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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난동의 본질

헬싱키에서 끌고 온 당나라 군대

기원전 490년에 있었던 마라톤 평원에서의 승리는 알려진 바와 같다. 그리이스의 정예 중무장 보병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한 것이다. 10년 후 페르시아는 대규모의 병력을 일으켜 다시 침략한다.

아테네인들이 델포이의 신전으로 몰려가서 신탁을 들었는데 ‘나무로 만든 벽 뒤에 숨으라’는 점괘가 내려왔다고 한다. 집정관 데미스토클레스는 나무로 만든 벽이 그가 주도하여 건설한 해군 전함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아테네 주위에 심어진 가시나무 울타리가 ‘나무로 만든 벽’이라고 믿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아테네 성인 남자들이 200여 척의 3단 노선에 타고 살라미스 섬에서 페르시아 해군과 결전한다. 그 한 번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전함 400여척 중 절반 이상을 격파했다.

10년 전 마라톤 평원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한 엘리트 보병의 승리다. 이들은 자기 돈으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던 중상층 이상의 시민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당시 무기는 구리로 만들었는데 구리는 철과 달리 희귀하므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다.)

반면 10년 후 살라미스에서의 승리는 노꾼으로 참전한 가난한 서민의 승리였다. 그들은 훈련되지 않은 보통사람들이었다. 이후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획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가난한 서민의 권리가 극적으로 신장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역사에 무수히 있어왔다. 예컨대.. 독립전쟁 후 시민의 발언권이 확대되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느슨한 연방제 형태의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출범하게 된 미국의 예가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리이스 이외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례는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이 서구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산악이 많은 그리이스의 지형적 특성 상 인구가 외부에서 잘 유입되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하다.

예컨대 페르시아라면 거듭 승리하여 참전한 군인의 위상이 상승한다 해도 외부에서의 대규모 인구유입으로 그 밑에 새로운 하층계급이 생겨나기 때문에 아테네식의 민주주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만약 미국이 유럽의 어느 한 귀퉁이에 붙어 있다면, 프랑스의 대혁명과 같은 사회변혁이 성공한다 해도 다시 나폴레옹과 같은 독재자가 등장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

MBC 사태의 교훈

우연히 일어난 일과성의 해프닝이 아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네티즌의 발언권이 극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MBC의 난동으로 좌파 먹물들과 네티즌 일반이 서로의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 일대 사건이다.

반드시 일치하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던 중상층 시민의 승리였던 마라톤 평원에서의 승리가 좌파 먹물들의 승리라면, 살라미스 해전은 네티즌 일반의 승리가 되겠다. 똑 떨어지는 비유는 아니지만 분명히 그러한 측면이 있다.

진영논리에 따라 그들은 당연히 그들의 편에 섰고 네티즌은 본능적으로 네티즌의 편에 선 것이다.(이건 옳고 그름을 떠나 원초적인 것이다. 네티즌 입장에서 MBC의 난동은 취재윤리를 떠나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반칙행위다.)

물론 네티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원인을 좌파 먹물의 시조라 할 플라톤은 아테네의 과도한 민주주의 탓으로 돌렸다. 역시 일리가 있다.

과도한 발언권을 얻은 하류층 서민들이 제멋대로 행동한 결과로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잘 단결한 스파르타에 패배한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데미스토클레스도 나중에는 모함을 받아 도편추방제로 제거된 예가 그러하다.

그런 식의 추방과 역추방이 수도 없이 반복된 결과로 점차 쇠약해져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고 만 것이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좌파 먹물들의 깊은 우려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점점 아테네로 변질되어 가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애국주의, 파시즘 용서할 수 없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한국이 민중이 활개치는 개판 오분전의 아테네가 되는 꼴을 못봐주겠다. 우리나라는 엘리트 귀족의 지배아래 질서정연했던 스파르타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테네는 개판 오분전이었다. 그 결과로 아테네는 망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그 유명한 ‘국가’를 써서 ‘민주주의야 말로 나라 망치는 주범이다.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철인에 의한 일인독재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세련되지 않은 민주주의가 그 특유의 마녀사냥으로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쨌든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은 좌파 먹물이다. 이천삼백년 후에 온 마르크스가 플라톤의 국가론을 계승하고 있음도 물론이다.

윤리냐 진영이냐?

윤리운운은 처음부터 개수작에 불과하다. 이 싸움은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제기된 사건이다. 윤리를 따지려면 힘 센 조중동이나 딴나라나 삼성을 건드렸어야 했다. 나쁘게 말하면 그들은 헬싱키선언이라는 이름의 당나라 군대를 끌고 와서 아군을 등뒤에서 친 격이다.

결국은 이념에서, 그리고 가치관에서 그들과 우리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그 커다란 간극이 이참에 발견된 것이다.

문제는 이상주의다. 우리가 이상적인 국가라고 여기는 모델과 그들이 이상적이라고 믿는 국가모델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가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라 부르는 아테네의 서민중심 민주정치를 플라톤은 끔찍한 중우정치로 묘사했듯이.

이해찬.. “지금은 98년 이후 가장 안정된 상태다.”

조중동.. “나라가 망했다. 에고에고..”

조중동을 애독하는 바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굉장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경제는 파탄났고 나라는 결단이 나고 말았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실제로 조중동을 읽다 보면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이는 가치관의 차이다. 활짝 꽃피운 그리이스의 민주정치가 플라톤류 먹물들에게는 끔찍한 정치적 혼란기로 보이는 것이다.

“도대체 도그마가 아닌 시장이 지배하다니 참을 수 없다. 차라리 스파르타로 이민가고 말지.”

이렇게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다수의 폭민(暴民)에 의한 정치(mobocracy)가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다수의 빈민에 의한 정치(ochlocracy)가 된다. 비유하자면 진중권 플라톤은 네티즌을 광기로 가득찬 ‘폭민’으로 보고 진보누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네티즌을 ‘거지떼’로 보고 있는 것이다. 2300년 전부터 좌파들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끔찍한 고통이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수구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좌파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폭민정치를 극복하기 위하여, 지식인 중심의 정교한 사회 시스템에 의한 지배를 주장하는데 비해, 수구들은 권위주의와 자본에 의한 엄격한 지배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좌파와 수구의 해결책은 정반대지만, 민주주의를 혼란으로 보고 네티즌을 폭도나 거지떼로 보는 시각 자체는 동일한 것이다.

(예컨대 이문열은 “노무현은 무방하다. 근데 노사모는 사회 질서를 해치는 홍위병이기 때문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노무현은 괜찮은데 노사모가 무섭다? 그는 실제로 노사모가 두려워서 그가 운영하는 부악문원 숙생도 뽑지 못하고 있다. 요즘도 밤 마다 악몽을 꾸고 식은 땀을 한 사발씩 흘리는지 이문열에게 물어보고 싶다.)

로마인가 스파르타인가?

역사는 흐른다. 진보는 이론이 아닌 역사가 결정한다. 몇 가지 모델을 생각할 수 있다. 아테네모델과 스파르타 모델, 그리고 로마모델을 생각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아테네 혹은 스파르타가 민주주의 모델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은 철저하게 폐쇄적인 그리이스 특유의 지정학적 구도 때문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말하면.. 어느 면에서는 스파르타가 더 민주적이었다. 여성의 권익이 아테네 보다 높았고 철저한 평등과 완전한 참정의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스파르타의 시민은 평범한 시민이라기 보다는 소수의 특권귀족이었다.

그들은 소수 정예의 엘리트 시민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도 발언권을 가졌던 아테네와는 다르다.(스파르타에서 여성이 우대받은 것은 남자들이 전쟁에 출정했을 때 여성의 힘으로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 스파르타 - 폐쇄된 내륙국가로 외부영향의 유입을 적극 차단한다.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즉 형식적으로는 완전한 민주주의 모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격한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파시스트 사회이다.

● 아테네 - 바다를 통해 바깥과 연결된 개방적인 사회이다. 가난한 서민들이 주도하는 무질서한 사회로 새로운 시스템을 끊임없이 실험한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스파르타가 낫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아테네가 앞섰다.

● 로마 - 지나친 개방이 부작용을 낳았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시민권이 남발되는 바람에 시민사회의 주도권이 무너져서 민주주의가 죽었다.(동방국가들은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스파르타는 폐쇄사회이고 아테네는 개방사회이다. 로마는 지나친 개방으로 동방의 전제국가를 닮아갔다. 문제는 한국의 좌파들이 천성적으로 스파르타의 폐쇄를 지향하고 아테네의 개방을 혐오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한국의 민주화는 스파르타적인 권위주의 독재에서 아테네적인 자유분방함으로 넘어온 과정이다. 그러나 MBC PD들의 난동에서 우리는 스파르타의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그것은 으스스한, 소름끼치는 공기다.

옛 독재자는 총칼의 완력으로 지배했지만 새로운 독재자는 지식과 도그마와 윤리(실제로는 깡패지만)로 지배하려 든다. 좌파들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네티즌들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다.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할 사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윤리의 칼날을 들이대는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스파르타적이다.

관점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좌파들은 네티즌들이 난동을 일으켜 아테네가 되어야 할 한국을 로마로 만들고 있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있어서 노무현과 황우석은 로마의 민주주의를 종식하려고 하는 카이사르와 같다.

로마의 역대 황제들이 게르만족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남발하여 자기편으로 삼는 방법으로 독재를 휘둘렀듯이, 노무현과 황우석은 네티즌들을 선동하고 그들을 참정하게 하는 방법으로 카리스마를 생산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한국은 좌파의 지식독재에 의해 스파르타로 되어갈 것인가 아니면 노무현의 포퓰리즘에 의해 로마로 되어갈 것인가?

정답은 역사가 말한다.

스파르타가 귀족 중심의 파시즘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폐쇄된 내륙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부에서의 인구유입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하층민의 신분상승을 제한할 물리적 수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테네가 서민 중심의 민주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항구를 끼고 있어서 끊임없이 외부에서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계층간의 신분이동이 활발해서 상층부 귀족이 하층민을 억누르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로마가 제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카이사르 이후 식민지가 늘어나서 로마의 국가규모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도시 인구가 몇 백만을 넘어버리면 직접 민주정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요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대두한 네티즌을 동원할 수 있는가이다. 차기 대선에서 네티즌이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면? 살라미스 해전을 포기하고 육지에서만 싸운다면? 네티즌의 발언권은 약화되고 좌파들의 좋은 시절로 간다.

좌파들은 훈련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윤리와 도그마가 남발되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엠비씨가 국민을 고문해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즉 로봇에 가까운 무감각 체질의 소유자들이다.

네티즌들은 그렇지 않다. 도그마와 윤리의 억압이 남발되면 고통을 느낀다. 엠비씨의 난동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진중권들이 탄핵에 버금가는 이 스트레스의 강도를 알아채기는 불가능이다.

육전인가 해전인가?

문제는 역사다. 인터넷이라는 신항로의 개척 덕분에 다음의 전쟁은 육전이 아닌 해전으로 간다. 육지로 오는 길은 고갯마루에서 막을 수 있다지만 바다로 뚫린 길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변하고 마는 것이다.

육전은 져도 도망갈 곳이 있지만 해전은 지면 전멸이다. 퇴로가 없는 싸움이다. 배수진 보다 더한 수중진이다. 한 싸움으로 형세를 결정한다. 네티즌은 감히 이러한 싸움을 꿈 꾸고 있다. 겁도 없이 말이다.

전쟁의 예를 들었지만 옛날 이야기고.. 이제는 전쟁이 아니라 산업에서 더 많이 이루어진다. 산업이 시골사람을 도시로 불러들이고, 산업이 그들로 하여금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인터넷 신문명의 등장 자체가 이 전쟁의 성격을 육전에서 해전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육전에서는 관우와 장비가 있어야 한다. 한 칼씩 쓴다는 여포와 마초와 조운과 황충과 주유가 엘리트 전사로 나서주어야 한다. 맹장이 필요하다. 장수는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해전은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오직 리더의 결단이 필요할 뿐 관우, 장비 따위 장수들은 필요없다. 제독은 이순신 장군 하나로 족하고, 넬슨 하나로 족하다. 스파르타군은 모든 병사가 용맹했다지만 아테네는 ‘지상의 제우스’라 불렸던 페리클레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먹었다.

헬싱키에서 끌고온 당나라 군대

어느 면에서 본다면 스파르타는 완벽하게 설계된 이상국가다. 반면 아테네는 무질서와 혼란 그 자체다. 결국은 스파르타가 이기고 아테네가 졌다. 그러나 아테네는 문명을 남겼고 스파르타는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다.

왜인가?

스파르타의 모범은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듯이 어떤 천재가 저 혼자 골방에서 끙끙거리며 짜낸 것이다. 그 설계가가 천재적인 설계가이기는 하다. 천재 마르크스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거기에는 엄마의 산고(産苦)가 들어있지 않다. 거기에는 창조의 고통이 생략되어 있다. 그건 사이비에 불과하다.

반면 아테네의 모범은 무엇인가? 서민이 중심이 된 결과로 혼란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아기를 낳는 엄마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관습법이다. 김용옥이 갈파하고 있듯이 진정한 헌법은 유진오를 비롯한 친일찌꺼기 몇 넘이 하룻밤 사이에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419와 518 그리고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피의 기록 그 자체다.

헌재가 말하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그 아스팔트 위에 흘려진 피의 기록이 진정한 관습헌법이다.

진정한 윤리란 진중권이 헬싱키에서 끌고온 당나라 군대가 아니라,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무수한 갈등과 투쟁 끝에서 얻어낸 바 대한민국의 지혜의 총합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윤리다.

거기에 피냄새가 나지 않으면, 거기에 엄마의 산고(産苦)가 묻어나지 않으면, 거기에 창조의 고통이 스며 있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무질서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좌파먹물과 도그마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민중의 대결이다. 그 무수한 창과 방패의 대결의 끝에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들어서 진짜 윤리가 만들어진다. 우리 그러한 창조의 과정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좌파들은 그 산고를, 엄마의 고통을, 창조의 고통을 혼란으로 여긴다. 거기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거기서 파시즘을 연상한다. 수구도 마찬가지다. 수구와 좌파는 공통적으로 아테네의 자유분방함을 못견뎌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노무현의 떠들썩한 참여정치는 이회창이 주장하는 ‘반듯한 나라’가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민중은 그 스트레스를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믿어야 한다.

민중에게 있어서 그것은 혼란이 아니라 열정이고 생명력이다. 광장의 시끌벅적함을 두려워 해서 안 된다. 그들의 눈에는 광기로 보이겠지만 네티즌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

네티즌들은 반대로 그 산고를, 그 엄마의 고통을, 그 창조의 고통을 편하게 생략하려는 좌파들의 강령, 윤리, 도그마에 오히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스파르타의 억압으로 여긴다.

결론하자. 스파르타의 길과 아테네의 길, 그리고 로마의 길이 있다. 서구는 스파르타의 질서정연함 택했고 미국은 로마의 패권을 택했다. 한국은 아테네의 열정을 선택하고 있다.(이 비유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저녁 9시만 되어도 일제히 도시의 불이 꺼지는 유럽의 을씨년스런 풍경에서 스파르타를 연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역사가 이렇게 가는 이유는 한국의 지정학적 구도가 항구를 끼고 있는 아테네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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