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보다 크다.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은 금붕어와 다를 바 없다.’ - 머리 겔만 새로운 생각이 등장하면 낡은 생각에 매달리는 사람과 갈라서게 된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된다. 인류는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서로는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자와 양자는 사유의 방향이 다르다. 원자는 밸런스의 중심점이다. 원자가 쪼갤 수 없다고 생각된 이유는 밸런스의 중심점을 쪼갤 수 없기 때문이다. 밸런스의 중심은 크기가 없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크기가 없어야 한다. 양자는 장의 밸런스 그 자체다. 양자는 원자와 달리 크기가 있다. 밸런스는 짝수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양자가 정수배로 존재하는 이유는 천칭저울의 팔이 둘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대칭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양자역학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 중에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없다. 원자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양자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중심점을 찾으려고 용을 쓰는 것이다. 저울의 중심점은 관측해야 도출된다. 물체를 올려서 계량하지 않는 빈 저울은 중심점이 없다. 양자의 위치는 원리적으로 없다. 저울은 지구의 중력에 잡혀 있으므로 자체 질서를 가지지 않는다. 양자는 원래 자체의 질서가 없다. ### 관점의 차이에 주목하자. 원자는 저울 밖에서 바라본다. 인류는 버스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관성력을 이해하려면 버스의 승객이 되어야 한다. 인류의 모든 사고는 밖에서 보는 사고다. 메커니즘은 안에서 작동한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려면 버스에 타야 한다. 닫힌계 내부 메커니즘을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사고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생각의 방향을 밖에서 안으로 틀면 된다. 밖에서 보면 절대 양자가 보이지 않는다. 원자는 내부가 없으므로 밖에서 본다. 인류의 모든 사고가 다 그러하다. 사건의 원인 측이 아닌 결과 측을 본다. 인간은 에너지의 입력 측이 아닌 출력 측을 본다. 칼자루가 아닌 칼날을 본다. 엔진이 아닌 바퀴를 본다. 동력원을 보지 못하고, 상부구조를 보지 못하고,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로를 보지 못한다. 인류는 주는 사람이 아닌 받는 사람 관점에서 생각한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다. 보이지 않는 감옥에 자신을 가두어 버렸다. 결정자를 보지 못하고 전달자만 본다. 세상의 반을 보지 못한다. ### 인류는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할 줄도 모른다. 문제를 주면 답을 찾아내는 사람은 많으나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없다. 생각한다는 것은 의사결정 메커니즘의 내부를 파헤친다는 것인데 기를 쓰고 내부를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나온 지 2500년이 지났는데 시학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인류 중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문학뿐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영화, 스포츠, 취미, 연예계 등 모든 문화생활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시학의 의미는 일치에 따른 전율과 증폭에 있다. 조절장치가 작동하여 호르몬을 끌어낸다. 한국 영화가 잘 나가다가 자빠지는 이유는 그러한 예술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이 인간의 심리적 에너지를 다루는 물리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모를 뿐 아니라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생각을 혐오하면서 그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그들은 물고기보다 진화했다는 증거를 보이지 못한다. 머리 겔만이 비웃을 만하다. 생각의 방향이 다른 인류의 등장에 의해 그들은 다른 세계의 존재가 된다. 생각하려면 도구가 있어야 한다. 수학 교사는 삼각자와 콤파스를 들고 다닌다. 생각의 도구가 없기 때문에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우연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으나 그것은 능동적인 생각이 아닌 문제의 자극에 의한 수동적인 반응이다.
###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한 줄에 꿰어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이를 각각 별도로 설명하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다.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이 에너지를 알고, 물질을 알고, 공간을 알고, 시간을 알고,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사실 누구도 모르고 있다. 양자역학이 코끼리라면 에너지는 코끼리 머리다. 물질은 코끼리의 몸통, 공간은 코끼리의 전시장, 시간은 코끼리가 관람객을 만나는 시간, 정보는 관람객이 동물원에서 본 것이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 모두 양자역학적 관점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양자가 장의 밸런스라면 공간은 밸런스를 만드는 방향전환, 시간은 방향전환에 성립하는 각운동량보존이다. 밸런스 하나로 양자와 원자와 공간과 시간과 존재가 전부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저울의 각 부분들이다. 이것이 내부 메커니즘을 보는 관점이다. 존재는 궁극적으로 방향전환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대칭으로 이루어진 저울이 방향을 바꾼다. 대칭을 이루려면 공간을 좁히는 대신 속도가 빨라져서 각운동량보존을 성립시켜야 한다. 파장이 짧아지면 시간이다. 존재는 밸런스를 맞추는 과정의 트러블이다. 단계적인 존재의 빌드업 과정에 에너지와 물질, 공간, 시간, 정보가 모두 포함된다. 존재의 빌드업 과정을 모른다면 양자역학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시공의 좌표에 물질을 올려놓지만 사실은 물질운동이 시공의 좌표를 만든다. 생각의 방향이 틀렸다. ### 빅뱅은 한 점에서 시작되었다. 여전히 한 점이다. 우주는 외부로 커진 것이 아니라 내부로 잘게 쪼개진 것이다. 이것이 안에서 보는 관점이다. 국소성의 원리는 깨졌다. 시간의 국소성도 깨진다. 우주가 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사실 중심의 사유를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논리 위주의 사고에 익숙해 있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기서부터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여러 현상들도 관측된 사실이다. 논리에다 사실을 맞추려고 하므로 어긋나고 만다. 태백산 꼭대기에서 조개 화석을 발견했다면 그곳이 옛날에 바다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바다가 어떻게 산이 되냐? 논리적인 설명으로 나를 납득시켜봐.' 이러면 피곤한 일이다. 설명할 수 없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이럴 때는 지적인 용기를 내야 한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두뇌를 참고할 수 있다. 뉴런은 연결되어 있다. 연결이 개별적 존재에 앞선다. 존재가 연결된게 아니라 연결이 나누어져 존재된다. 점이 모여 선이 되는게 아니라 선이 쪼개져서 점이 된다. 사유의 방향을 바꾸면 사실 중심의 사유를 할 수 있다. 각종 음모론, 편견, 고정관념, 확증편향이 판치는 이유는 이분법, 흑백논리, 양자택일, 이항대립과 같은 논리 중심의 사고에 매몰되기 때문이다. ### 작은 데서 큰 데로 범위를 넓혀가므로 논리 중심 사고의 오류를 저지른다. 넓히려면 연결해야 하는데 연결고리가 이항대립, 흑백논리, 양자택일, 이분법적 사고다. 그것은 모두 귀납적 사유다. 단계적으로 범위를 좁혀가는 연역적 사유로 바꿔야 한다. 밖에서 바라보는 관점에 갇혀 있기 때문에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밖에서 보면 모두 단절되어 있다. 안에서 보면 메커니즘에 의해 이미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결고리가 필요 없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획득하는 순간 이항대립적 사고는 극복된다. 양자를 먼저 깨닫고 그 양자라는 저울의 부속품들인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배워야 한다. 차례로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다. 그럴 때 사실 중심의 사유를 할 수 있다. 사실은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연결되어 있다. 연결 메커니즘을 모르고 이것과 저것을 억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이항대립, 흑백논리를 동원한다. 모든 오류는 논리문제에 의한 것이며 논리문제는 연결문제고 연결문제는 방향문제다. 밖에서 보면 단절된다. 원자는 작고 작은 것은 끊어져 있으니까. 안에서 보면 우주는 크고 모두 연결된다. 애초에 인류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시선의 방향의 차이가 인간과 원숭이를 구분 짓는다. 문명과 야만을 구분 짓는다. 엔진과 바퀴를 구분 짓는다. 주인의 사유와 노예의 사유를 구분 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