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진리다. 인간들이 구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각자 수준대로 노는 것이다. 구조론의 답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내가 할만큼 했는데 환경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한국인은 그렇다 치고 구글 번역기가 업그레이드 되기를 기다릴 밖에. 지금은 그렇다 치고 제자를 기르며 미래를 대비할 밖에. 환경과의 긴밀함을 유지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환경과 거리가 멀어지면 내 책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으면 내 잘못이다. 내 처지가 이렇고 내 재주가 이러하니 그 다음은 세상이 알아서 할 몫이다. 진리를 영어로 번역할 적당한 말은 없다. 참? 우리가 진리라는 단어에서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은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다. 참이든 거짓이든 그것은 언어다. 진리를 언어에 가둘 수 있다는 말인가? 구조론의 진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다. 사건으로 보면 우주 안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진리다. 진리는 언어 안에 있지 않고 사건 속에 있다. 우리는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는 연결된 길이고 하나는 막다른 길에다 단절된 길이다. 당연히 연결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진리는 연결된 길이니 연결방법은 구조다. 진리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하고 또 갈 수 있는 길이다. 구조가 서로 다른 둘을 엮어서 연결하므로 길이 열린다. 그 길을 갈 수 있다. 구는 공간으로 연결하고 조는 시간으로 연결한다. 연결된다는 것은 통제가능하다는 것,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노상 신에게 기도하지만 신과 연결된다면 그 뿐 더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기도한다는 것은 단절되어 있으며 연결을 애걸한다는 의미다. 내 손을 잡아주세요. 이런 거다. 불쌍하다. 자식은 부모와 연결된다. 진리는 그런 거다. 자식은 부모와 통한다. 신과 통하지 못하므로 매달려 애걸하는 것이다. 미션으로 연결된다. 임무와 역할로 통한다. 미션을 수행하고 내가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자식이 받아도 좋다. 누가 대표로 대신 받아도 좋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음대로 해야겠다고 우긴다면 자기소개다. 그것은 콤플렉스를 들키는 것이며 열등의식을 보상받으려는 것이며 열패감을 극복하려는 것이며 수렁에 빠져서 구원의 동아줄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 자체로 게임에 지는 것이다. 이기려고 하는 즉 패배다. 주최측은 아무나 잘하는 팀이 올라가서 흥행되기를 바랄 뿐 우승을 바라지 않는다. 신과 통하는 사람, 진리와 연결된 사람, 역할과 임무와 미션을 얻은 사람, 이어진 길을 가는 사람은 주최측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게임을 하지만 승부에는 초연하다. 중요한 것은 롤 플레잉의 밸런스다. 진보와 보수가 팽팽하되 근소한 차이로 진보가 이겨야 밸런스가 맞고 흥행이 된다. 매번 실력있는 팀이 이겨도 재미없다. 신인이 이겨야 재미가 있다. 진보가 이겨야 하는 이유다. 독일팀이 이기면 월드컵은 하나마나다. 실력이 없는 한국팀에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다 경기장에 물만 뿌려서 그라운드에 논을 만들어도 안 된다. 주최측의 마음을 가지면 답이 나온다. 모든 비극이 열등의식의 보상, 이겨먹으려는 마음, 열패감 때문에 일어난다. 그들은 무언가 다짐받고 확인하고 인정받고 도장 찍고 격려받으려 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연결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연결될 때의 철커덩 하는 느낌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소인배의 상대 반응 끌어내기다. 상대방의 패를 봐야 자기 패를 결정할 수 있다는 하수들이다. 남녀가 연결되든 미디어로 연결하든 집단에 소속되든 환경과 긴밀하게 상호작용 하려는 것이다. 진리를 본 자는 우주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것은 방해자를 토벌하고 본래의 연결되어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하나는 끊어진 길이요 다른 하나는 연결된 길이다. 당신은 연결된 길을 선택해야 한다. 막다른 길을 선택하는 실패를 피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고민들은 사실이지 평판이니 체면 이니 위신이니 하면서 남의 걱정을 대신 걱정한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며 확률을 높여가면 된다. 그래도 결과가 나쁘다면 운이 없는 경우이며 그 운은 다른 사람이 대신 가져갔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내가 그 떡을 먹지 못했어도 나 대신 누군가가 먹었으면 반대로 남 대신 내가 먹을 확률도 높아졌으니 그것으로 나의 결정은 옳고 만족할만 하다. 기어코 내가 그 떡을 취해서 남들 앞에서 뽐내면 아빠한테 기특하다는 칭찬을 듣겠으나 내 나이 쯤 되면 내가 아빠가 되어 있다. 누구한테 칭찬들을 생각은 버려야 한다.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주최측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흥행은 되는게 좋다. 그래야 기세가 붙고 기세가 붙어야 다음 단계의 진행이 순조롭다. 진리를 안다면 내가 지금 해야할 일을 안다면 길이 연결되어 있다면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는 주최측의 포지션을 차지한다면 그 다음은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인생에서 바랄 것은 그것 뿐이다. 이것이 답이고 그 바깥은 없다. 당신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페이지 안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모두 연결되어 있는 우주적인 사건 안에서 연결을 찾고 긴밀함을 찾고 상호작용을 찾고 미션을 찾고 할 것을 하고 게임의 주최측이 되기다. 그 다음은 인간들의 노는 꼬라지를 지켜볼 밖에. |
평화롭다. 평화스럽다는
체가 아니라 용, 연결이 아니라 단절.
즉 평화는 그다지 평화롭지 않다는 것.
어디서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려야 진짜 평화인 것.
화성에는 평화가 있으니 모두 죽어서 불화를 일으킬 그 무엇도 없소.
연결되면 체를 이루고 단절되면 용으로 변하니
진리는 체고 평화든 자유든 행복이든 그 체에 연결된 팔다리 같은 것.
체와 용의 사유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체와 용
상수와 변수
알맹과 껍데기
빛과 어둠
이런 맥락에서 체를 설명한다면
평화와 폭력 혹은 평화와 전쟁으로 대비시킬 수 있는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거꾸로 교육받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평화를 체로 보지 않고 용으로 보는 게 대세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용인 폭력이나 전쟁을 체로 놓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는 단순히 어떤 상태나 용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본질로서 이미 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유달리 평화에 대해서만은 사람들이 체와 용의 사유를 거꾸로 적용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플러스 사고를 하기 때문에
어떤 개념이든 용으로 바꿔버립니다.
체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체에는 체가 없기 때문에.
체는 형체가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에.
사실 저는 평화를 용으로 보지 않고 체로 보아왔습니다.
평화는 그 자체로 상태가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자꾸 상태로만 보고 관계, 사이의 긴장 혹은 역동 혹은 에너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용으로 바꿔지지 않는가 봅니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사랑, 정의, 공정, 도덕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목록에 진리도 쳐넣어야 한다.소위 말해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혹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좋은 말들은 다 이 부류에 쳐서 넣어야 한다.
그런데 구조론의 진리를 "모두 연결되어 있음"으로 표현한다면, 실제로 위에서 말한 가치 기준으로 나열한 목록들, 추상명사들도 구조론의 자유, 구조론의 평등, 구조론의 평화, 구조론의 행복, 구조론의 사랑, 구조론의 정의, 구조론의 공정, 구조론의 도덕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어쨌든 구조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연결이고, 하나됨이라고 표현한다면, 결국 인류는 하나임을 깨닫게 하는 "평화"와 결국 맞닿을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모든 언어들은 따로 국밥이 아니라 한줄로 꿰지는 줄줄이 사탕이고, 결국 구조론이라는 진리 속에서 한솥밥으로 지어져야 한다.
어쨌든 위에서 김동렬 선생이 "진리"라고 표현한 것에 "평화"를 넣어서 읽어도 글의 모든 맥락은 통한다. 무엇보다 "평화"는 관계어이기 때문이며, 관계없이 평화없기 때문이다.
핵심은 구조에서 구가 공간 연결, 조가 시간 연결이라면, 결국 숙제는 구와 조 안에 존재하는 틈새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과 사람사이, 물질과 물질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를 연결하는 예술이 결국 구조론일테니...
아무리 붙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딱 붙어 있으면 그냥 하나인데, 아무리 붙어있는 것이라 여겨지는 물질이라도 그 안의 미시세계, 원자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공간과 시간이 존재할테니...
그렇다면 구조론은 어디까지 쪼갤 수 있을지,
그리고 쪼개진 두 파트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의 틈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연관이 있을 터...
결국 구조론은 자꾸 쪼개보고 그 사이를 들여다보는 사고틀임에 틀림없다.
이제는 생각으로 쪼개고, 쪼개서 드러난 시간과 공간을 자꾸 자꾸 눈 똑바로 뜨고 쪼개볼 일이다.
결국 진리는 평화이기에,
진리를 전할 때, 평화도 덩달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