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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9793 vote 1 2013.12.01 (23:37:21)

 


    1. 의사결정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자의식이다. 자아는 의사결정주체이고 의식은 의사결정영역이다. 중요한건 의사결정이다.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해낼 수 있느냐가 인간다움을 결정한다.


    국가에 비하면 자아는 주권이고, 의식은 영토이고, 국민은 신체다. 국민은 정해져 있으나 영토와 주권은 변한다. 신체는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만 자아와 의식은 후천적으로 성숙되고 확장된다.


    ◎ 국가의 3요소 - 영토, 국민, 주권
    ◎ 인간의 3요소 – 의식, 신체, 자아


    주권은 국민을 노예에서 주인으로 올라서게 하고, 영토는 개인에서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는 노예의 마음에서 주인의 마음으로 올라서게 하고, 의식은 개인의 마음에서 인류의 마음으로 확장되게 한다.


    ◎ 자아의 높이 – 노예인가 주인인가?
    ◎ 의식의 넓이 – 개인인가 인류인가?


    국가의 실체가 있어도 영토를 잃거나 주권을 잃으면 존중받지 못한다. 약소국은 의사결정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사람도 의식을 넓히고 자아를 성숙시켜야 의사결정의 상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이 실제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느냐다. 아이가 보채고 우는 것은 주체적인 의사결정이 아니다. 자신의 문제에 엄마를 개입시키는 행위다. 의사결정을 엄마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호랑이가 무서워 도망간다면 의사결정은 호랑이가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섹스가 하고 싶어서 섹스를 한다면 성호르몬이 결정한 것이지 내가 결정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인가?


    흔히 사물 내부의 고유한 속성에 의해 의사결정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달고, 생선이 비린 것은 그 내부의 사정이다. 소금과 설탕과 생선 안에 짠맛과 단맛, 비린내의 요인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천만에. 소금은 짜지 않고, 설탕은 달지 않고, 생선은 비리지 않다. 그것은 뇌가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 소금과 설탕의 이온이 내는 전기신호를 뇌가 임의로 해석한 것이다.


    내부요인과 외부요인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마음은 상당부분 외부요인이 결정한다. 자동차가 어디로 가느냐는 도로가 결정한다. 결대로 가는 것이다. 마음은 상당부분 공동체에서 걸린 스트레스가 개인의 내부에 반영된 것이다.


    나의 욕망이 나의 몸뚱이 내부의 사정에 연동되어 결정되는게 아니라 대개 인류의 집단의지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인류학이 이를 증명한다. 내가 원하는 출세, 성공, 야망 이런 것들이 부족민에게는 없다.


    심지어 그들은 섹스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부족이 이웃 부족과 잠재적 전쟁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씨족 내부는 대부분 근친이다.


    부족민들은 성본능이 상당부분 억제되어 있다. 전투 중의 짧은 휴전시기나 혹은 이웃 부족 남자들이 사냥을 핑계로 슬쩍 자리를 비워주었을 때라야 습격의 형태로 겨우 섹스가 가능한 정도이다.


    인간의 욕망은 집단의지가 투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의지가 강한 유태인은 노벨상을 휩쓸고, 집단의 의지가 약한 부족민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개인의 욕망은 집단의 의사결정구조가 지배한다.


    그러므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가르는 분명한 경계는 없다. 그것은 각자가 정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의사결정영역이 넓은 사람과 좁은 사람이 있다. 이를 넓혀가는 것이 의식의 확장이다.


    세 가지 경계면이 있다. 첫째 나와 타자의 경계면이다. 둘째 개인과 인류의 경계면이다. 셋째 인류와 비인류의 경계면이다. 세 가지 의식의 지평선이 있다. 지평을 넘어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 나와 타자의 경계면 ..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 개인과 인류의 경계면 ..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인류와 비인류의 경계면.. 창의하고 진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 나와 타자의 구분이다. 도무지 어디까지가 나에게 속하고 혹은 타자의 영역인가? 가족은 어디까지가 가족인가? 가족이나 친구의 어느 부분까지 나의 참견이 허용되는가?


    마약에 중독되었을 때 그 중독된 부분을 나로 볼 것인가? 마약을 복용하고 싶다면 그것은 나의 욕망인가? 이 부분에서 확실히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끊어야 할 때 끊을 것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이성은 원하지 않는데 몸이 요구하고 마음이 유혹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확고한 이성의 지배를 실현시켜야 한다. 알콜중독을 끊고 니코틴중독을 끊어야 한다.


    가족중독도 심각한 사회문제다. 임성한의 미친가족월드에 묘사되는 타인의 의사결정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는 재난 말이다. 친구라거나 혹은 후배나 부하라는 이유로 개입한다면 의사결정의 재난이다.


    둘째 인류 앞에서의 대표성이다. 나의 욕망들은 나의 내부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속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의지가 내면으로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의지를 명확히 읽어야 한다.


    의사결정에 임하여 집단과 개인의 대결구도가 이루어진다면 개인이 우위에 서야 한다. 이 부분의 의식은 노무현과 같은 뛰어난 리더의 특징이다. 스님들이 한 소식 했다면서 이거 안되는 경우가 많다.


    뭔가 깨달은 듯 하지만 평화로운 산중에서나 평상심의 유지가 가능할 뿐, 세속으로 오면 호텔에서 도박하다 걸린 조계종 스님으로 퇴행하고 만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쫄지 않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30년간 산중에서 수도한 스님이 정치판에서 훈련받은 지도자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불타는 자동차에서 어린이를 구출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느냐다. 일본 지하철역에서 술취한 사람을 구하려고 몸을 내던진 고 이수현씨처럼 말이다.


    셋째는 인류와 비인류의 경계면이다. 일체의 처음 시도되는, 신대륙으로 가는, 창의, 창작, 창발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다. 이 세 번째 경계면이야말로 인간과 짐승을 구분짓는 구분선이다.


    개는 언제나 개일 뿐이고, 고양이는 언제라도 고양이일 뿐이다. 다만 인간은 다르다. 10만년 전 크로마뇽인과 현재의 문명인은 분명히 다르다. 자기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인간이다.


    당신이 인간인 것은 인류의 집단 작업 안에서 당신이 한 명의 선수로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팀에 들어서 팀 플레이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벗어난 히틀러나 일베충은 인간일 수 없다.


    인간임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창의하고 진보해야 한다. 예술가만 창의하는 것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의 작품은 신의 완전성을 반영한 작품이다. 기업가나 정치가라도 완벽주의로 갈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설거지를 해도 완벽한 설거지가 있다. 일체의 처음 시도되는,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행위는 창의다. 영화를 보거나 옷을 입어도 창의적인 삶의 스타일은 가능하다.


    ◎ 개인에게서 끊을 것은 끊어라.
    ◎ 집단 앞에서 결단할 것은 결단하라.
    ◎ 세상 앞에서 없는 것을 새로 시도하라.


    의식의 확장은 세 가지 의사결정능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반드시 끊어야 하는 상황에서 술, 담배, 마약, 가족, 섹스, 취미, 기호, 두려움, 미련, 강박증, 일체의 심리적 억압을 끊을 수 있는가?


    물론 끊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면 상관없다. 그러나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불안장애, 강박증, 심리장애 따위 정신질환은 개인의 결정을 사회에 떠넘기는 장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하면 인류는 위태로워진다. 차라리 모르는 일은 집단에 떠넘기도록 인간의 뇌는 세팅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떠넘기면 인격이 미성숙한 것이다.


    둘째 자신이 희생해야 할 상황에서 가족, 국가, 집단, 인류, 공동체를 대표하여 냉철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원래 공동체를 위해 결단하도록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그 공동체의 범위가 좁다. 가족을 위해 희생은 하는데 국가를 위한 결단은 못한다. 더 나아가 인류는 고려하지 못한다. 엄마는 언제라도 아기를 위해 몸을 던져 희생할 수 있다.


    아기 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결정적 시기에는 뛰어들어야 한다. 예수가 그랬고 전태일이 그랬듯이 말이다.


    셋째 잘하든 못하든 떠나 신의 완전성을 반영한 예술가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인류호의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소비를 하더라도 실용적인 소비보다 예술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


    인류의 집단지능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못되어도 예술작품의 관객이 될 때 그만큼 인류의 아이큐는 높아진다. 인류의 문제해결능력은 향상된다. 창의하고 모험하는 자의 포지션에 서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되는 사람은 의식이 완성된 사람이다.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그러려면 인생이라는 무대 앞에서 을이 아닌 갑의 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자아의 성숙이다. 노예 포지션에서 주인 포지션으로 갈아타야 한다. 의식의 확장은 자아의 성숙에 의해 격발된다. 남자나 여자의 신체로 태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노예와 주인의 지위는 노력하여 바꿀 수 있다. 주인이 되려면 주권을 얻어야 한다. 개인의 주권은 죽음의 극복에서 얻어지고 사회의 주권은 자기 스타일의 완성에서 얻어진다.


    ◎ 나와 환경의 대결에서 죽음을 극복하라.
    ◎ 나와 세상의 대결에서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라.


    회사에 비유한다면 의식은 업무와 같고 자아는 직책과 같다.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하려면 많은 업무를 획득해야 하지만 동시에 높은 직책에 올라서야 한다. 그것은 첫째 죽음의 극복, 둘째 스타일의 완성으로 가능하다.


    죽음의 극복은 자기 안에서 갑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환경이 두렵다는 말이다. 환경과 인간의 대결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삶이라는 회사에서 대리든 과장이든 직책을 얻는다.


    죽음이 두렵다면, 호랑이도 무섭고, 질병도 무섭고, 뱀도 무섭고, 불량식품도 무섭게 된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이미 노예가 되어 있다. 능동적인 의사결정의 권한은 포기한 셈이다.


    사회의 주권은 스타일의 완성에서 얻어진다. 일관된 자기다움을 형성해야 한다. 예술가라면 예술가다운 고집이 있어야 하고, 정치가라면 정치가다운 이상이 있어야 하며, 교사라면 스승다운 품격이 있어야 한다.


    대개는 남의 행동을 보고 자기 행동을 결정한다. 자기가 우러러보는 사람이 가는 방향으로 가거나 아니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가는 반대로 움직인다. 대칭행동을 하는 것이다. 비대칭으로 갈아타야 한다.


    자기 스타일을 완성할 때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능동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나는 가만있는데 질병이 엄습하고, 재난이 닥치고, 도둑이 침범하고, 외적이 쳐들어와서 의사결정하면 실패다.


    질병이 없고, 재난이 없고, 도둑이 없고, 적군이 없어도 능동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다는듯이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이처럼 말이다.


    이런이는 가만두어도 잘만 뛰어노는데 어른은 왜 질병과 이별과 도둑과 적군과 악당에게 걸려 곤욕을 치르고서야 의사결정에 나서는가?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부분과 부분들을 하나의 커다란 모듈에 연동시켜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파도 아프지 않고, 지구가 오염되어도 아프지 않고 따라서 아무런 의사결정을 못하는 것이다.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서로 연결시켰다는 것이며, 지구와 나의 관계가 방송국과 라디오의 관계로 연동시켰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그런 사람은 얼굴빛이 상기되어 있으며 내면의 에너지가 끓어 넘친다. 기운이 펄펄 난다. 세상과 한통속으로 연동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신호를 감지해낸다. 안테나가 살아있다.


    의식의 확장에 이르는 세 가지 의사결정과, 자아의 성숙에 이르는 두 가지 포즈를 갖추면 그 사람은 지성인이다. 혹은 깨달은 사람이다.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 죽음을 극복했는가?
    ◎ 자기 스타일을 완성했는가?
    ◎ 끊어야 할때 끊어낼 수 있는가?
    ◎ 언제라도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가졌는가?
    ◎ 창의하고 진보하는 삶을 사는가?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이다. 먼저 결정권을 얻어야 한다. 죽음을 극복하면 인생의 수비수에서 공격수로 포지션이 바뀐다. 언제라도 공격수가 결정권을 가진다. 스타일을 완성하면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결정권을 얻었으면 당신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 구태여 끊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는 끊을 필요가 없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모조리 끊는다면 자기 삶을 왜소하게 만들 뿐이다. 삶은 풍부할수록 좋다.


    술도 좋고 담배도 좋다. 다만 끊어야 할 때는 확실히 끊을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는 그냥 살면 된다. 그러나 누군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몸을 던져야 한다. 더 나아가 창의하는 삶, 모험하는 삶, 앞장서서 길을 여는 삶, 진보주의자의 삶, 완전성을 실천하는 삶, 신의 길을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인가? 결정하지 않으면 결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인격자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의식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공동체와의 소통되는 정도에 따라서 일시적으로는 고도의 의식적인 행동이 가능하다. 주위에서 바람을 잡아주면 냉철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훈련된 병사처럼 해낼 수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지 못하고, 주변에서 바람을 잡아줘도 못한다면 의식박약이다. 앞장서서 길을 열어가지는 못해도 모든 사람이 함께 가는 길은 더불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도 못하는 분은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무득

2013.12.02 (11:23:11)

불교에서는 무아설과 자아설(윤회설)이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데 이를 주제로 한말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12.02 (11:46:48)

불교는 좋은 언어들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가 헷갈립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없이 제 자리를 맴도는 것과 같죠.


무아는 나가 그냥 없어지는게 아니고 작은 나에서 인류의 나, 우주의 나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의사결정단위를 높여간다는 거죠. 윤회설은 그냥 헛소리입니다.


물론 불교라는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에게는 무리한 주문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지요. 종교를 버리라고 할 수도 없고.

[레벨:5]희정

2013.12.02 (19:16:56)

윤회설은 불교가 탄생하기 이 전부터 있었던 인도 전통사상입니다.

그 전에 없었던 것을 싯달다 태자가 윤회를 설 한 것이 아니라는거죠.

따라서 가끔 차용됐을뿐, 엄밀히 말하면 불교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윤회설이 민초들에게는 워낙 뿌리깊이 남아 있는지라 자꾸만 찾아와서

어떻게 살아야 다음생이 더 좋겠냐고 진지하게 물으니 그런거 없으니

걍 니 꼴리는대로 살라고 할수도 없고, 차카게 살면 좋은 과보 받는다고

해야지.. 우짜겠습니까?

프로필 이미지 [레벨:30]ahmoo

2013.12.02 (11:34:53)

삶과 인류와 문명의 비전에 관한 21세기 완벽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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