이라는 것을 한다. 뽐 내는 것이다. 냉전의 승자인 미국은 뽐내고 싶었던 것이다. 회맹의 날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승자들이 황소를 잡아 제사를 올리고 제후를 불러모으는데 수천만냥의 돈을 썼다면.. 미국은 대략 1천조원 이상을 투입하여 수십만 이라크인을 제물로 제사 한번 크게 지낸 것이다.

일천년전 아즈텍의 정글 속에서 해마다 있었던 일이 21세기 이 문명시대에 또 반복된 것이다. 왜? 전쟁이야말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니까.

미국이 나쁘지만 그런 미국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역설적으로 부시와 네오콘에 대한 과도한 적의로 나타난다. 친미쓰레기 김민웅이 대표적이다. 프레시안은 네오콘 하나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미국을 변호한다. 우리가 조중동 독자가 더 문제지만 유권자를 적으로 만들어서는 이득이 아니라는 계산에 한 넘만 팬다는 원칙을 적용하여 조선 방사장만 때리듯이 말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이문열은 어릿광대에 불과하다. 이문열 인간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알고보면 그 역시 불쌍한 또라이다. 이문열 수준에서 노는 꼴통들이 더 문제다. 이문열은 그 많은 꼴통들의 대표자로 대신 맞아줘야 한다. 왜? 그는 돈을 벌었으니까 좀 맞아도 된다.

부시와 네오콘이 문제가 아니라.. 21세기가 문제다. 21세기 이 문명이 문제다. 정확히 말하면 근현대사를 주도하고 있는 기독교문명이 대형사고를 친 거다. 기독교 문명 전부를 때려야 하지만 그래서는 겨냥이 막연해져서 메시지의 요점이 잘 전달되지 않을 것이므로.. 핵심요약에 빨간 밑줄을 딱 그어주는 셈으로 타켓을 좁혀서 부시를 때리는 것이다.

이라크에서 미국은 졌다. 기독교문명의 해결방법이 졌다.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 철수한 다음의 대책은 있나? 물론 없다. 일단은 대책없이 철수하는 것이 맞다. 대책없이 철수한 다음에는 대책없이 철수한 죄로 또한 욕을 따따블로 먹어야 한다. 욕을 덜 먹기 위하여 잔대가리를 굴려서 어설프게 대책 따위를 세우고 철수하려다가는 더 큰 죄를 짓게 될 뿐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이런 바보가 진행될 동안 세계의 지성들은 무엇하고 있었나? 필자가 말하려는 바는 부시원숭이가 바보인 것이 아니라 부시 하나도 설득하지 못한 촘스키가 바보라는 거다. 미국의 정신이 패배한 것이다. 미국의 정신을 대표하는 촘스키를 징벌하는 것이 맞다.

이문열이 비판되는 이유는 그가 주제에 감히 한국의 정신을 대표하려 했기 때문이다. 수준이 안되면서 말이다. 무협지 지존답게 삼국지나 팔고 있으면 아무도 그를 나무라지 않는다.   

21세기 이 문명한 시대에.. 지성이 문제다. 지성의 결핍이 문제다. 이 세계에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지성이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지식인들은 여전히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 어디인지 끝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다. 지금 60억 인류가 가는 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들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섣불리 계몽하려고 한다. 무리가 큰 흐름을 이루어 나아간다. 가끔 길 밖으로 삐져나가는 어린 양들이 있다. 이문열 부시들은 그 어린 양이 못된 사탄의 꾀임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탄을 찾아 눈알을 부라린다.

반면 김동인은 삵을 옹호한다. ‘붉은 산’에서 삵은 그 무리에서 빠져나간 즉 도시의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김용택 시인 역시 다르게 생각한다. 그 무리에서 송곳처럼 삐져나온 문계선씨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주장한다.

하기사 김용택 시인 본인도 무리의 대열에서 삐져나가 외따로 섬진강에 있다. 이외수가 강원도 화천 다목리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김용택 시인이 책을 낸 것은 외따로 삐져나가 있다가 또 심심해서 도시인들에게 한 마디 말을 걸어보려는 수작이다. ‘너희들이 인간을 알어?’하며 강변에서 소리를 지른다. 이외수 역시 약수터 가는 길에 차 못들어가게 길을 딱 막아놓고 혼자 있다가 심심했던지 방송출연을 핑계로 도시 나들이를 한다. 아내 이야기도 한다.

김용택, 이외수.. 나는 그들을 이 시대의 부족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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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워드포드의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워드포드에 의하면 역사는 부족민과 도시민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한다. 부족민은 몽골족이나 훈족과 같은 도시 주변의 유목민 혹은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호주의 애보리진처럼 수렵 채집에 종사하는 원주민들이다.

도시에도 부족민이 있다. 그들은 서울역 지하보도에 산다. 노숙자들 말이다. 중요한 점은 21세기 현대문명이 아니 서구기독교문명이 후세인이나 빈 라덴이나 김정일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다. 그들을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기는 난망이다.

노숙자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일본에도 프랑스에도 미국에도 있다. 그 어떤 선진국도 노숙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아니 선진국일수록 더 노숙자와 잘 공존한다. 그들을 얼굴 찌푸리지 않고 적응해낸다.

무엇인가? 현대문명.. 아니 서구중심 기독교문명은 부족민과의 싸움에서 패퇴한 것이다. 그 패배가 통렬한 패배임을 나는 말하고 싶다.

더 큰 관점에서 보면.. 부시야 말로 부족민의 한 족장이다. 도시민 촘스키가 부족민 부시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다. 보라! 촘스키의 지지자들은 뉴욕이나 LA에 살고 있다. 부시의 동맹자들은 텍사스의 사막 근처에 살고 있다. 어디를 가나 부족민들이 대략 부시를 지지하고 도시민들이 대략 힐러리를 지지한다. 이건 진보나 보수를 떠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전쟁이 이라크 부족민과 텍사스 부족민 사이의 전쟁이며.. 훈족 후세인 앗틸라 대 인디언 부시 미친말의 전쟁이며.. 도시민 촘스키는 그 전쟁을 말리려 했으나 무참하게도 실패하고 말았다는 거다. 나는 그 소통의 단절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불태우고 때려부수는 앗틸라의 말발굽 앞에서 문명한 도시의 교부와 철학자와 지식인들은 도무지 어떤 말로 설득하여 로마나 파리가 그냥 불을 싸지르고 파괴하기에는 아까운 도시라는 점을 이해시길 수 있을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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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주의는 비판되어야 한다. 함부로 가르치려 드는 행태 말이다. 이문열처럼 혹은 부시처럼 선과 악 사이에 임의로 금을 그어놓고 요 금을 넘어가면 안돼 하고 경고하는 사람 말이다. 반면 섬진강 김용택이나 다목리 이외수는 선과 악 사이의 경계가 본래 희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집은 사창가 장미촌이다. 아버지는 악질 포주다. 악마적인 심성의 소유자인 큰 형은 그런 아버지를 거들어 우리집에 갇혀 있는 불쌍한 창녀들을 학대한다. 착한 둘째 형은 홀로 저항하다가 결국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말았다. 문학을 공부하는 막내아들인 내가 이 미친 집에서 몰래 사랑하는 한 창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이외수의 ’꿈꾸는 식물‘이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한 한국은 별수없는 사창가 장미촌이다. 오늘날 한국이 성매매대국으로 성장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박정희는 자기 식구를 팔아서 먹고사는 포주였다. 그는 월남에 생목숨 5천을 팔아 식구를 먹여살리기도 했다. 사악한 조중동 큰형은 포주인 아버지를 거들어 온갖 악을 자행하고 다닌다. 식물처럼 착한 둘째형 한겨레는 기어이 미쳐버렸다. 막내아들인 내가 이 미쳐돌아가는 나라에서 사랑하는 그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이라면 이 미친 나라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다들 미쳐 돌아가는 판에 나 혼자 미치지 않았다고 강변할텐가?

부시의 방법은 간단하다. “전기톱으로 잘라버려.” 이 말은 그의 아내가 연설에서 부시의 성격을 소개하는 일화랍시고 옮긴 말이다. 그의 텍사스 농장에서는 이 방법이 주효했다. 농장 울타리를 망가뜨리는 덩굴이나 bush들은 전기톱으로 잘라버리면 된다.

이문열의 해법도 간단하다. 나쁜 넘들은 감옥에 가두면 된다. 그는 국가의 힘과 제도와 법질서를 믿는다. 그리고 그 질서에 순종한다. 그는 본래의 야성을 잃고 집고양이처럼 길들여진 인간이다.

문제는 실패했다는 거다. 이 전쟁에서 부시는 실패했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문열도 실패했다. 그가 그의 소설 속에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놓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섬진강 김용택이나 다목리 이외수는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선과 악 사이의 경계는 본래 희미하다. 선이 악이되고 악이 선이 된다. 둘을 아우를 수 있는 더 높은 시선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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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애보리진은 백인에게 얻은 옷을 삭아서 헤질 때 까지 입는다. 그들 가까이에 다가갈 수 없다. 악취가 코를 찌른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도로를 따라 걷는다. 백인의 자동차에 치여죽은 캥거루를 줏기만 하면 하루 일과는 대충 끝난다. 예전처럼 나무 밑둥을 파헤쳐 굼벵이를 발굴하는 노동이 필요하지 않다.

누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애보리진을 착한 농부로 개조할 수 없다. 그러한 노력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략 실패했다. 그들은 한사코 메마른 사막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강제로 떠나게 했을 때 곧 쇠약해져서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도 어이없는 것이다. 도시의 벽들이 눈앞을 가로막고 줄줄이 서 있다는 사실 조차도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사방이 확 틔여있지 않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도시의 벽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숨이 답답해진다.

해결해야 할 문제다. 두 종류의 대처법이 있다. 수구의 방법은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여버리거나(히틀러) 세뇌시키거나(선교사) 억압하고 지배하거나(조중동) 힘으로 억누르기다. 이라크에서 보듯이 이 방법은 한계가 드러났다. 누구도 서울역 노숙자들을 설득하거나 위협하여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 총깨나 쓴다는 전두환도 못하고 말씀깨나 쓴다는 조용기목사도 못한다.

좌파의 방법은 그들을 교양하고 계몽하는 것이다. 그들을 가르쳐서 인간 만들면 된다. 그러나 과연 가능할까? 역시 실패한다. 부분적인 성과로 끝나고 만다. 어떠한 교육도 금전의 미끼도 그들을 회유할 수 없다. 그들이 부족민이다.

부족민이 있다.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문명사회를 떠난 원초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사고한다. 그들은 숲속의 은자가 되거나 혹은 소그룹의 족장이 되려고도 한다. 김용택 부족민은 은자에 가깝다. 반면 이외수 부족민은 족장에 가깝다.

춘천시절 이외수의 집은 늘 그의 부족민으로 들끓었다. 이외수의 아내는 늘 쳐들어와서 죽치고 있는 그 부족민들에게 밥해대기 바빴다. 따라쟁이 이문열은 평소 이외수의 부족을 부러워했다. 그는 돈을 풀어서 인위적으로 사람을 끌어모아 부족을 만들려고 했다. 부족민 세계에서 알아주는 대인이 되려고 했으나 부족이 모여들지 않아 낭패하고 있다.

무엇인가? 시골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애보리진이 아침에 일어나 사막을 뒤져 먹을 것을 구하고 식구들이 모닥불 앞에 모여앉아 각자의 채집물을 꺼내놓고 환담하며 백인에게 얻은 술 한병을 마시고 낮잠을 자면 그 하루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뜰때 까지 계속 자면 된다. 나무통 속의 철인 디오게네스가 부럽지 않다. 그리하여 김용택 시인은 말했던 것이다. “해가 졌다. 산그늘이 서늘하게 온 동네를 덮자 할머니 한 분이 하얀 옷을 입고 뒷짐을 지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강물 흐르는 쪽으로 걷는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그림같이 걷는다. 단순한 고요의 절정이다.”

도시민의 삶은 불완전하다. 그들의 하루는 오늘은 내일을 위해 희생하는 하루다. 목표는 50년 후로 정해진다. 우선 내 집과 내 차와 내 가족이 있어야 한다. 지위로는 내 친구들보다 위에 서야 한다. 그리고는 떵떵거리며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것이다. 통통거려도 안되고 팅팅거려도 안되고 반드시 떵떵거려야 한다. 이런 그림을 마음 속에 하나씩 그려놓고 하루에 한 조각씩 퍼즐을 맞추어 나간다.

도시민의 하루는 한 조각 퍼즐이다. 이 조각들은 불완전한 부스러기들이다. 완성은 50년 후에나 가능하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오늘 하루의 완결성 따위는 없다. 도시민에게는 해가 뜨고 지는 일도 없고 산그늘이 서늘하게 온 동네을 덮는 일도 없고, 흰옷입은 할머니가 강물을 따라 걷는 일도 없다. 섬진강 김용택이 본 단순한 고요의 절정 따위는 없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완결되지 않는다.

문명의 본질은.. 도시의 굴뚝에 있지 아니하고 쭉 뻗은 도로에 있지 아니하고 소년의 핸드폰에 있지 아니하고 부자의 골프장에 있지 아니하고 날아가는 비행기에 있지 아니하고 곱게 늙은 노인의 유람선 여행에 있지도 않다. 본질은 소통이다. 완성되어야 소통한다. 완성되어야 종은 소리를 낸다. 완성되어야 울림과 떨림은 전파된다. 그런데 완성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하다.

● 수구꼴통의 방법.. 방해물들은 전기톱으로 잘라내버리면 된다.
● 좌파들의 해결책.. 교양하고 계몽시켜 보다 균질화된 사회로 만들면 된다.
● 김용택 이외수들.. 각자의 존재와 그 다름을 인정하고 제각기 그 동아리 안에서 별도로 완성시킨 다음 널리 소통해야 한다.

필자는 세 번째를 이야기 하고 있다. 21세기는 진보나 보수의 문제에 부닥친 것이 아니라 소통의 문제에 직면하여 있다. 소통은 막힌 것을 뚫는 것이다. 수구꼴통은 총이나 칼로 뚫으려 한다. 그 방법으로 뚫릴 수 있는 것은 오래전에 다 뚫리고 없다. 20세기 초 양차 대전으로 확 뚫렸다.

좌파들은 교양이나 계몽으로 뚫으려 하고 있다. 그 방법으로 뚫을 수 있다면 부시의 이라크 침략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소통의 문제다. 수구도 뚫지 못했고 좌파도 뚫지 못했다. 뚫으려 한즉 뚫지 못한다. 다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동아리 안에서 제각기 완성시켜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역사의 도전과 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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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치를 추구한다. 가치는 진위(眞僞) 중에서 진을, 선악(善惡) 중에서 선을, 미추(美醜) 중에서 미를, 자유와 억압 중에서 자유를, 성(聖)과 속(俗) 중에서 성을 추구한다. 부족민은 그 가치를 하루라는 동그라미 안에 우겨 넣는다. 섬진강 김용택은 그 가치를 진메마을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 우겨넣는다. 이외수는 화천 다목리 감성마을이라는 작은 동그라미 안에 우겨넣는다. 그렇게 우겨넣어져서 그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완성된 것이 성(聖)이다.

이문열 부시들은 선악이라는 하나의 관점만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도둑놈은 나쁜놈 경찰은 우리편.. 요 정도만 알아도 제법 이문열 수준으로는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세상에는 악당이 존재하며 그 악당을 죽여버리기만 해도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유치원 1학년 부시의 소박한 믿음 말이다.

세상 이치가 이 정도로 간단하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사실이지 부시는 행복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체 바보처럼 입을 헤벌리고 웃으면 90살까지 장수할 수 있다. 촘스키처럼 번뇌하여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는 일은 없다. 생각이란 것을 안하고 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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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메마을은 아름답다. 천만에! 아름답지 않다. 김용택 시인은 늙은 호박이나 쭈그러진 할머니의 손등이나 구불구불한 개울물이나 장독대 밑에 소박하게 피어있는 채송화 따위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는 장미꽃의 화려함을 제쳐놓고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우기고 있다.

그가 찬탄해 마지 않는.. 돼지잡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시퍼런 칼로 돼지의 목을 쓰윽 따고 그 안에 손을 와락 집어넣어 아직 체온이 남아있는 생간을..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소금에 쿡 찍어먹는 풍경은 아름답기는 커녕 역겹다. 그런데 왜 그는 아름답다고 우기는 것일까?

그것이 김용택의 미학이다. 미학은 진위의 관점, 선악의 관점, 미추의 관점, 자유와 억압의 관점 그리고 성과 속의 관점을 하나로 통일시켜 보는 총체적인 눈높이다. 그 눈을 얻어야 한다.

손에 시뻘건 피를 묻힌 채로 돼지의 생간을 소금에 찍어 꿀꺽 삼키는 그 모습이 악마처럼 보이지 않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미인의 모습보다 더 아름답다는 김용택 시인의 구라를 접수한 때가 당신이 세상을 이해한 순간이다.

교양주의를 버려야 한다. 사회를 균질화 시키려는 좌파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 화려한 도시의 유혹 앞에서 끄떡없이 버티는 부족민의 존재 앞에 당혹하여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그들을 제거하거나 지배하려는 우파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본다면.. 우파들이야말로 뼛속 깊숙히 부족민의 근성을 감춘 자들이다. 좌파들은 교양주의로 인하여 인간이 순치되어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어떤 본성에서 멀어졌다. 오늘날 좌파는 야성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이제 돼지를 잡지 않는다. 손에 피를 묻힌 채 돼지의 생간을 꺼내지 않는다. 그들은 얌전하게 줄도 잘 선다. 그들은 도시의 제도와 시스템에 잘도 적응한다. 그들은 도시의 차단된 시멘트벽 앞에서 전혀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잘 훈련된 독일병정처럼 각자의 모니터 앞에 얌전하게 앉아 접속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슈퍼마켓 진열장의 통조림처럼 보기좋게 쟁여져 버렸다.

우파들 중에는 그래도 아직 속에 야성을 감추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자칭 잡놈 김훈처럼 돼지잡는 법도 잊어먹은 주제에 돼지잡는 근성만은 남아있어서 아무데서나 돼지잡는 칼을 휘두른다. 이들 꼴통들의 난리부르스를 잘도 통제해주었던 진메마을의 문계선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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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다. 아담과 이브때부터 그랬다. 산업화가 도시민의 시대를 열었지만 인터넷의 등장으로 세계는 점점 더 부족화 되어 가고 있다.

처음 금속활자가 발명되었을 때 지식인들은 쾌재를 불렀다. 이것으로 인류는 소통의 장벽을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라틴어 성경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보급할 계획을 세웠다.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균질화시키겠다는 좌파의 계획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의 가슴은 혁명의 꿈에 부풀었다!

아뿔사! 금속활자를 보급시켜 모든 인간을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시키려는 찰나 성경은 수십개의 언어로 제각기 번역되면서 동시에 수십개의 장벽이 생겨나 버렸다. 소통은 더 어려워졌다.

라틴어 성경으로 논할 때는 교황의 명료한 해석이 최고의 권위를 가졌지만 각자 제 나라 언어로 번역되자 성경은 하나인데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다르고 영국어 성경이 다르고 프랑스어 성경이 또 다르다. 언어가 달라지자 바벨탑은 무너지고 무리는 그만 뿔뿔이 흩어져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백년동안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무수하게 많은 사람을 죽여대기 시작한다. 쿠텐베르크 때문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  

금속활자의 등장이 제 1의 해방이면 산업화가 제 2의 해방이다. 산업화가 오대륙에 인류를 흩어진 인류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했지만 전에 없던 국민국가라는 것이 생겨나서 인류는 더욱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 이전에는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으로 나누어져 대략 분포하여 살았다.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한다는 국민적 정체성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인터넷은 금속활자의 보급과 산업화에 이은 제 3의 해방이다. 마찬가지로 세계가 하나의 야후와 하나의 아마존과 하나의 이베이로 대통합을 이루려는 찰나 언어의 숫자만큼 많은 공화국들이 그 안에서 생겨났다. 이제는 다섯 명만 모여도 제각기 동아리를 지어놓고 모두들 부족의 족장 행세를 하게 되었다.

인터넷에 의해 인류는 다시 부족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인터넷은 원시 사회주의가 정착되어 있다. 노동도 무료에 콘텐츠도 무료에 임금은 지불이 없다. 그런데도 그 안에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고 평판이 있고 질서가 있고 체계가 있다. 사회에 있을 것은 다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그 안에 있다.

인류의 문제는 언제라도 소통의 문제다. 부족민의 사회주의는 작은 동아리 그룹 안에서 원만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그 소그룹은 완성되어 있다. 김용택 시인에게 1960년대의 진메마을은 손끝하나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성되어 있다. 이상향처럼 완성되어 있다. 그 안에 요순시절이 있고 에덴동산이 있다.

도시민의 자본주의는 큰 그룹 안에서 소통하지 못하고 대신 거래하거나 언젠가의 완성된 소통을 위하여 대비하고 축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교하고 비교당한다. 그들은 무리에 떠밀려 흐름을 쫓아간다. 스타벅스로 흘러가고 명동으로 흘러가고 밀리오레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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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노숙자들의 태연한 모습 앞에서 당혹해하지 않을 때, 부족민의 길들여지지 않는 모습에서 당황하지 않을 때, 이라크인의 끝까지 굴종하지 않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김일성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군상들을 용납하게 될 때 당신은 교양주의를 극복한 것이다. 자기와 다른 세계의 존재 앞에서 거북해하지 않을때 이문열 수준을 벗어나 약간 상승한 것이다.

그러나 대략 교양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더라. 초등학생의 일기에서 끚맺음은 반성으로 완결된다. 유리창이나 꽃병이라도 하나 깨뜨리고는 다음부터 안그래야겠다 하고 반성해야 당신의 일기의 마무리가 된다면 아직 멀었다.

무언가 악당을 찾아내서 혼내야만 이야기가 끝난다고 믿으면 아직 멀었다. 노숙자를 교화해야 하고, 이라크인을 계몽해야 하고, 뻘건 넘을 때려잡아야 하고, 삵을 조져야 하고, 까탈잡기 전문의 문계선씨 입을 틀어막아야 하고.. 뭔가 당장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믿으면 당신은 아직 멀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스탈린과 히틀러와 박정희와 김일성이 공유했던 슬로건이다. 수구꼴통들과 좌파가 아직도 붙들고 있는 낡은구호다. 부분이 전체를 위해 희생해서 안 되고 전체가 부분을 위해 희생해서도 안 된다. 제각기 독립하여 자기만의 조그마한 동그라미를 이루고 그 동아리 안에서 스스로 완성된 다음에 비로소 소통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일의 영광을 위해 오늘의 소중한 이 순간을 희생해서 안 되고 자녀를 위해 엄마의 인생을 희생해도 안 된다. 부족민과 도시민의 삶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 해서도 안 된다.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자기만의 골방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21세기의 부족민은 더욱 늘어난다. 그들을 설득하려 해서 안 된다.   

1500년 전 훈족의 왕 앗틸라가 동로마를 파괴했듯이 21세기 이 문명한 시대에 텍사스 사막에서 굴러먹다 굴러온 부족민의 족장 부시가 도시민 촘스키의 뉴욕을 파괴하고 있다. 문명한 촘스키의 미국은 야만한 부시의 미국에 패배했다.

많은 사람들은 부시 나쁜편 촘스키 우리편.. 이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도시민과 부족민은 원래 하나의 문명이 가진 두 얼굴이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뗄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문명한 미국이 야만한 이라크를 친 사건으로 보지만 나는 야만한 텍사스가 문명한 뉴욕을 친 사건으로 본다. 잘난 촘스키의 뉴욕이 패배했다. 21세기의 동로마는 망했다. 미국은 망가졌다. 미국이라는 문명의 수준을 드러낸 사건이다. 꼴 좋게 된 것이다.

앗틸라의 침략과 부시의 침략.. 1500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둘은 본질에서 동일한 사건이다. 역사이래 앗틸라들은 늘 있어왔다. 한나라 때 흉노선우 묵특의 이름으로 혹은 송나라 때 몽골 족장 징기스칸의 이름으로 고원의 부족민들은 중국문명에 자극을 주어왔다. 중국문명은 유목민에게 한번 침략당할 때 마다 비약적으로 발전하곤 했다. 반면 침략이 없을 때는 조용히 쇠퇴하곤 했다.

각자는 각자의 앗틸라를 하나씩 품고 있다. 촘스키에겐 부시가 앗틸라이고 부시에겐 빈 라덴이 앗틸라이다. 둘 사이의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문명의 본질은 소통이다. 규모가 크지만 퍼즐조각에 지나지 않는 부스러기 도시민과 작지만 옹골차게 심이 박혀 내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부족민 간에 소통하려는 에너지는 언제나 넘쳐나곤 했다.

부족민과 도시민의 갈등으로 점철된 역사.. 그것은 작은 규모로 완성된 동그라미와 큰 규모로 미완성된 세계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본질적인 동력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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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주의는 스타벅스의 된장녀들이 ‘여기선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촌넘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지식인 특유의 병이다. 커피는 요렇게 타는 것이 맞고 와인은 요렇게 보관하는 것이 맞고 하며 김봉남 타입으로 말해야 한다.  

성(聖)과 속(俗)이 있다. 속은 풍속(風俗)과 같다. 풍은 바람이고 속은 흐름이다. 속물은 바람따라 흘러간다. 그들은 시류에 따라 흘러간다. 스타벅스로 흘러가고 명동으로 흘러가고 밀리오레로 흘러간다. 남들 가는데 따라간다. 도시민은 운명적으로 속물이다. 자기의 꿈을 자기 바깥에 두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족민의 야성을 잃어버렸다. 굴하지 않는 부족민의 오기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남이 세워놓은 줄 뒤에 가서 선다. 야구하는 날에는 야구줄에 서고 축구하는 날에는 축구줄에 서고 영화하는 날에는 영화줄에 선다.

성(聖)은 완성이다. 결함이 없다.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세계가 독립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그것은 사랑을 품은 자유다. 막연한 자유는 바람따라 흘러가 버린다. 김삿갓처럼 떠돌게 된다. 속에 사랑을 품은 자유는 흘러가지 않는다. 떠돌지도 않는다.

부족민들은 문명인의 간섭이 없어도 자기네끼리 오순도순 잘 살아간다. 이외수는 다목리에서 혼자서도 잘 놀고 김용택은 섬진강에서 혼자서도 잘 산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은밀히 도시를 엿보곤 한다. 역사는 길들여지지 않은 부족민과 길들여진 도시민 사이에서 소통의 역사다. 참견하지 않고 간섭하지 말고 훈계하지 말고 각자의 위치에서 제각기 완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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