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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999 vote 0 2024.08.02 (11:19:45)

    구조론은 객체 내부를 본다. 처음으로 내부를 들여다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자연 내부를 본 것이 박물학이다. 엄청나게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놀랍게도 그중에 맞는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압도적인 아이디어 숫자에 감탄해야 한다. 일단 량이 많다. 해석은 틀렸지만 막대한 분량의 단서가 주어졌다.


    그는 거대한 신대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가 신대륙에서 보고 와서 인류 앞에 보고한 내용은 죄다 틀렸지만 무언가를 많이 본 것은 사실이다. 잘못 해석했지만 의미 있는 단서를 인류 앞에 던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 내부로 가는 길을 열었기 때문에 후학들에 의해 근대과학이 탄생했다.


    플라톤이 밖을 볼 때 그는 안을 봤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그림 가운데를 차지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플라톤은 하나의 근원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수한 변화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하나의 태양이 땅에서 무수한 그림자를 만든다. 구조론은 둘을 연결하여 경로를 추적한다. 하나의 근원에서 무수한 변화로 가는 것은 복제다.


    처음으로 마음 내부를 본 사람은 프로이트다. 역시 아이디어가 왕창 쏟아졌다. 그런데 죄다 개소리였다. 프로이트의 해석이 틀렸지만 후학들은 프로이트가 만든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자본 내부를 처음으로 본 사람은 마르크스다. 역시 개소리가 태산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인류의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내부를 봤고, 엄청나게 많은 아이디어를 생산했고, 죄다 개소리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놨다는 점이다. 다들 밖에서 헤매고 있을 때 처음으로 내부로 가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내부를 보려면 도구가 필요한데 도구가 없으니 헛소리가 될밖에.


    인류가 지금껏 외부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를 보자마자 태산처럼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외부를 보는 도구는 눈코입귀몸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외부를 본다. 내부는 무엇으로 볼까? 보려면 도구가 있어야 한다. 내부를 외부화하면 된다. 의사는 환자의 배를 째면 내부를 볼 수 있다. 어떻게 배를 가르지? 구조로 갈라야 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내부를 볼 수 있다. 에너지 전달경로를 추적하면 객체 내부를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능적 외부 집착이다. 인간은 무조건 외부를 본다. 무당한테 물으면 무조건 원인은 외부에 있다고 말한다. 외부의 귀신이 범인이다. 외부에서 삼재가 들었다. 외부에서 동티가 났다. 외부에서 급살을 맞았다. 원인은 원래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외부집착이라는 질병에 걸렸다.


    인간이 그렇다. 무조건 외부에 원인이 있다고 믿는다. 누가 외부에서 저주를 걸었다. 누가 외부에서 음모를 꾸몄다. 외부에서 미국 잠수함이 세월호를 받았다. 한강 물속에 진흙뻘이 있고 의대생의 신발이 진흙에 박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사코 외부에서 누가 떠밀었다고 주장한다. 외부원인이 있으면 내부원인도 있는게 맞는데 무조건 외부원인만 고집하는게 인간이다. 인간 100명이 있다면 100명이 다 개소리한다. 전문가들은 내부 원인을 짚어주지만 자기가 잘 아는 전문분야에 한해서만 그러하다.


    TV에서 헛소리하는 박사들의 특징은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닌 것이다. 환빠들 중에 역사학 전공한 사람은 없다. 내부를 보려면 도구가 필요하므로 전공 분야의 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하는 소리는 무조건 헛소리다. 윤석열이 검사 주제에 정치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비전공자가 깝치면 망친다.


    내부 구조를 본 사람은 더 있다. 피타고라스다. 그는 처음으로 화음을 들었다. 두 음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내부를 본 것이다. 외부의 물체를 두고 길이를 재고 높이를 재고 무게를 재던 외부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도형 내부의 관계를 추적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도 같다. 부피와 무게의 관계를 추적했다. 관계는 내부다.


    원근법의 발견도 내부의 관계를 본 것이다. 인류는 외부의 형태에만 주목하다가 처음으로 내부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었다. 안을 보라.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감추어진 내부를 아는 것이다. 환자의 배를 째면 되고 자동차를 분해하면 된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대략 1초 안에 판단할 수 있다. 정보가 안에서 나오면 참이고 밖에서 겉돌면 거짓이다. 구조론은 내부를 보는 논리다. 에너지의 전달경로를 추적하면 된다. 에너지는 밸런스와 축을 따라 단계적으로 내부로 침투해 들어간다.


[레벨:12]가랑비가 내리는 날엔

2024.08.02 (11:52:29)

관계를 이루는 토대의 작동구조를 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추론이 철학이다

2024.08.04 (23:33:37)

https://gujoron.com/xe/?mid=gangron&search_keyword=%EB%B0%96&search_target=title&document_srl=366039


예전에 제가 구조론에서 접한 안과 밖의 대한 개념과

지금 구조론에서 다루는 안과 밖의 개념이 헷갈렸는데

 

제가 예전에 알고 있던 구조론에서의 안과 밖의 개념은

사과가 빨간 이유를 사과에서 찾지 말고

사과 외부의 있는 환경에서 찾으라고 이해했습니다


마치 아이가 문제가 있으면 아이만(안) 보려 하지 말고

가정환경(밖)을 통해 아이를 보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지금 다루는 안과 밖의 개념에서 안쪽은

가정환경이라는 전제 안에서 아이를 보라는 식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전체에서 부분으로 전제를 정해놓고 연역추론을 하라는 식으로 보면

예전에 사용하던 밖의 의미와 지금에서 사용하는 안의 의미가 동일한 의미라고 해석이 됩니다

지금 사용하는 안과 밖의 개념은 계 내부, 계 외부, 계 안쪽, 계 바깥쪽 이런 식으로 계를 붙이면 이해가 잘 되네요


제가 애로우 잉글리시에서 배운 영어 전치사 개념은 한국 사전과 뜻이 반대되지만 전달 의미는 다르지 않는데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이 있다면

I am in the house

한국식 : 나는 집 안에 있다

애로우식: 내가 있고 둘러싸는 게 집이다

전달 메세지는 동일하지만 전치사 부분에서 번역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예전에 구조론에서 다룬 안과 밖의 개념과

지금 구조론에서 다룬 안과 밖의 개념은 전달 메세지는 같지만 단어 선택이 반대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 바꿨는지 궁금합니다


예전에 사용하던 안과 밖의 개념은 사물을 주체로 두고 사물 안을 보지 말고 사물 밖을 보라는 의미 같고

지금에서 사용하는 안고 밖의 개념은 사건을 주체로 두고 사건 밖을 보지 말고 사건 안을 보라는 개념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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