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적 직관이 머리에 열내서 생각하는 것보다 쉬운것을 보고 깨달은 것들이오.
생각하지 말고 느껴야 합니다.
대칭은 긴장의 전선을 느끼는 것이고,
호응은 긴장의 전환에 시원해지는 것이다.
타자성의 감각이 왜 중요하냐면, 타자성이야말로 안/밖의 긴장을 최초로 느끼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큰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긴장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구조론적 감각의 상당부분은 긴장을 오래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만난 사람에게도 마치 가족처럼 친근하게 대하면 긴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편과 적군의 긴장은 리더와 무리의 긴장으로 옮겨갑니다. 무리가 리더에게
힘을 몰아주는 순간에도 긴장해야 합니다. 이 자식이 권력잡고 뒷통수 치지는 않을 까?
중심이 이동해야 하는 상황 역시 긴장해야 합니다. 왕이 전장의 장수에게 병사를 줄때는
회군해서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긴장이라는 것은 1이 아닌 2사이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전선입니다.
즉 처음부터 1인 것은 없으며 2가 마치 하나로 행세할때 외부에서 보기에 1로 느껴지는 것이며
내부에서 2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처음 부터 우리편인 것은 거짓말 이라는 것입니다. 국가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발화되면서 큰 긴장이 작은 긴장으로, 2 에서 1로, 타인에서 가족으로 옮겨갈수는 있습니다.
호응은 긴장의 전선이 옮겨가면서 느껴지는 시원함입니다.
혹은 다음단계가 보이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과 박근혜를 보면 답답합니다. 시진핑과 트럼프 역시 답답합니다.
답답함은 특정한 긴장의 전선이 계속해서 유지되어서 짜증나는 것입니다.
긴장이 전환되지 못하면 사건은 기어이 깨져버립니다.
돈이 부족한 부부라면, 데이트라도 해야합니다. 하나의 긴장을 다른 긴장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전쟁은 경제로 풀고 경제는 문화로 풀어야 합니다. 역시 긴장의 전선이 옮겨갑니다.
긴장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죽음 뿐입니다. 안느끼려고 할수는 있어도 기어이 긴장은 존재합니다.
그 긴장의 끈을 놓지않고 기어이 사건의 끝까지 긴장을 전환시키는 것이 구조론자의 미덕이라고 생각됩니다.
글이 갈수록 쉬이 읽혀 집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