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구조론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획에 대한 감이 있는 사람은 감각적으로 아는 것이, 그것은 화자와 독자가 어떤 주제를 공유해야 해야 기획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당신이 리더라면 그럴싸한 미래를 기획해야 한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구조론 안에서의 의미는 내가 생산한 어떤 것이 외부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에너지를 공급받는 상태에 놓이는 것을 말한다.
에너지라 함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밥을 먹는 구조가 점심시간에 기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나와 밥의 상호작용이 있기 전에 점심시간이라는 시공간적 원인은 반드시 존재한다.
기획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만의 기획이란 구조적으로 불성립이다. 깨달음도 비슷하다. 내가 깨달았다고 치자. 그래서 뭐? 그게 인류와 무슨 상관? 안물안궁이 되어버린다. 난 인류와 상관없이 내 만족 때문에 깨닫는 것인데? 에이, 구조론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립서비스로 이해해야한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구조적으로 불성립하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냥 있으면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에너지가 성립하지 않는 존재는 그 범위가 화자의 정신세계로 좁혀진다.
허언증이 이와 같다. 허언이 그것인 이유는 그게 타자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근데 사실 허언도 상관은 있다. 나름 자기 존재를 타인에게 증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친 놈의 개소리로.
구조론의 말씀을 듣다보면 남 신경 쓰지 말고 개인주의로 살라고 하는 뉘앙스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 결과 타인을 쌩까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더라. 근데 이때 개인주의는 일상의 개인주의와는 의미가 다르다.
사실 일상의 개인주의는 그 설명 자체로는 존재가 불성립이다. 자기만을 위한다?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서양의 개인주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개인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족주의인 경우가 많다. 무슨말이냐,
나의 어떤 행동과 말은 무조건 그 원인이 타자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개인주의를 구서하는 고양이조차 자세히 보면 주인을 의식한다.
구조론에서의 개인주의는 그 타자의 범위가 친구나 가족 직장, 학교 정도가 아닌, 인류로 그 범위가 확장된는 점이 일상의 개인주의와 차이점이다.
즉 한 마디를 하더라도 백만명이 지켜본다고 생각하고 그 시선을 의식하고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 처럼 무대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이게 어렵다. 관중을 의식하면 꼭 헛발질이다. 그들의 눈초리를 보고 있자면 왠지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할 거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자소서를 쓰는 법에 답이 있다. 자소서는 자소서가 아니다. 직장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기술적으로 포장하는게 이력서에 첨부되는 자소서다. 정말로 자기소개하면 서류 불합격인게 자소서의 실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의 컨셉은 그건 아닌거 같고.
그러면 우리도 대중이 원하는 답을 해줘야 하나? 이쯤에서 헷갈리는뎅? 스티브잡스를 참고해보자. 잡스는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게 될 것을 만들라고 했다. 이 개소리를 잘 해석해보자.
대중이 원하게 될 것은 곧 우리의 미래를 말하며 그것은 그들과 섞이되 그들을 따라가지 말고 리드하라는 말이다. 리드하려면 일단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뭘 알아야 제시를 하지.
이는 구조론에서 늘 강조하던 바가 아닌가? 내가 원하는 것도 대중이 원하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구조론적 존재, 혹은 기획의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구조론을 대하는 태도이다. 하다못해 공산당이라도 지목해야 존재가 성립한다. 물론 우리는 수준이 있으므로 좀 더 우아한 걸로 선택해보자. 사람들은 당신이나 당신의 말이 아니라 비전에 관심이 있다. 그게 존재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좋은 기획이 아니라 존재가 성립하는 기획을 하면 그게 좋은 것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구조론 안에서의 의미는 내가 생산한 어떤 것이 외부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에너지를 공급받는 상태에 놓이는 것을 말한다.
에너지라 함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밥을 먹는 구조가 점심시간에 기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나와 밥의 상호작용이 있기 전에 점심시간이라는 시공간적 원인은 반드시 존재한다.
기획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만의 기획이란 구조적으로 불성립이다. 깨달음도 비슷하다. 내가 깨달았다고 치자. 그래서 뭐? 그게 인류와 무슨 상관? 안물안궁이 되어버린다. 난 인류와 상관없이 내 만족 때문에 깨닫는 것인데? 에이, 구조론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립서비스로 이해해야한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구조적으로 불성립하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냥 있으면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에너지가 성립하지 않는 존재는 그 범위가 화자의 정신세계로 좁혀진다.
허언증이 이와 같다. 허언이 그것인 이유는 그게 타자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근데 사실 허언도 상관은 있다. 나름 자기 존재를 타인에게 증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친 놈의 개소리로.
구조론의 말씀을 듣다보면 남 신경 쓰지 말고 개인주의로 살라고 하는 뉘앙스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 결과 타인을 쌩까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더라. 근데 이때 개인주의는 일상의 개인주의와는 의미가 다르다.
사실 일상의 개인주의는 그 설명 자체로는 존재가 불성립이다. 자기만을 위한다?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서양의 개인주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개인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족주의인 경우가 많다. 무슨말이냐,
나의 어떤 행동과 말은 무조건 그 원인이 타자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개인주의를 구서하는 고양이조차 자세히 보면 주인을 의식한다.
구조론에서의 개인주의는 그 타자의 범위가 친구나 가족 직장, 학교 정도가 아닌, 인류로 그 범위가 확장된는 점이 일상의 개인주의와 차이점이다.
즉 한 마디를 하더라도 백만명이 지켜본다고 생각하고 그 시선을 의식하고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 처럼 무대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이게 어렵다. 관중을 의식하면 꼭 헛발질이다. 그들의 눈초리를 보고 있자면 왠지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할 거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자소서를 쓰는 법에 답이 있다. 자소서는 자소서가 아니다. 직장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기술적으로 포장하는게 이력서에 첨부되는 자소서다. 정말로 자기소개하면 서류 불합격인게 자소서의 실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의 컨셉은 그건 아닌거 같고.
그러면 우리도 대중이 원하는 답을 해줘야 하나? 이쯤에서 헷갈리는뎅? 스티브잡스를 참고해보자. 잡스는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게 될 것을 만들라고 했다. 이 개소리를 잘 해석해보자.
대중이 원하게 될 것은 곧 우리의 미래를 말하며 그것은 그들과 섞이되 그들을 따라가지 말고 리드하라는 말이다. 리드하려면 일단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뭘 알아야 제시를 하지.
이는 구조론에서 늘 강조하던 바가 아닌가? 내가 원하는 것도 대중이 원하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구조론적 존재, 혹은 기획의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구조론을 대하는 태도이다. 하다못해 공산당이라도 지목해야 존재가 성립한다. 물론 우리는 수준이 있으므로 좀 더 우아한 걸로 선택해보자. 사람들은 당신이나 당신의 말이 아니라 비전에 관심이 있다. 그게 존재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좋은 기획이 아니라 존재가 성립하는 기획을 하면 그게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