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종교는 예술처럼>

 

*법주사 주지 선출과 관련하여 이 글을 쓸 마음을 내었지만, 현재 법주사가 처한 상황은 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될듯하여, 저는 제가 쓰고 싶은 방향대로 글을 썼습니다. 조계종단은 현 종단 체제를 비판하는 사부대중의 또 하나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계종은 앞으로도 계속 흘러야 하는 불교의 한 종파인 만큼, 사부대중과 세속의 사람들이 종교가 어떻게 행위 할 때 종교를 따뜻하고 우호적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해서 겸허하게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아름답게 동그라미 하나 그려내지 못하면 결국 아름답지 못하게 마무리됩니다. 사람들 마음에 종교는 아름다운 동그라미 하나 그려져 충만함을 전달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반드시 거창한 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당신은 지금 당신의 인생의 어디쯤인가요?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아마도 불필요한 말인 듯싶습니다. 가장 그럴듯한 핑계를 제공해 줄 뿐이죠. 수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요. 오늘 우리가 느낀 감정의 흐름은 그 시간의 물결 위에서 누군가들도 이미 느꼈던 감정이겠지요. 오늘처럼 복잡한 감정의 파동은 그 누군가들의 고뇌를 이미 거치고서 어딘가에 기록되었거나 아직 기록되지 않았거나 일 테지요. 그러니 현재의 인간의 삶은 역사에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변화할 수 있는 기회는 늘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요즘처럼 인간 사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현실적 확증적 사례를 실제적으로 접하는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는 바람직한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모두 같다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인간 공동체는 이렇게 제 모습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가 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사람의 동선에 따라 공동체는 추적이 가능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의 동선을 다 추적한다면 공동체의 벤 다이어그램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인 것이지요. 당신은 어디에서 동선이 겹치며 어디에 소속되었고 주된 취향이 어떠한지 역시 드러내주겠지요.

 

하나의 장점이 있다면 하나의 단점은 그림자처럼 따라 붙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걸어온 길도 그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바로 그 길입니다. 그 하나의 장점을 찾고자 그림자가 따라붙는 것을 수용하고 흘러왔습니다. 종교의 발생은 장점에 그림자가 반드시 따라붙는 다는 필연을 전제하고 흘러온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모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순간의 여정은 용기를 필요로 하였을 것입니다. 그 용기를 본받아서 종교는 유구하게 전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렀지요.

 

사람들이 예술을 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현실적 위치를 재차 확인 받고 싶어서일까요? 고단하고 피로한 현실, 막막한 벽 같은 현실을 그대로 자기 안에 받아들이려고 예술을 접할까요? 워낙 광범위해진 예술의 영역에서 보자면 현재의 예술의 형태는 천차만별인 종교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모든 개별적 존재들의 정신세계만큼 개성적입니다.

 

예술과 종교가 겹치는 부분은 인간 사유 활동의 집적물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종교의 시작은 예술을 터부시한 측면도 있습니다. 예술은 작가의 생산 활동으로 인하여 무엇이든 형상화로 구현하니까요. 하지만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같은 양상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 역시 예술 작품을 접할 때의 예술적 체험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요. 물론 여기에서도 종교적 체험에는 어느 정도는 함정이 있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굳이 예술적 체험이라고 쓴 것입니다.

 

예술적 체험은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이상을 보게 합니다. 자신 안에 갇힌 자기를 열어줍니다. 종교적 체험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사람들은 피폐해지거나 삭막한 자기 마음에 예술적 체험이 흐를 때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생의 의지도 되살아납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생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여깁니다. 모든 존재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살아야 하는 것에 죽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을 완주하고 어느 순간 죽음을 맞지만, 죽음은 삶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어서 늘 죽음은 위협적으로 인간을 몰아 부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삶 안에서 죽음을 극복합니다. 삶을 위협하는 죽음을 극복하는 데 실질적인 종교가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간 사회에게는 무엇일까요? 종교는 사람들의 일상성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종교는 영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거대한 사회를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종교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게 전달되는 것이겠지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모두 생활인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심리에 영향을 더 많이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특정한 종교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여길 때 실망하여 이탈하는 사람들은 생겨납니다. 특정 종교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해도 이탈자는 생겨납니다. 어떤 종교가 표방하는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도 이탈자는 생겨납니다. 이탈자뿐만이 아니라 그저 지켜보는 이들이나 기성종교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기성종교 입장에서 보면 이탈자에 속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종교에 자신들을 다 포함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종교적 여론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선호도와 같은 것이겠지요. 큰 집단에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종교가 있건 없건 마찬가지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종교 여론은 이탈자에게 심리적 영향을 미칩니다.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하면 공통체가 상처받습니다. 그 상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대로 침투됩니다. 이 역시 종교가 있건 없건 모두를 막론한다고 여깁니다.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한 쪽이 아픈데 다른 한 쪽에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픔은 여려 형태로 나타지만, 결국 그 사회의 질적인 형태를 가늠해볼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결국 같이 아프게 됩니다. 점차로 확산됩니다. 아픔이 지나치면 일상이 황폐해집니다. 부패와 타락의 틈새로 그 무엇인가는 침투하게 됩니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과 연계되는 직접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이유는, 혹은 문학을 읽는 이유는 모두 예술성 때문입니다. 그 예술성은 모두 개인의 재능과 창작과 영감에서 비롯된 인고의 활동성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거쳐서 축적된 미적 가치이기도 합니다. 예술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에서 결정됩니다. 그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뚜렷한 길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 역시 예술로 인정 받는 것입니다. 하나의 작품에 자신의 고뇌와 삶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작품의 아우라가 생겨납니다.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일 것입니다. 빛과 어둠의 양면성에서 갈등도 클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한 길을 선택한 사람이 그 한 길을 계속 간다는 것, 그 길 위에서 자기 삶의 족적을 남긴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위대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자기 선택에 의한 이어달리기라는 역할을 완수했으니까요. 오직 한 길만을 갔을 뿐인데도 그 삶이 향기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는 이미 그 자체적인 규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규율을 수정도 하고 첨가도 하고 삭제도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규율의 골격은 큰 변화 없이 장대한 시간을 흘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니까요.

 

변화가 거의 없는 사회는 그 자체로 바깥세계와 차단막이 형성되는 환경입니다. 긍정적으로는 보호의 의미이고 부정적으로는 폐쇄된 사회라는 의미가 됩니다. 폐쇄된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갈등을 내부에서 무마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폐쇄된 사회의 안을 엿보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를 바깥 사회가 관여하기란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다고 여깁니다. 더구나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종교는 생활인들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그 생활인들은 정계, 재계, 문화예술계, 언론계, 차계 등등 모든 곳에 포진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시스템에 포진된 형태를 통하여 종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취하기도 합니다. 반면 각자의 사회적 직위는 상관없을지라도 종교적 규율은 그 삶 속에 침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감정의 선 문제이기도 합니다.

 

종교는 그 사람의 삶을 규정하기도 합니다. 겉으로의 사회적 신분과 내면의 종교적 소속에서 무엇이 더 사람에게 우선할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현대처럼 사회적 시스템이 발달된 시대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양면성이기도 합니다. 양면성은 늘 갈등을 촉발합니다. 개인의 내면에서부터 개인의 바깥 사회활동까지.

 

한 때는 조계종단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한 적도 있었고, 나만의 고뇌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경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게을리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불경이 말하는 바를 이해해 보고 싶었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나의 삶을 규정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접하면 내면에서 정신적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사유에서 보자면 불경은 내가 가진 정신세계보다는 더 큰 것이므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불경 공부와 조계종단의 모습에 대한 분노는 나의 내면에서 서로 충돌하여 괴로움을 주었지만, 그 충돌이 내 자신이 불경 공부를 그만두게 된 이유는 아닙니다. 불경 공부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관심의 영역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관심은 다양하게 확장되지만, 점점 더 포커스를 맞추는 핵심은 내면으로 더 깊게 침투되어 광범위한 화학작용을 일으키게 되니까요.

 

불경 그 자체는 방대한 공부라고 여깁니다. 익히 다 아실 테지만요. 불교는 이러한 길을 계속 가 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승려들이어도 좋을 것이고, 재가불자들이나 일반인이어도 좋겠지요. 여기서 생산된 사유적 정신활동이 세상으로 지속적으로 흘러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철학적 영역이므로 자기 혼자만 알아도 좋겠지만 공동체 사회활동에는 공유 개념이 있으니, 지적 생산활동으로 인한 생산물은 자기 바깥으로 유통되기 마련이지요. 종교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를 체험하게 하는 장소와도 같습니다. 공간적 체험은 쉽사리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찰이라는 공간은 승려들의 거처이기도 하지만 그 공간을 공유하는 재가불자들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공간에는 그 공간의 정체성을 밝히는 규율이 있습니다. 그 공간이 금지하는 것은 행하지 않을 때 공동체가 훼손되지 않습니다. 공간이 청정할 때 사람도 청정해집니다. 사람이 청정해지면 일상이 청정해집니다. 단지 청정할 뿐인데 사람은 숭고함을 전달 받게 됩니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마음이 공허해진 이유는 청정함에 대한 사유가 약해진 탓도 있습니다. 종교는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 거울에 비친 종교의 모습에 따라 사람은 숭고함과 비참함을 느낍니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모두 종교적 체험에 속한다고 봅니다. 양극단으로 치닫는 양가감정은 인간에게 혼란을 줍니다. 종교만큼 이 극단의 양가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도구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인이라 일컫는 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사유에서 불교는 여기까지 흘러 왔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불교는 미학적인 가치를 보존해 왔습니다. 붓다의 가르침 역시 청정하지만, 그 사유로부터 시작되고 그 뒤를 잇고 이은 선승들로 부터의 청정함 역시 현재의 불교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역사성에서도 빛과 어둠은 존재하지만, 불교문화는 그 자체로 유산이 되었습니다. ‘유산안에서 승려들은 살고 있습니다. 그 유산은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산을 관리하고 보존하고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본문이 승려들에게는 있습니다. 그 길을 선택하였으면 그 종교가 제시한 바의 질서를 올곧게 따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에 자주 노출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음이 주는 사나움 때문입니다. 인간의 피부가 옷이 필요하듯이 감정의 신경도 그리 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금세 피곤함을 느낍니다. 또한 인간은 늘 현실을 삽니다. 실존하는 존재이니까요. 어떻게든 현실을 잠시 잊어보고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산다는 것에는 너무도 자잘한 것에서부터 감당이 안 되는 일들까지 멈춤 없이 전진하는 사건의 연속과 같으니까요. 모든 사람은 늘 많은 생각을 하며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며 삽니다.

 

예술은 인간에게 그 자신과의 만나는 시간을 불현 듯 줍니다. 마치 음악이 가슴으로 흘러들어오듯 사람의 몸과 마음을 가득 충만하게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사람이 예술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라고 여깁니다. 잔잔하게 자기 안으로 흘러들어와 공허의 공간을 흐릅니다.

 

인간에게 예술성을 느끼게 하는 모든 예술적인 형태들, 인간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여 삭막함에서 벗어나 사람의 의지를 북돋아 주지만, 가장 인간다움을 깨우쳐 주는 감정은 숭고함이라고 여깁니다. 숭고함은 자기에게로 전달되어 교감을 일으킵니다. 자기 안에서 자기와의 소통을 일으킵니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그 느낌은 오히려 무아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자기를 규정하지 않아도, 굳이 자의식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자기와 자기 밖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그런 상태에서 오히려 인간은 자유로움을 체험하게 되니까요. 무아적인 체험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존재한다라는 충만함을 깨닫게 합니다. 종교가 주는 숭고함은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사람들의 발자취인 역사성과 그 안에 축적된 인간의 정신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불교는 시간의 종교입니다. 현재에서만 불교를 본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최초 시작에서 지금까지가 불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인류가 현재의 인류만 인류가 아니고 인류의 시작적인 최초의 시발점부터를 인류의 역사로 명명하듯이, 인류는 인류의 역사성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어져 왔다는 것이지요. 그 역사적 축적에 의해서 인간이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어가지 않으면 불교는 역사의 유물이 되겠지요. 불교는 어느 한 시대만을 딱 잘라서 불교하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역사적으로 이룩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룹니다. 마음에서 행위는 나타납니다. 종교가 세상에 기여하는 길은 사람들에게 덜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세속의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지만, 종교는 세속에게 등불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크게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세상에 상처만 안주고 각자에게 주어진 본분에만 맞게 살아도 할 도리를 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한 길을 가는 데에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불교는 자기 깨달음이기도 하므로, 스스로 자등명 법등명해야 하지만, 그 역시 누군가 밝혀 놓은 등불이 있기에 이어 낸 실마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늘 그 길을 열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가 사부대중의 종교라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나치게 현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사건이나 아름답지 못한 일들을 듣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들을 기만하는 것을 용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 자기가 속한 곳이어서 차마 말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저 자기 눈을 가려주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본래적인 청정한 상태를 원하는 것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제대로 맞서서 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또 정면으로 그 사태에 대하여 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시선이란 양극단이기도 합니다. 환대와 집중된 시선은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자유를 박탈하게도 하니까요. 당신은 시선에서 지금, 자유롭습니까?

 

당신은 언제 종교에서 숭고함을 느끼나요?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요? 그 긴 시간의 유산을 당신은 지금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하고 있는지요? 당신은 정말 유산 상속자의 역할을 제대로 행하고 있는지요? 이어달리기할 승려들을 불교에 맞게, 규율에 맞게, 사리에 맞게, ‘에 맞게 양성하고 있는지요? 사적인 관계나 가문에서 벗어나 대승적인 길을 가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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