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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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58 vote 0 2018.09.24 (22:47:01)

      
    구조론의 기원


    구조론 마당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구조론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쉽다. 그런데도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쪽을 보고 있으므로 어려운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백번쯤 반복하여 말해줘도 악착같이 손가락만 바라보는 데는 당해낼 장사가 없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말로 해봤자 안 된다. 막대기로 때려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줘야 한다.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눈의 문제다. 눈이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먼 산을 파고 있다. 물리적으로 타격해서 바로잡을밖에. 조론은 필자가 아홉 살 때 처음 착상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아홉 살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거다. 


    17살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는 얼개를 만들었다. 24살 때 존재론과 인식론의 형태를 완성했다. 구조론은 존재론이다. 연역이라는 말이다. 인식론으로 접근하므로 어렵다. 귀납하므로 어려운 것이다. 결과에서 원인을 보느냐 원인에서 결과를 보느냐다. 애초에 방향이 틀리므로 설명해서 이해하면 더 문제다. 


    잘못된 이해는 무지보다 고약하다. 설명하지 않겠으니 이해하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느껴라. 왜? 내가 느꼈으니까. 나는 누구한테 구조론을 배운게 아니다. 누구에게 설명을 들은 적이 없으니 설명할 수도 없다. 혹시나 알아들을까 싶어 억지로 설명하면서도 반대로 잘못 알아듣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구조론은 너무 단순해서 따로 설명할게 없는데 자꾸 설명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나마나 인식론의 귀납으로 접근하고 있는 거다. 설명해서 알아들었다고 말하면 그게 사실은 오해했다는 말이 된다. 존재론은 자연의 질서를 따라가고, 인식론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따라간다. 사과와 배와 복숭아와 감은 과일이다. 


    아니다. 자연에 과일이 있을 리 없다. 과일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자의로 지어낸 것이다. 사과 배나 감이 인간의 입맞에 맞춰주려고 당도를 높이고 신맛과 떫은맛을 보탠 것은 아니다. 거짓 관념에 속지 말자. 사과든 배든 복숭아든 인간과 상관없이 자연의 질서를 따라온 것이다. 그 질서는 자연 그 자체에 내재하는 원리다. 


    그것이 존재론이다. 구조론을 배우려면 존재론을 따라야 한다. 구조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식론으로 넘어간 반역자다. 배신자라 하겠다. 구조론의 길을 저버린 배신자들에게 선의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악의를 품고 오해하려고 기를 써야 가능한 실수를 면전에서 태연하게 저질러댄다면 묵과할 수 없다. 

    

    정 이해가 안 된다면 필자가 한 살 때부터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온 경로를 되밟아보기 바란다. 필자가 여느 사람들과 다른 점은 한 살 때 일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히 잊어버렸지만 나는 한 살 때부터 지식의 축적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더랬다.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생각해서 알아낸 것들이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한 살 때 일어났다. 그때 나와 남의 구분선이 존재함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50년 동안 나의 모든 사유를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인간의 사유는 근본 나와 남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타자성의 이해다. 그것이 출발점의 출발점이다. 이게 없으면 사유 자체가 불가능한 거다.


    내가 한 살 때 모든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타자성인데 사람들과 대화해보니 타자성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더라. 대화가 돼? 소실점과 비슷하다. 소실점은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런데 동양사 5천 년 동안 그 수많은 아시아인 중에 소실점을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보면 보이는데 왜 못 보지?


    눈을 감고 다니나?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 것이다. 기본의 기본이 있고 출발점의 출발점이 있고 시작의 시작이 있다. 그게 안 된다는 사람과의 대화는 불능이다. 필자와 같은 음치에게 화음을 가르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단조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사람을 이해 못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느낌이 안 와준다.


    나는 한 살 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다수 잊어버렸지만 어렸을 때는 한 살 때와 두 살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재미로 혼자 놀았다. 일곱 살 때 마지막으로 쓰러지기까지 햇볕에만 나가면 속이 거북하고 쓰러지는 병이 있어서 나무 그늘에서 혼자 생각하며 놀았다. 생각이 조금씩 발전해가는 과정을 죄다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만만하게 보았다. 세상을 통째로 한 방에 보낼 큰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홉 살 때 유레카를 불렀다. 선생님이 도서관의 낡은 국어사전을 나눠주고 사전찾기를 숙제로 내준 거였다. 여러 번 했던 이야기다. 제일 궁금한 단어가 보지였는데 찾아보니 씹이라고 써놨다.

 

    씹을 찾아보니 보지라고 써놨다. 자지는 좆이었고 좆은 자지였다. 젖은 유방이었고 유방은 젖이었다. 돌려막기잖아. 이건 아니지. 국어사전을 이따위로 기술한다는게 말이나 돼? 드디어 인류문명의 어떤 약점을 봐버린 거였다. 막연하게 인류는 모르지만 나는 알지 하고 있었는데 그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운명은 정해졌다.


    그 이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었는데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체계다. 인류문명은 체계가 없다. 뒤죽박죽이다. 예컨대 지구인이 외계행성을 탐사하다가 외계인이 사는 별을 찾았는데 그 별에는 수학이라는 학문이 애초에 없었다. 어? 얘네들 수학도 모르다니 띨하잖아. 그렇다면 밥이지.


    이런 느낌이다. 인류의 허술한 구석을 봐버린 것이다. 어른이 되면 국어사전을 쓰는 체계를 발표해야지 하고 그때부터 지혜를 하나씩 모았다. 이건 단순히 국어사전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의 체계에 관한 것이다. 구조론은 일곱 살 쯤에 어렷품하게 품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단서를 아홉 살 때 얻은 것이다. 


    구조론을 발전시킬 요량으로 모아둔 많은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다 까먹어 버리고 지금은 몇 개만 기억하고 있다. 라고한다의 법칙도 그중의 하나다. 선생님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 둥 하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면 라고한다를 뒤에 붙여보는 것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 어 말 되네?


    이는 관점의 발견이다. 사건 속에 당사자로 뛰어들지 말고 사건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와 객관화시켜 관찰해야 한다. 사실과 사건의 차이다. 링 위에 오른 선수가 되면 안 된다. 주관이 아닌 객관이어야 한다. 자기소개형 말투는 안 된다.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 논리를 전개하면 안 된다. 보통 말한다.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있기는 개뿔 뭐가 있다는 거지?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되어야 하는데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하는건 전제를 생략하는 무리수다. 함부로 주고받기 언어 속으로 뛰어들면 안 된다. 역시 내가 알아낸 규칙 중에 하나다. 숨은 전제 찾기다. 대화의 편의를 위해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넘어가는 거 말이다.


    그걸 깨고 들추고 폭로해야 한다. 그래야 과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한 번은 방학공부라고 방학 때 나눠주는 책이 있는데 숙제가 가득이었다. 아마 거기서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학이 강물에 한쪽 다리로 서 있는 이유는 체온을 절약할 목적 때문이라는 거였다. 위하여다. 위하여면 일단 비과학이다.


    과학은 전제와 진술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의하여라야 한다. 에너지가 치고 나가는 경로를 따라가야 한다. 학이 한쪽다리로 서는 이유는 학뿐만 아니라 모든 조류가 다 마찬가지인데 발가락과 다리의 구조가 한쪽 다리로 서는게 편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하여는 목적이며 목적은 외부에서 주어지므로 가짜다.


    원인은 내부에 대칭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의하여다. 이 규칙만 알아도 거의 모든 오류를 초 단위로 짚어낼 수 있다. 어떤 목적과 의도를 위하여 어쩐다고 말해지면 가짜다. 문장의 어색함을 느끼는 것인데 그냥 느껴진다. 말하자면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화음을 느끼듯이 느끼는 것이다. 강한 느낌이 온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위화감이 느껴진다. 짜증이 난다. 그래서 나는 잊지 못하는 것이다. 왜? 불쾌하니까. 과거에는 만화 중에 코를 바늘처럼 뾰족하게 그리고 입을 옆에 그리는 만화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런 그림체를 볼 때마다 불쾌했다. 왜 코가 바늘처럼 뾰족하고 입은 위치를 이동하여 뺨에 가서 붙어 있다는 말인가?


    기분이 나빠진다. 마찬가지다. 위하여 어떻다고 써놓은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그렇지 않은가? 스치로폴로 유리창을 닦아보자. 삐익 하는 소리가 난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가? 이런건 그냥 느끼므로 3초 안에 판단이 선다. 아닌건 아닌 거다. 내가 불쾌함을 느꼈다면 그건 무조건 틀린 거다. 논리를 들여다볼 필요 없다.


    김어준의 되도 않은 음모론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장난하나? 사람을 아주 초딩 취급하네. 화가 나는 것이다. 일단 느끼고 다음 판단하고 분석한다. 4학년 때는 대구에 있다는 무슨 학생과학관까지 가서 실험을 했는데 결과를 발표하란다. 누구도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못 했다. 돌고 돌아 내가 지목을 당할 차례다. 


    나는 자석과 쇠 사이에 어떤 힘의 방향성이 있다고 대답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말하자면 자기장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선생님은 나의 견해를 일축했다. 선생님이 스스로 말한 실험결과는 자석이 쇠를 당긴다는 것이었다. 당기긴 개뿔 자석에 무슨 손가락이라도 달렸다는 말인가? 어떻게 당겨?


    당기려면 먼저 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잡지? 나는 선생님의 말에 승복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틀렸고 문교부가 틀렸고 인류가 틀렸다. 그때는 교육부가 문교부였다. 이 사건은 내게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수년 동안 무수히 생각했다. 왜? 뇌가 간질간질했기 때문이다. 뭔가 답을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느낌은 일단 왔다.


    설명할 언어가 없을 뿐이다. 구조론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닫힌계 혹은 장이다. 토대이기도 하고 축이기도 하다. 그런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석과 쇠를 통일하는 제 3의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것은 시스템 속의 존재이며 곧 메커니즘으로 존재하며 반드시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냥 어떤 존재라는 것은 언어적으로 말이 안 된다. 존재는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구조론 용어로 말하면 조건문과 반복문의 담론 안에 전제와 진술의 명제가 있고 그 안에 다시 주어와 술어가 있고 다시 명사와 동사가 있고 마지막에 단어와 관측자가 있다. 언어는 대칭과 대칭과 대칭과 대칭과 대칭으로 있다. 


    하나의 사건 안에 다섯 개의 대칭이 있으며 그게 없으면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냥 있다는건 말이 안 되고 뭔가 있을 만한 건덕지가 있고 비빌 언덕이 있고 내용물이 있고 컨텐츠가 채워져 있어야 한다. 껍데기만 있으면 안 된다. 모든 존재는 메커니즘적 존재이며 사건의 존재이고 에너지의 경로를 지정하는 의사결정 존재다.

    

   그냥 있다는건 관측자인 인간과 대칭된 것이다. 즉 가리켜지고 지목된 것이다. 그냥 지목하면 다 있나? 그럼 귀신도 있고 요괴도 있고 초능력도 있고 다 있겠네? 있는건 있고 없는건 없다. 빛이 있으므로 그림자는 없다. 인간에게 지목될 수 있으나 실체가 없다. 자체의 통제가능성이 없다. 빛은 스스로를 통제하니 곧 파장이다.


    그림자는 파장이 없다. 명목적 존재이나 실질적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게 아니라 존재하는 양식에 의한 존재이며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반드시 있다. 각자의 레파토리가 있다. 각자의 포트폴리오가 있다. 갖춤이 있다. 어떤 통일성이 있다. 하나로 있고 일원적으로 있다. 이원론은 틀렸고 일원론이 맞다. 


    학교에서 린네의 분류이론을 배웠다. 이거다. 린네는 생물을 분류했으니 나는 무생물을 분류해보자. 가까운 것부터. 가까운 것은 물건이다. 물건 앞에 물체 있고 물체 앞에 물질 있고 물질 앞에 물성 있고 물성 앞에 물리 있다.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하루는 교생 선생님께 제논의 궤변을 배웠다.


    이 문제의 답을 찾으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물론 수학자들이 과거에 다 해명한 문제다. 발이 빠른 아킬레스가 한 걸음 앞서 출발한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 왜? 자연에 크기가 없기 때문에. 어떤 크기가 아니라 크기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아킬레스가 한 걸음을 가면 거북이는 반걸음을 간다. 이를 반복한다.


     반의 반의 반의 반의... 계속된다. 끝나지 않는다. 아킬레스와 거북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없고 크기도 없고 운동도 없다. 없을 뿐 아니라 그게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크기가 있으면 무한대의 딜레마 때문에 우주가 건축될 수 없다. 어딜 가나 무한대 개념이 괴롭힌다.


    계산을 하다보면 수렴되지 않고 확산되는 경우가 있다. 뭔가 잘못된 거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비례다. 비례는 둘의 대칭이다. 우주는 공간과 시간이 있는게 아니라 대칭과 자리바꿈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공간과 시간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둘의 대칭이 있으면 축이 있으므로 물질이 되고 계가 있어야 하므로 에너지가 된다. 


    세상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로 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대칭의 형태다. 다섯 가지 대칭이 다섯 가지 매개변수를 이루어 밀도, 입체, 각, 선, 점을 이루니 곧 사차원에서 0차원까지 다섯 차원이 우주를 조직하는 씨줄날줄을 이룬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분류하다가 패턴의 반복을 보고 찾아진 것이고 원리는 이거다.


    반복되는 패턴을 먼저 찾아놓고 그게 정체가 뭔지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헷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낸 것이 존재론과 인식론 곧 연역과 귀납이다. 관측의 딜레마다. 존재는 사건이며 인간의 관측을 통한 사건에의 개입이 모든 착오의 근원이다. 이를 알아낸 것이 24살 때다. 그리고 구조론은 완성되었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세상은 에서에서 으로의 이행이다. 이런 규칙들을 정했는데 두꺼운 노트 여섯 권에 써서 대전 유등천변 어느 바위 밑에 비닐로 싸서 감춰놓았는데 나중에 가보니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에서에서 으로는 화살표를 의미한다. 존재는 화살표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주로 점으로 표시하지만 화살표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건의 진행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점으로 표시하는건 인간의 눈으로 관측하는 기준이고 존재 그 자체의 사정을 따르면 모든 존재는 화살표로 나타내져야 한다. 반드시 방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대략 이렇게 20년쯤 걸려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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