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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266 vote 1 2006.01.21 (01:31:58)

  
두 개의 으뜸질서

세상에는 두 가지 큰 질서가 있다. 전자는 코스모스라 불리고 후자는 카오스라 불린다. 그러나 잘못이다. 디오니소스가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코스모스다.

북해의 홀과 남해의 숙이 힘을 합쳐 죽여버린 혼돈(混沌)이 의미없는 혼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장자가 혼돈으로 묘사한 이유는 장자 스스로 그 질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의 역동성이다. 스스로 완전함에 도달한 독립적인 여럿이 동시에 공명하여 울림과 떨림으로 이심전심 소통하는 것이다.

두 질서는 대립하는듯 하지만 실로 대립하지 않는다. 계 안에서의 질서와 계 사이에서의 질서는 계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소통하고 있다.

생물이 하나의 세포 단위로 정립함은 아폴론의 질서요 세포와 세포가 신경망으로 소통함은 디오니소스의 질서다. 서구의 학문은 전자에 치우쳐 있었고 동양의 학문은 후자에 치우쳐 있었다.

한 대의 자동차 안에서 성립하는 엔진과 바퀴 사이의 수직적 지배구조는 아폴론의 질서다. 엔진이 지배자이고 바퀴는 노예다. 엔진이 바퀴를 다스리되 바퀴는 엔진을 다스리지 못하다. 봉건왕조는 이러한 아폴론의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다.

민주주의는? 디오니소스의 혼란과 같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철인에 의한 일인 독재를 주장한 것이다. 디오니소스를 반대하고 아폴론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발상이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전해져서 서구의 인문주의를 파탄시키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혼돈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혼돈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 보다 오히려 힘이 세다. 거기에는 중력이라는 핵심역량이 빛처럼 작용하고 있다. 접근경로라는 통로가 개설되어 있어서 언뜻 낭비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자동차 안에서 엔진과 바퀴가 아폴론의 수직적 지배구조를 이룬데 반해 디오니소스는 도로망과 같아서 수평의 평등한 질서를 이루고 있다. 신호가 바뀌면 일백대의 차량이 동시에 움직인다. 거기에는 지배자도 없고 노예도 없다.

서구의 철학은 아폴론의 철학이며 지배와 복종의 철학이다. 엔진과 바퀴의 철학이다. 힘은 항상 엔진에서 바퀴로 왕에서 노예로 전달될 뿐이다. 수직구조다. 민주주의처럼 보이지만 실로 민주적이지 않다. 서구는 여전히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동양의 철학은 디오니소스의 철학이다. 신호등의 신호는 모든 자동차가 공유한다. 정보는 쌍방향으로 전달된다. 수직구조가 아닌 수평구조다. 인류의 진정한 대안은 동양정신에서 찾아질 수 있다.


● 아폴론의 질서와 디오니소스의 질서
닫힌 질서와 열린 질서
코스모스 대 카오스
수직적 지배질서 대 수평적 공존질서
운동과 에너지 대 기(氣)와 신바람
전제정치 대 민주주의
닫힌계 안에서의 질서 대 독립계와 독립계 사이에서의 질서
하나의 사람 안에서 머리와 손발 사이의 질서 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두 가지 질서가 있다. 하나는 계 안에서의 수직적 질서요 둘은 계 밖에서의 수평적 질서다. 전자가 닫힌 질서라면 후자는 열린 질서다. 전자가 서구의 에너지라면 후자는 동양의 기(氣)다.

동양정신에서 기는 정기(精氣)요, 생기(生氣)요, 활기(活氣)요, 끈기요, 인기(人氣)다. 그것은 미학적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활성도, 정확도로 계측될 수 있다.  이는 운동과 에너지의 상관관계가 뉴튼의 비례식으로 측정되는 것과 같다.

(※ 여기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잠정적인 표현이다. 나중 더 적합한 용어로 바뀔 수 있다.)

근접도는 두 독립계가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거리다. 예컨대 모르는 남녀가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사고가 난다. 이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는?

함부로 다가설 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서로의 자유를 제한한 결과로 두 독립적인 존재의 가치가 상쇄되고 만다. 사물은 서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관계를 맺을 때 서로의 가치를 상승시킨다.

이것이 근접도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연역하여 두 독립계 사이에서 완성도와 균형도, 활성도와 정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는 뉴튼의 F=MA와 같은 일정한 비례식이 성립하고 있다.

동양인들은 예로 부터 이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기(氣)로 표현하고 거기에 정기, 활기, 생기 따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물론 이 표현들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 작용하고 있는 영감(靈感)은 유효하다.

기(氣)는 사물들이 관계맺는 방식이다. 어떤 방법으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서로의 가치를 상승시키기도 하고 상쇄시키기도 한다. 이를 오행설에서는 상생(相生) 혹은 상극(相剋)이라 일컫는다.

오행의 원소들이 서로 상생하거나 상극한다는 것은 경험에서 얻어진 바 학문적으로 엄정하지 않다. 그것은 틀린 관찰이다. 화,수,목,금,토의 원소들은 전혀 상생하거나 상극하지 않는다.

진정한 상생과 상극은 사물이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서로의 가치를 상승시키거나 혹은 상쇄시키는 자연현상에 대한 보고다. 예컨대 여성과 남성이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얻는 것은 상생이다.

500원어치의 콩나물 값은 기어코 깎으려 들지만 연인에게 선물할 한 송이 꽃의 가격은 깎지 않는 법이다. 동일한 재화가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가에 따라 가치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건물은 중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에 의존하여 건축되듯이, 지상의 모든 생명이 태양광이라는 동력원에 의존하듯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에 의존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사물은 제멋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근원에서의 질서에 의해 일방향으로 정립하는 법이며 그러한 정립의 끝에 미(美)가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역학과 미학

만유는 두 개의 아르케에 지배된다. 독립계 안에서는 역(力)이라는 아르케에 의해 지배되고 연역되며 계와 계 사이에서는 미(美)라는 아르케에 의해 연역된다. 그러므로 학문은 역학과 미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기(氣)를 서구의 에너지 개념으로 파악해서 안 된다. 확실히 기(氣)라는 개념은 에너지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뉴튼에 의해 이미 에너지라는 개념이 확립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기나 활기나 생기나 신바람이라는 표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의 질서를 의미한다. 밑바닥에 숨은 동력원에 대한 관찰의 결과이다.

석가의 중도(中度), 공자의 중용(中庸), 노자의 무위자연, 음양설에서 말하는 조화, 오행설에서 말하는 상생은 공통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어떻게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서로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다. 이런 개념이 서구에는 없다시피 하다.

물론 동양적 기(氣) 개념이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은 아니다. 공자의 유가는 한 가족 안에서의 가부장적 질서, 또는 하나의 조직 안에서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탐구해 왔다. 이를 인륜으로 표현했다. 그 대강은 충과 효다.

그러나 사회는 지금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무엇인가? 그것은 대등한 존재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수평적 질서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이 질서의 한가지 형태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질서를 과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규명하지 못했던 그것을 지금 우리가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신비가 아니라 과학이며 질서의 한 가지 형태이다.
  

신의 완전성과 인간의 사랑

중력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세상은 천지창조 둘째 날의 궁창과 같을 터이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고 물질은 서로 뒤섞여서 강한 것과 무른 것을 분별할 수 없으므로 건축은 불가능하다.

물은 낮은 데로 모여야 하고 산은 높은 데로 솟아야 한다. 대지는 단단해야 하고 허공은 비어있어야 한다. 그러한 질서가 없이 우주가 곤죽처럼 혼돈되어 있다면 인간도 물고기처럼 집 없이 살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건축은 중력이라는 하나의 근본에 의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양광이라는 근본에 의존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인터넷은 하이퍼링크라는 근본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진리의 보편성이라는 근본으로부터 연역된 깨달음이라는 본질에 의존하고 있다. 인류의 모든 삶은 사랑이라는 근본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가치추구는 미(美)라는 이름의 끌림에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의 개체가 독립적으로 완성되고서야 근본으로 부터의 공명(共鳴)에 의한 통제, 이심전심에 의한 끌림, 진리의 보편성으로 부터의 연역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 깨달음 - 지식의 완성에 이를 때 진리의 보편성으로부터 연역된다.
● 사랑 - 독립적인 개인의 인격의 완성에 의해 이심전심의 울림은 가능하다.
● 미 - 독립적인 존재들 사이에서의 끌림에 의해 성립한다.
● 건축 - 개별적인 건축자재들이 중력에 의해 건축으로 질서부여된다.
● 생명체 - 개별적인 세포들이 태양광에 의해 생명으로 재구축 된다.

벽돌은 낱낱이 개별적으로 완성되어 존재한다. 벽돌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완성이 중력이라는 하나의 근본에 의해 전체적으로 통제될 때 건축이라는 이름의 질적인 비약을 낳는다.

인간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지식이 개별적으로 동그라미를 완성시킬 때 완성될 때 진리의 보편성으로부터 연역되어 깨달음이라는 인식의 비약을 낳는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각자의 인격이 대등한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완성될 때 이심전심의 메아리가 전해져서 사랑이라는 비약을 낳는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 사장과 종업원의 수직적 관계 하에서 사랑은 거짓될 수 밖에 없다.

하나의 계가 독립적으로 완성되지 않으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면 근원으로 부터의 울림과 떨림에 반응할 수 없다. 존재는 연역되는 것이며 모든 연역은 근원이 되는 동력원을 가지며 각자가 독립적으로 완성될 때 꽃을 피우는 것이다.  

신(神)이라 불리는 추상적 존재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은 완전성을 표상한다. 근원의 완전성으로부터 공명하여 개인의 인격적 완성이 연역되는 것이며 그것이 동양적 의미로는 깨달음이며 서구적 의미로는 구원이다.

신은 인간을 구원한다.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연역되어 인간은 깨닫는다. 그러한 구원은 또 깨달음은 개인의 독립적 인격의 완전성을 전제로 한다. 자유가 없는 인간, 정신적 독립이 없는 인간에게는 구원도 깨달음도 있을 수 없다.  


역학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

두 가지 가치가 있다. 중앙집권의 효율성과 지방분권의 창발성을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가치는 항상 대립한다. 예컨대 아파트에 난방을 한다 해도 중앙집중식 지방분권식이 있고 각자의 장단점이 있다.

군대는 정보전달의 일방향성을 생명으로 하고 예술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생명으로 한다. 일방향적 정보전달로 군사력의 우위를 점한 쪽이 스파르타라면 쌍방향적 정보전달로 문화의 꽃을 피운 쪽은 아테네다.

개발독재의 일시적 성장세가 전자라면 민주주의의 지속가능한 성장세는 후자의 원리에 힘입고 있다.

학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역학과 미학이 그것이다. 역학은 자연학으로 성립하고 있고 미학은 인문학으로 발전해 왔다. 역학은 힘을 추구하고 미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 두 가지 가치가 인간이 추구하는 본질이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둘이다. 첫째 힘을 원한다. 둘째 매력을 원한다. 힘으로는 타인을 지배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매력으로는 친구를 얻을 수 있고 친구에게 자랑할 수 있다.

역학과 미학이 있다. 역학으로 힘을 조달할 수 있고 미학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인간은 먼저 힘을 얻고자 한다. 힘으로 자신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을 얻은 다음에는 친구를 얻고자 한다. 친구와 나누기 위함이다.

인간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친구다. 사랑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미(美)다. 인간은 언제라도 힘을 원하지만 힘은 그 친구를, 그 사랑을, 그 미를 얻기 위한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힘이 필요하지만 힘은 친구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힘이 없으면 친구를 사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가치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지만 우선순위가 있다. 힘이 먼저고 아름다움이 나중이다. 힘이 먼저라 해서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힘은 결국 미에 도달하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가 궁극적인 목적이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 중요한건 동기부여다.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가치다. 인간에게 동기부여가 가치는 첫째 힘을 얻는 것, 둘째 ‘잘난 척’ 하는 것이다. 전자는 역학에서 구하고 후자는 미학에서 구한다.

결국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가치다. 가치는 힘과 아름다움이다. 이를 조달하는 학문은 역학과 미학이다. 역학이 우선이나 미학이 궁극이다. 역학을 성립시키는 만유의 아르케는 에너지요 미학을 성립시키는 만유의 아르케는 기(氣)다.

서구의 자연학은 역학을 하여 힘을 얻자는 것이요 동양의 인문정신은 미학을 하여 친구를 얻자는 것이다. 우선하는 가치는 서구의 역학이지만 인류의 학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동양의 미학이다.

현실에서 동양은 실패하고 있다. 힘을 얻지 않고 친구에게 다가가려 했기 때문이다. 먼저 힘을 얻어야 했는데 먼저 자연학에 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학에 토대를 두지 않는 인문학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서구도 역시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 다만 힘을 얻으려 할 뿐 그 힘을 어디에 써야할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지금 친구를 얻기 보다 적을 만들기에 부지런하다.

진실로 말하면 인류의 진리는 하나다. 동양과 서구를 구분함은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경향성을 논하는 것일 뿐 학문이 2분법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동양도 한편으로 힘을 얻으려 했고 서구도 한편으로 미(美)를 얻고자 한다. 둘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말하자면 서구의 힘이 먼저다. 그러나 그 힘을 얻은 다음에는 동양정신으로 돌아와서 내면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학문은 서구의 논리학과 수학이라는 자연학으로 시작하여 동양의 깨달음이라는 인문학으로 최종 완성된다.

자연학은 힘을 얻고 인문학은 미를 얻는다. 힘을 얻는 자는 기회를 얻고 미를 얻는 자는 최종적으로 목적을 달성한다.


역학과 미학 그리고 깨달음

두 가지 근원의 질서가 있다.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그것이다. 질서에서 가치가 나온다. 가치는 힘과 아름다움이다. 곧 역학과 미학이다. 역학은 자연학으로 전개하고 미학은 인문학으로 전개하고 있다.

● 계 안에서의 수직적 질서 대 계와 계 사이에서의 수평적 질서
● 코스모스 대 카오스
● 힘 대 아름다움
● 역학 대 미학
● 자연학 대 인문학

근대과학은 계 안에서의 질서 곧 코스모스의 탐구에 부지런 하다. 운동과 힘의 상관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정신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계와 계 사이에서의 질서에 대해서는 탐구가 없다.

미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는 탐구가 없다. 미는 계와 계의 끌림이요 사랑은 계와 계가 만나 더 높은 차원에서의 독립계에 도달함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함수관계의 비례식이 성립하고 있다.

미(美)는 곧 매력이다. 매력은 끌림이다. 독립계와 독립계가 만나 서로를 끌어들인다.. 인기, 인상, 호감, 동감, 공감, 동조, 동화, 공명, 이심전심, 상생 등의 표현들은 미(美)의 이러한 성질 곧 타자를 자기의 바운더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더 높은 차원에서의 계를 이룬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매력으로 끌어당겨서 사랑을 이루듯이 말이다. 왜 아무도 매력과 사랑의 함수관계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가? 이것이 서구정신의 비극성이다.

사랑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관계의 비약이라면 깨달음은 지식영역에 있어서의 비약이다. 독립적 지식과 지식이 만나 서로의 바운더리 안으로 끌어들여 인식의 비약을 이루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엇인가? 서구의 역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힘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의 힘을 빌려 사용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미학에 주목하지 않는 이유는 매력적이나 힘이 없기 때문이다.

계 안에서의 수직적 질서는 힘을 가진다. 비유하면 그것은 근육질 남성의 물리적 힘과 같다. 계 밖에서의 수평적 질서는 힘을 유도할 수 없다. 다만 매력으로 끌어들일 뿐이다. 비유하면 그것은 여성의 매력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여성적인 매력이 특정한 경우 폭발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을. 개별적인 존재의 독립적 완성이 특정한 임계환경에 도달할 때 강력한 파워를 가진다는 것을.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의 완성이자 계의 창조이다. 역학이 하나의 계 안에서 수직적 질서를 의미하면 미학은 계와 계 사이에서의 수평적 질서이다. 깨달음은 계와 계 사이에서 그 독립계들을 통일하는 한차원 더 높은 계의 성립이다.

그것은 깨달음의 힘, 사랑의 힘이다. 그것은 독립적인 너와 나가 만나 팀을 이루고 그 팀이 그 자체로 하나의 계를 이룰 때 얻는 파워이다.

● 하나의 계 안에서의 질서 - 힘을 낸다.
● 계와 계 사이에서의 질서 - 미로 끌어들인다.
● 계와 계가 만나 더 높은 차원의 계를 성립시킬 때 - 빅뱅과 같다.

왜 깨달음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가? 서구의 역학은 닫혀있는 하나의 계를 탐구할 뿐이다. 그 계를 건설하여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탐구가 없다. 동양의 미학은 매력적일 뿐 파워가 없다.

그러나 그 개별적인 미와 미가 만나 사랑이라는 더 높은 차원으로의 비약을 이룰 때 새로운 계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구원이고 깨달음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계는 거대한 힘을 낸다.

● 서구의 역학 - 자동차와 같은 기계의 힘
● 동양의 미학 -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독립한 개인의 매력
● 깨달음과 사랑 - 거리를 최대한 좁혀 팀을 이룬 힘. 가족이나 민족과 같은 형태로 거리를 좁힌 조직의 힘. 민주주의의 힘.

동양정신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정신적 매력에 의지하므로 힘이 없지만 그 완성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힘을 낸다. 그것은 팀의 힘, 사랑의 힘, 가족의 힘, 깨달음의 힘, 서로 돕는 민주주의의 힘이다.


존재론과 인식론

에너지의 정의는 ‘운동의 원인’이다. 그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원인이 하나 뿐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 어떠하든 간에 결과의 도출에 앞서 반드시 운동이라는 관문을 통과한다는 점이다.

인과율에 따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운동이라는 관문이 있다. 원인이 여럿일 수 있고 결과 또한 여럿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운동의 관문은 하나 뿐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다.

어떤 도시에 식당이 단 하나 뿐이고 그 도시의 모든 사람이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면 식당문 앞에 지켜서서 도시의 인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결고리가 되는 핵심적인 링크를 장악함으로써 ‘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중력이 있기 때문이고 또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이 토대가 되는 본질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며 그러한 하나의 본질을 통하여 우리는 존재의 비밀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중요한 것은 첫째 ‘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완벽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운동은 반드시 계를 중심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하나의 닫힌 계 안에서는 에너지의 총량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다.

자연에서 존재는 계의 해체와 붕괴의 일방향으로만 운동을 진행된다. 여기서의 핵심은 변함없는 운동의 일방향성이다. 만약 운동이 쌍방향적으로 진행된다면 에너지의 추적을 통한 존재의 파악은 불가능할 것이다.  

운동은 자연에서 계의 붕괴 형태로만 일어난다. 이는 불안정에서 안정으로의 일방향 이행이다. 자연은 불안정하며 항상 안정화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활동이나 생명의 활동은 그 반대로 진행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크게 볼때 전체적으로 우주는 붕괴되고 있으나 인간의 삶의 영역으로 범위를 좁혀놓고 보면 문명은 날로 건설되고 있다. 즉 인간의 문명에서 운동은 역방향 진행을 가지는 것 처럼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임의이다. 즉 인간이 인식을 위해 특정한 범위를 설정해 놓고 그 범위 안에서 좁게 판단하기로 할 때 그렇게 보여질 뿐인 것이다. 이 부분을 자연의 존재론과 대비시켜 인식론이라 한다.

인식론은 인간의 귀납적 인식범위 안에서 조건부로 성립할 뿐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에서 실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 그리고 존재와 인식은 그 전개의 방향이 반대이다. 코스모스와 카오스 곧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간극은 이러한 성질에 따른 것이다.

● 존재론 - 자연 존재 : 연역적 전개
● 인식론 - 인간 인식 : 귀납적 전개  

여기서 코스모스는 질서 그리고 카오스는 무질서를 뜻하지만 실로 그렇지 않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자연은 다만 해체될 뿐이다. 그러나 그 해체는 물리적 안정상태를 지향하므로 굳이 이를 파괴의 이미지로 볼 필요는 없다.

카오스는 해체가 아니라 재질서화이다. 불안정한 높은 질서에서 보다 안정된 낮은 질서로의 이행이다. 그러한 이행과정에서 혼돈처럼 보여지는 장면들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 영역은 혼돈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영역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문명의 바운더리다. 인간은 그 자유영역 안에서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셈이다.

자연은 ‘계의 해체’ 형태로 일방향으로 진행하여 재질서화 되며 그러한 재질서화 과정이 카오스적인 혼돈 혹은 디오니소스적인 활력,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되는 것이다.  

● 존재론 - 계의 해체에 따른 역학적 질서
● 인식론 - 해체된 계의 재질서화 과정에서 미학적 질서
● 깨달음 - 재질서화 된 계에서의 한 차원 비약된 역학적 질서

카오스는 혼돈을 의미하지만 실로 혼돈이 아니다. 오히려 생기(生氣)나 활기(活氣), 혹은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창의성, 자발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재질서화의 중간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무질서도의 증가로 설명되지만 이는 재질서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엔트로피가 증가된 상태가 실제로는 전혀 무질서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이용할 수 있는 질서가 감소할 뿐이다.

무질서도의 증가는 이용할 수 없는 질서의 증가이며 이용할 수 없는 이유는 재질서화 과정이 현재 단계에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재질서화가 끝나면 다른 방법으로 그 질서를 이용할 수 있다.

산에 내린 비를 댐에 가두어 낙차를 발생시키면 위치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 이는 질서가 있는 것이며 그 질서의 해체에 따른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진 물은 그 상태에서는 이용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물이 강의 하류로 흘러가면 하류에 설치된 새로운 댐에 고여 재질서화 된다. 인간의 문명은 그러한 재질서화의 과정이다. 그 과정이 혼돈처럼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는 활기가 있고 생기가 있고 정기가 있다.

활기와 생기와 정기들은 재질서화 하려는 끌림의 기(氣)들이다. 그 기의 작용에 의해 자연은 재질서화 한다. 그러한 과정이 조화이며 공감이며 동감이며 공명이며 상생이며 이심전심이다.

일찍이 예술가들은 그러한 자연의 재질서화 과정을 포착하려고 노력하였다. 모든 가치있는 예술작품들이 그러하다. 시와 소설과 산문과 운문을 막론하고 음악과 조형과 회화와 건축을 막론하고 그러하다.

모든 인간의 예술적 노력들은 재질서화의 노력이다. 자연은 해체되고 있지만 인간은 이를 재질서화 하는 것이며 이러한 재질서화가 일정한 수준에 다다를 때 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로 비약하는 것이 사랑이고 깨달음이다.

● 자연은 힘을 남기고 해체된다.
● 인간은 미의 방법으로 재질서화 한다.
● 사랑과 깨달음과 예술성은 재질서화의 성공이다.

시든 소설이든 회화든 음악이든 조각이든 건축이든 막론하고 모든 예술은 그러한 재질서화의 과정을 포착하고 있으며 그러한 재질서화에 성공할 때 작품은 완성된다. 그 시점에 시인은 노래하고 소설가는 작품을 완결짓고 화가는 붓을 놓고 연주자는 악기를 내려 놓는다.  

● 존재 - 수직적 질서의 붕괴 : 해체되지만 낮은 차원에서 안정화 된다.  
● 인식 - 수평적 질서의 재질서화 : 건설되지만 높은 차원에서 불안정화 된다.
● 깨달음과 사랑 - 재질서화의 성공 : 높은 차원에서 안정화 된다.

자연존재는 해체의 일방향으로 간다. 산은 점점 깎여서 바다로 간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가만히 두면 모든 것이 조금씩 무너져서 평평해진다. 100억년 후에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 태양은 식어버리고 지구는 수소를 연소시켜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버린 결과로 부풀어올라 팽창된 태양에 흡수된다.

그러나 현재로서 인간의 인식은 창세기의 표현대로 날로 생육하고 번성한다. 문명은 더욱 높이 건설된다. 한편으로 문명의 건설은 오히려 불안정을 심화시킨다. 문명의 발달은 지구라는 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21세기가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깨달음이다. 그것은 날로 불안정화 하고 있는 문명의 재질서화에 성공하여 안정화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의 발전을 멈추고 자연으로 되돌아감이 아니라 문명 그 자체에 내재한 자연스러움을 촉발시켜 문명이 스스로 재질서화에 도달하는 것이다.

● 아폴론의 코스모스 - 봉건독재.. 힘을 소비하여 위험을 감소시킨다.
● 디오니소스의 카오스 - 과도기 질서.. 힘이 없으므로 위험이 증가한다.
● 깨달음과 사랑 - 민주질서의 안착.. 새로운 힘을 얻어 위험에 대비한다.

아폴론의 운동은 ‘계’를 중심으로 연역하여 성립하는 바 존재는 그 계가 사전에 확정되어 있는데 비해, 디오니소스의 인식은 귀납하므로 그 ‘계’의 바운더리 범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만유는 모든 건축물이 중력에 의존하듯이 또 모든 공동체가 사랑에 의존하듯이, 모든 깨달음이 진리의 완전성에 의존하듯이 본질이 되는 토대가 있는 법인데 존재는 그 계의 바운더리가 분명하지만 인식은 그 토대가 불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전개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할 때 그 토대가 찾아진다. 자연의 질서를 성립시키는 중력이 찾아지고 생명의 질서를 담보하는 태양이 찾아지고 인간의 질서를 성립시키는 사랑이 찾아지고 지식의 질서를 담보하는 깨달음이 찾아진다. 그 방법으로 완성된다.

존재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완전에서 불완전으로, 바깥에서 안으로,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이행하므로 초기 단계에서 그 질서의 토대가 자연히 드러나지만 인식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이행하므로 그 시작단계인 무질서의 단계에서는 토대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끝까지 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개혁이든 시작 단계에서는 무질서처럼 보여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그리고 깨달음은, 그리고 사랑은, 그리고 인문정신은 그 불분명한 토대를 찾아가는 험난한 순례의 여정인 것이다. 마침내 그 토대를 발견했을 때 그리하여 질서에 도달했을 때 그 예술은, 그 작품은 완성도를 얻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 토대를 발견했을 때 개인은 사랑을 얻어 가족을 이루고 지식은 깨달음을 얻어 인식의 비약을 이루는 것이다.

존재의 붕괴는 에너지가 외부에서 동력원으로 주어지지만 인식의 창조는 외부에서 동력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내부의 동력원이 그 생기와 활기로 스스로 약동할 때 그러한 활동이 일정한 영역에서 공명하여 상승효과를 이루는 바 그 울림과 떨림이 바운더리 전체에 전해져서 그 반향이 돌아오는 효과를 보고 미루어 판단하여 그 토대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이다. 그 시점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랑이 그리고 깨달음이 그리고 진리의 보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에 따라 건축가가 건물을 지을때 처음에는 자신이 중력이라는 접착제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 건물이 2층과 3층으로 올라가다가 결국은 붕괴되고서야 비로소 그 중력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공동체에서의 삶을 영위할 때 처음에는 사랑이라는 접첵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모진 세파에 부딪혀서 병들고 소외되고 상실하여 상처입을 때 비로소 사랑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화가가 용의 눈을 그릴 때 까지 그 진가는 드러나지 않고 연주가가 연주를 완성시킬 때 까지 그 화음은 발견되지 않는다.

존재는 처음부터 중력에 의해 운동이 촉발된다. 예컨대 산사태가 난다면 처음부터 중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은 그 중력의 존재를 처음에는 깨닫지 못한다.

최초에 한 장의 벽돌을 쌓았을 때는 그 건물이 위험하다는 인상을 얻지 못한다. 열 장 스무 장의 벽돌을 탑처럼 높이 쌓아 놓고서야 비로소 위태로움이 발견되는 것이다.

재질서화 과정에서 인식의 불완전성이다. 존재에서 모든 운동은 ‘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바 인식영역에서는 그 ‘계’가 없이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이 위태롭다. 인식은 그렇듯 불완전하므로 카오스이고 불완전하므로 디오니소스인 것이다. 그러나 인식은 그 위태로움이 극한에 다다를 때 오히려 그 토대를 얻는다.

존재는 연역적으로 성립하지만 인식은 귀납적으로 성립한다. 연역은 완전성을 전제로 하여 출발하고 귀납은 그 완전성의 전제를 깨닫지 못한 채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귀납은 많이 실패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부단히 실패한다. 인간의 창의는 무수히 좌절한다.

존재는 질>입자>힘>운동>량의 순서대로 점차 범위를 좁혀가는 합리적인 진행을 갖는다. 인식은 량>운동>힘>입자>질의 순서대로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비합히적인 진행을 갖는다. 이 경우 점차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길을 잊어버리고 동어반복의 미로에 빠져 허우적 대곤 한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존재의 경우 힘이 운동에 앞서 나가며 운동을 촉발하는데 비해 인식은 힘이 없이 스스로의 운동을 통해 힘을 찾아나선다. 힘이 없는 상태에서 힘을 찾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자산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식은 자기 내부에 정기(精氣) 혹은 생기(生氣)와 활기(活氣)라는 이름의 작은 동력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부에 동력원이 있는 약한 개체가 운동을 통하여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문득 상승효과를 얻으면 거기서 힘을 발견하는 식이다. 존재는 주어져 있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며 인식은 없는 힘을 환경과의 교감을 통하여 어렵게 찾아내는 것이다.

최종적인 바탕은 토대가 되는 질(質)이다. 인식에서 그 질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다만 확률로 접근할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 질(質)을 찾아낼 때 위대한 비약을 얻는다.

존재는 기계적인 작동을 하므로 처음부터 결과가 예정되어 있지만 인식은 이심전심으로 소통하여 우연히 공명할 때, 그 질(質)을 포착하므로 다만 확률로 성립할 뿐 애초에 결과가 확정되어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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