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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736 vote 0 2006.01.19 (18: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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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역사]


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상


과학의 이름 아래 모든 우상이 깨뜨려졌다. 그 우상들이 머무르던 자리에 이제는 과학이 위치하게 되었다. 21세기 이 문명한 시대에 가장 어두운 곳은 학문이라는 이름의 등잔 아래일 터이다.


과학의 엄정성이라는 성역에 숨어 오늘날 학문은 날로 신비화 되고 있다. 그 옛날 종교가 가졌던 권위를 지금은 과학이 가지게 된 것이다. 우상이 죽은 시대에 최후의 우상은 과학 혹은 학문일 터이다.


학문이 신비화 되고 우상화 될수록 인간에서 멀어지고 만다. 기어이 학문이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본래의 학문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자(朱子)의 대학(大學)은 학문의 목적 세 가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 덕(德)을 밝히는 것이요, 둘째 인간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셋째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인간 중심의 학문관을 의미한다.


오늘날에 와서 학문의 목적 그리고 과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무도 이 질문에 답하려 들지 않는다. 이 시대에 인문정신은 죽은지 오래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테크닉은 얻었으나 그 정신은 황폐해졌다.


나는 오늘날 학문의 목적이 1천년 전에 대학(大學)이 밝힌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 진리의 완전성을 밝히기, 둘째 인간을 새롭게 하기, 셋째 공동체적 삶의 미학적 완성이다.



인간은 왜 학문하는가?


진(眞), 선(善), 미(美)는 별개의 가치가 아니다. 하나의 가치가 시작하고 전개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씨앗 뿌리기가 진(眞)이라면 거름을 주어 걸구기가 선(善)이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가 미(美)가 된다.

 

왜 인간은 학문하는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가치들이 있는가? 진(眞)과 선(善)과 미(美)가 있다. 이 셋은 진리로부터 유도된 하나의 가치가 인간존재에 반영되는 과정이다.


먼저 진리의 완전성을 밝히어 진(眞)이며, 그 진리의 완전성을 빌어 인간을 날로 새롭게 하기로 선(善)이며, 그러한 방법으로 공동체적 삶의 미학적 완성에 도달하기로 미(美)다.


진리는 농부가 사과를 따듯이 뚝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광부가 금을 캐듯이 문득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획득한 가치를 인간 자체에 내면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학문에는 그러한 과정이 무시되어 있다.


학문의 목적은 인간의 완성에 있다. 인간이 진리에 의존해서 안되며 인간 개개인이 완성될 때 진리의 임무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화의 과정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오늘날 학계는 학문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학문에서 인간이 배제된 결과로 학문은 대중일반이 접근할 수 없는 전문가 집단의 테크닉으로 인식되고 있다. 학문이 계급의 표지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오늘날 학문은 사제계급을 양산하는 일종의 라이선스 사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학문과 대중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부터 해체되어야 한다. 학자집단, 학자면허, 학자 신분은 없어져야 한다. 학문의 인간화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모델의 완성이 중요하다


처음 학문의 시작 단계는 진(眞)을 추구한다. 그것은 공자 가로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조문도 석사가의)’는 그것과 같다. 무엇인가? 학문에 있어서의 동기부여다.


중간 전개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선(善)을 추구한다. 선은 공동체적 가치의 공동선을 의미한다. 이는 널리 대의와 명분을 밝힘으로써 그 학문의 성과를 공동체의 성원 모두에게 되돌리기다.  


마지막 완성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미(美)를 추구한다. 미는 하나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21세기라는 우리시대의 모델, 대한민국이라는 우리나라 모델, 우리 민주화 세력의 역할모델을 완성하고 전파해야 한다. 


주자(朱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했다. 그러나 부족하다. 지식이 학문의 전부는 아니다. 진정한 학문은 진리를 궁구하여 가치를 얻는 것이며 그 가치에서 빌어 인간 개개인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과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이 학문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왕양명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를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삶의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지식 위주의 학문은 의미없다.


학문은 복마전의 뚜껑을 열듯, 어두운 동굴 속을 탐험하듯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막연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보의 한걸음 한걸음에서 낱낱의 삶을 완성하여 제각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참된 학문은 인간 개개인을 완성하고 진정한 삶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역할모델이 중요하고 성공모델이 중요하다. 작더라도 동그라미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줄 때 울림과 떨림으로 공명함이 있는 것이다.


왜 모델의 완성이 중요한가? 이는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되 연대기가 아니라 열전에 비중을 둠과 같다. 역사는 다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물음에 대하여 낱낱이 응답하는 것이다.


사건들의 조각을 시간 순서로 나열함은 하나의 일이 시작되고 전개하고 완결하는 1 사이클의 전체과정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런 식이라면 후세를 위한 귀감이 되지 못한다. 본받을 수 있는 역할모델을 이루지 못한다.


열전(列傳)이란 역사를 인간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왜인가? 인간중심으로 보아야지만 그 역사의 호흡과 맥박이 드러나기 드러나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이 본받을 수 있는 모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역사는 끝없이 이어진다. 끝이 없으므로 완결이 되지 않는다. 마디를 끊어줘야 호흡과 맥박이 드러난다. 인간은 언제나 그 시대의 질문에 응답해 왔다. 그 시대의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여 왔는지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학문은 무엇인가? 21세기라는 이 시대의 도전에 우리가 어떻게 호응하고 응답할 것인가이다. 막연한 진실의 규명이 아니라 21세기가 요청하는 답변, 나 개인의 답변, 우리 세대의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작더라도 내적으로 완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지만 소통이 가능하다. 조각난 부스러기들로는 울림과 떨림이 전달되지 않는다. 단편적인 팩트의 정확성에 집착해서는 역할모델을 성립시킬 수 없다.



인류가 짓는 커다란 집


서구의 관점에서 볼 때 학문이란 인류가 힘을 합쳐 커다란 집을 한 채 건축함과 같다. 뒤늦게 소식 듣고 달려간 우리에게 그 건물을 설계하고 감독하는 좋은 일이 주어질 리 없다. 다만 잡역부의 허드렛일이 주어진다.


서구가 터 닦아 선점한 건축에서 우리가 기여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가망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새로이 닦아야 한다.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건물을 지어야 한다.


서구의 관점에서 학문이 커다란 집을 짓는 격이라면 동양정신의 관점에서 볼때 학문은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과 같다. 갖가지 꽃들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으로 제 각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동양의 학문관이 항상 그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석가의 중도(中道), 공자의 중용(中庸), 노자의 무위(無爲)는 서구식 건축의 획일적 시스템이 아니라 동양식 정원의 다양성과 조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시대에 1사이클의 완성을 드러내는 성공모델을 만들어야한다. 그 방법으로 21세기라는 이 시대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지만 우리 이름으로 그 정원에 간판을 걸 수 있다.


묻노니 그대는 서구의 건축에 잡역부로 동원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정원에 작더라도 한 송이 꽃을 피울 것인가?


서구의 학문관은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이다. 시스템은 굳건하고 인간은 약하다. 인간이 시스템에 길들여진다. 인간이 길들여진다면 실패다. 인간이 주인이어야 한다. 학문이 인간을 위하여 길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학문이 진리와 인간 사이에 가로막는 장벽으로 존재해서 안 된다. 오히려 소통하는 길로 존재해야 한다. 오늘날 서구의 학문은 스스로 권력화 되어 인간과 진리의 자연스러운 소통을 통제하고 있지 않는지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묻노니 당신의 학문관은 어떤 것인가? 당신은 왜 학문하는가?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식을 원하는가 삶을 원하는가?


지식의 획득은 진리와 대등한 눈높이로 다가서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진리를 규명하여 가치를 얻고 가치를 내면화 함으로써 나 자신을 새롭게 하기다. 그 방법으로 공동체적 삶을 완성하기다. 이것이 참된 학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답하기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동양과 서양이 영원히 만나지 않았다면 중국이 독자적으로 근대문명을 이룩하였을까 아니면 여전히 봉건사회를 면하지 못하고 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역사학에도 가정을 통한 모델의 실험은 중요한 추론방법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오류 가능성이다. 가정이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낼 위험성이 크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이 독자적으로 근대문명을 이룩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그 원인이 소위 말하는 아세아적 정체성(停滯性) 때문인 것은 아니다. 서구의 학문체계가 우월하고 동양의 체계가 열등하기 때문은 아니다.


(※ 아세아적 정체성(停滯性)이란? 아세아 특유의 가부장제도에 기초한 가족문화가 나약하고 순종적이며 더욱 노예적이어서 독립적인 근대문명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비슷한 주장이 친일파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던 바 조선인은 노예근성이 있어서 독립이 불가하다는 설이다.)


문명이라는 개념에 대한 명징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명사 차원에서 볼 때 동양과 서양을 50 대 50으로 놓고 보는 관점은 잘못 되었다. 청나라 이후 중국의 인구가 급증했지만 단순 인구비교로 동양과 서양을 논한다면 터무니 없다.


서구문명의 성과는 르네상스 이래 아랍문명과 이집트문명 등 다양한 동양문명의 자양분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중국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럽도 고립되어 있었다면 여전히 중세의 암흑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고립계’ 안에서 문명이 자가발전 한다는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문명의 발전은 게가 허물을 벗듯이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법이며, 이러한 도약의 계기는 반드시 외부에서 주어져야만 한다. 


무엇인가? 문명의 발전에는 일정한 물리적 조건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구가 근대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은 까다로운 여러 가지 ‘문명의 필요충분 조건’들을 두루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는 아랍과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그리이스와 로마, 그리고 이집트인과 유태인의 지혜를 빌릴 수 있었던 반면 중국은 지정학적 조건에서 불리했다. 하나의 문명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씨앗이 되는 핵과 자양분을 공급할 배후지가 갖추어져야 하는 바 중국은 그 핵이 부실했다.


문명이 발전하기 위한 필수 구성요소가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나 둘이 결핍된 채로 문명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여러 개의 문명의 생장점을 가져야 하는데 중국은 그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했다.


결과론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유럽은 여러 조건이 맞아져서 결과적으로 근대문명을 건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인의 내부에 문명을 건설할 어떤 잠재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마야문명과 같이 고립된 채로는 일정 한도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다. 중국은 오랫 동안 고립되어 있었고 그러한 고립의 원인들 중 하나는 18세기 까지 중국이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이 발전한 이유 중 하나는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뒤져 있었기에 앞선 아랍이나 중국을 배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문명은 다시 뒤처지게 된다. 가장 앞서 간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어느 면에서 고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문명은 하나의 대륙, 하나의 국가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게 되어 있다. 최초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성립한 문명이 이집트를 거쳐 그리이스와 로마로 이동했고 스페인으로 옮겼다가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확장된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문명이 항상 큰 강이나 바다를 끼고 성립하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대륙과 섬, 혹은 반도 사이를 오간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문명의 필수 구성요소들 중 하나인 이동기술에서 바다와 강을 이용하는 선박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 문명의 필수 구성요소들은? 이동기술, 전쟁기술, 농사기술, 야금기술, 그리고 종교와 문화이다. 이 중에서 이동기술은 항해술, 조선기술, 도로와 역참, 말과 수레, 자동차와 비행기 그리고 통신기술을 들 수 있다. 강과 바다 그리고 섬과 반도라는 지정학적 요건은 선박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동기술의 발전을 촉발하는 핵심적인 요건이 된다.) 


중국문명이나 마야문명과 같이 바다를 활용하지 못하고 내륙에 고립된 문명은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이동기술의 낙후로 하여 숙명적으로 정체를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지구촌 인류문명은 1만년 전 최초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출범하여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미국을 거쳐 일본에 상륙하였다가 한국을 거쳐 다시 중국으로 진입하여 가고 있다.


무엇인가? 구조적인 이유로 조만간 동양이 서구를 추월할 수 밖에 없게끔 지구촌 인류문명은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학문의 시원은 무엇인가?


발상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연역법과 귀납법이다. 논리학과 수학은 고도의 추상을 필요로 하는 면에서 연역추론에 의존한다. 반면 지리학이나 역사학 따위는 경험을 위주로 하는 바 관찰과 통계의 귀납추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서구의 학문이 발달한 배경에는 논리학과 수학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동양이 낙후한 배경에는 논리학과 수학의 부재라는 문제가 있다. 물론 동양에도 논리학과 수학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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