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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030 vote 0 2018.09.26 (18:16:25)

      
    사실에서 사건으로


    구조론 마당 구조론의 기원 코너에 올라가는 글입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 둥 되도 않은 개소리가 초딩 교과서에 너무 많았다. 염소 두 마리를 끈으로 연결하여 묶어놓고 양쪽에서 먹이를 준다. 연결된 끈이 짧아서 어느 쪽도 앞에 놓인 먹이를 먹지 못하는 판이다. 마침내 두 마리 염소가 화해하여 다정하게 같은 쪽의 풀을 함께 먹는다. 바른생활 교과서의 한 장면이다.


    말이나 돼? 힘센 놈이 이기는 거지! 힘싸움을 해서 확실하게 서열을 정해놓으면 두고두고 의사결정이 쉽잖아. 먹이는 한 무더기인데 두 마리 염소가 한꺼번에 주둥이를 들이밀다가 입술끼리 충돌하면 꼴사납잖아. 뭐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중요한건 내가 기억했다는 점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두 마리 염소가 마주쳤다.


    서로 교착되어 고민하다가 마침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 다른 염소가 그 위를 지나간다. 해결 끝. 개소리다. 우선 외나무다리는 위험하니 건너지 말아야 한다. 중간에서 마주칠 것 같으면 미리 말을 해서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야지. 염소 등 위로 걸어가다가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등을 짓밟고 가라는게 말이나 돼?


    외나무다리 중간에서 마주쳤다면 힘대결을 벌여서 약한 쪽이 뒷걸음질로 물러서는게 맞지. 말도 안 되는 수작이다.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말이다. 초등학생이라고 놀려먹는 짓이 아닌가.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국어시간에 동시를 배우는데 이런 장면도 있었다. 버들강아지 꿈을 꾸는 봄이 오고 어쩌고 하는 내용이다.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지목하여 묻는다. 꿈이 뭐지? 내 앞까지 차례가 왔다. 꿈은 사람이 밤에 잠을 잘 때 나타나는..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선생님은 무시하고 지나갔다. 아무도 맞는 대답을 못해서 선생님이 화가 났는데 뒤늦게 누군가 정답을 말했다. 꿈은 생각입니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다. 납득할 수 없다. 


    꿈은 꿈이지 왜 생각이야? 버들강아지가 무슨 생각을 해? 버들강아지가 동물이냐? 과학자가 되기로 한 것은 이런 것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수학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곧 포기했지만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스퍼거인은 비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여간 짜증이 났다. 


    비유를 이해 못 한다기보다는 이런 것들이 가시처럼 걸린다는 점이 문제다. 어린이들을 이렇게 어르고 뺨치며 갖고 놀아도 된다는 말인가? 비유는 어리숙한 꼬맹이를 놀려먹기 위한 어른들의 못된 장난이다. 만화가들이 그림체를 이상하게 왜곡해 그리는 것도 짜증났다. 코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그리고 입은 옆에 붙인다. 


    비유를 이해 못하는 게 아니라 비유는 소실점이 어긋난 어색한 그림처럼 불편한 것이었다. 이현세 만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정성들여 그리기는 했는데 그림체가 묘하게 틀려먹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소실점이 죄다 틀어져 있다. 그래서 라고한다의 법칙을 만들어냈다. 납득이 안 되면 무슨 말에든 라고한다를 붙인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 왜? 선생님도 먹고살아야 하니깐. 그것이 선생님의 교육방법이라는 거지. 비로소 납득이 되었다. 왜 만화가는 이상하게 왜곡한 그림체를 구사하는 것일까? 만화가도 먹고살아야 하니깐. 특히 동물을 사람으로 의인화한 만화가 납득되지 않았는데 아량을 베풀어 이해하기로 했다. 


    동물이지만 사람인걸로 한다. 뒤에 ~라고한다를 붙이면 사실에서 사건으로 도약한다.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다. 사실이라면 관측자가 사건 안에 있지만 사건이라면 관측자가 배제되어 있다. 보다 객관화되는 것이다. 링 위에 오른 선수가 아니라 링 바깥의 관전자 포지션이 된다. 주최측이 된다.


    어느 말이 일등으로 들어와도 돈을 따는 경마장의 주최측과 같다. 상대가 내가 옳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래! 그래서 네 마음이 편하다면 네가 옳은 걸로 해줄께. 이렇게 빈정대는 거다. 냉소적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원효의 화쟁을 떠올려도 좋다. 사실에서는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충돌하게 된다.


    사건에서는 에너지의 통제권을 틀어쥐고 입맛대로 조율할 수 있는 작품이 되어준다. 모순되고 대립하고 충돌할수록 에너지는 흐드러지고 풍성해진다. 아름다워진다. 그래! 판돈 올리자고. 갈 데까지 가보는 거야. 대결해. 충돌해. 모순되어버려. 싸워봐. 주최측의 포지션에 서면 어느 쪽이 옳다고 판정할 필요가 없다. 


    어느 말이 이기든 이기는 말이 내 말이다. 그걸로도 한 번 가보는 것이고 이걸로도 한 번 가보는 것이고 나는 통계를 얻어 확률을 정하면 그만이다. 사실에는 정답이 있지만 사건에는 방향이 있다. 사실의 세계에서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잃게 되지만 사건의 세계에서는 서로 충돌시켜 놓고 에너지를 취한다. 


    사실의 세계라면 자본주의가 옳으냐 공산주의가 옳으냐 양단간에 결판을 내야 하지만 사건의 세계에서는 둘을 경쟁시켜 놓고 인류문명의 풍성함을 얻으면 그만이다. 사건에는 관점이 있고 각자의 포지션이 있다. 사건은 항상 더 높은 단계가 있다. 사건을 발전시킬 수 있다. 애들싸움을 어른싸움으로 만들 수 있다. 


    판돈을 올려 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다. 거기에 비전이 있다. 탈출구가 있다. 배후지가 있다. 교착을 타개할 수 있다. 에너지를 운용할 수 있다. 자유로움이 있다. 허허로움이 있다. 다만 방향성의 판단이 중요하다. 방향성이 없는 막연한 사건의 관점은 냉소적으로 된다. 허무주의가 된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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