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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 [유튜브]

원문기사 URL : https://youtu.be/aQJYt1fRoaE?si=N0saB8JOr5hl9G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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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렬  2025.03.14

나는 누구인가?


 테세우스의 배에서 판자를 하나씩 갈아끼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배를 1라고 하자. 그런데 테세우스의 배에서 갈아끼운 낡은 판자들을 버리지 않고 그걸로 다시 테세우스의 배와 똑같이 생긴 배를 만들어 2라고 부르자. 배1과 배2, 배 두 척이 생긴 셈이다. 그렇다면 둘 중에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인가?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예전부터 유명했던 듯 한데 

다들 말장난이나 하려고 할 뿐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육체는 빌려 쓰는 물질일 뿐 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육체가 내가 아닌데 영혼이 나라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영혼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치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이 그 영혼(종교)이 아니니까.


영혼 = 고립된 개인의 마음 생각

임무 = 신과 연결된 나의 역할


하드웨어는 내가 아니고 당연히 소프트웨어도 내가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나의 주도권입니다. 내 권력이 나라는 거지요.


주도권은 내게 주어진 미션입니다.

연극이라면 배우가 내가 아니고 대본도 내가 아니고 캐릭터도 내가 아닙니다.


배우의 권력은 몸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대본에서 나오는게 아닙니다.

배우의 권력은 역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미키 17은 안봤지만 복제본 나와 또다른 복제본이 대립한다면

사실 둘 중에 어느 쪽이 살아남든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동물적 생존본능이 방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극복할 문제입니다.


바가바드 기탕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임무를 완성하는 쪽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장예모의 영웅에서 이연걸처럼 진시황에게 설득되면 안 되고

진시황의 빈틈을 봤다면 쏘는게 진시황에 대한 예의입니다.


선수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격 박탈

자객이 찌르지 않으면 자격 박탈


안중근 이등박문을 죽여서 조선침략이 앞당겨지더라도 방아쇠를 당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제의 빈틈을 봤으니까.


배우는 그 무대를 완성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테세우스의 배의 임무는 무엇일까요?


부분적 손상이 있지만 배 1이 태세우스의 배입니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판자조각을 뜯어서 새로 만든 배는 배 1을 불태워야 태세우스의 배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무의 완결성으로 볼 때 배 1을 뜯어서 따로 만든 것은 원래 임무를 포기한 것이니까.

원본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건 완결성이며


원본을 지키려고 보강한건 허용이 되는데 

어떤 이유로 따로 만들었다면 원본을 지키려는 임무를 떠나 다른 생각을 한 것입니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가져온 썩은 나무는 썩은 나무일 뿐

테세우스 전성기의 배와 같은 모습도 아니고 원형을 보존할 의도도 아니고. 그냥 만들어본듯.


이것은 친자냐 양자냐의 문제와 같은데

양자를 친자로 착각하고 키웠다면 친자입니다. 유전자가 중요한게 아니지요.


친자의 임무를 하면 친자입니다.

중요한건 인간의 의도라는 말입니다. 양자를 친자로 착각했다면 의도가 친자입니다.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이다.

권력을 결정하는 것은 임무의 완결성이다.

완결성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도다.


이 문제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권력과 나의 완결성과 나의 의도가 바로 나라는 말입니다. 


육체나 영혼은 내가 아니며 임무가 나입니다.

임무에서 권력이 나오기 때문에, 임무가 나를 완결시키므로, 임무가 나의 의도이므로.


문제는 임무는 전체와 연결되어 성립한다는 것

신과 연결되어야 나의 임무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에게서 파견된 존재이며 죽으면 신으로 돌아갑니다.

타인은 나의 다른 버전이며 자식은 나와 동일하거나 나보다 더 나입니다.


나는 죽지만 나보다 자식이 더 나입니다.

이는 독립지사나 자신의 목숨보다 민족을 우선하는 이유입니다.


나와 내 자식 중에 하나가 나라면 내 임무를 이어받는 내 자식이 더 나에 가깝습니다.

자식과의 연결을 부정하면 신과의 연결도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은 것은 물질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은 다음에 무엇을 할지 계획이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의 계획을 나의 계획으로 삼으면 죽음의 두려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