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언어로 상대를 이해하려 할 때 생기는 모든 오해는 '원인의 언어'와 '결과의 언어'를 구분하여 표기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렬님의 앞선 글(1+2는 3보다 작다)에서 제시된 것과 같이 "1, +, 2"와 "3"은 위상이 다릅니다만, 인간은 전혀 구분하지 않고 표기하죠.
최근에 토머스 쿤에 대해서 좀 읽어보았는데, (그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쓴 책의 제목도 '구조'입니다.) 그가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처음 학계에 제출했을 때, 상당한 오해를 받았었다고 하더군요. 죽을 때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하더군요. 아마 그의 '정상과학'이라는 개념이 전체주의적 맹목적이라고 오해를 받은듯 합니다.
그는 획일적이라야 오히려 다양하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이런 어려운 개념을 이해할리가 없죠. 원인의 획일과 결과의 획일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언어를 분절된 것, 혹은 입자적으로 바라보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죠.
위상이 높은 언어는 그 언어가 에너지를 품고 있기 때문에, 곧 하위 위상의 언어로 쪼개질 수 있다는(운동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이때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말도 상당히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한데, 대부분 인간이 에너지라고 하면 자동차 기름통에 기름이 차있는 것만을 생각하지만, 구조론에서의 에너지 개념은 더 포괄적입니다. '짝지어진 개념'이 곧 '에너지를 품음'입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게임의 맥락과 패러다임의 유사성에 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과학사(史)도 패러다임이라는 불연속적, 계단식 발전을 주장했었습니다. 당시에 철학사적 흐름을 고려했을 때, 인류는 처음으로 언어의 불완전성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막 제시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쿤은 스스로는 맥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어떤 용어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동렬님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입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다수의 당시 과학자들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위상이 높은(=원인의?) 언어는 그 언어가 에너지를 품고 있기 때문에, 곧 하위 위상(=결과?)의 언어로 쪼개질 수 있다는(운동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