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3600 vote 0 2002.09.09 (15:02:33)

[존재와 비 그리고 배달]

있음 곧 존재란 집합구조다. 있다는 것은 존재의 집이 변화의 식구들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집합을 해체하여 거기서 힘과 운동과 량을 끌어내므로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나 이는 보이는 작은 일면일 뿐이다.

존재의 반대편에 비가 있다. 비는 모든 존재의 집합으로부터 끌어낸 힘과 운동과 량의 원소들을 존재의 집으로 되돌려보낸다. 존재는 발명되는 세계에며 비는 발견되는 세계이다. 창조는 양자의 통일이다.

어떤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비례식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모든 발명은 모든 발견에 의해 성립한다. 자동차를 발명하기 전에 먼저 자동차의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비는 발견되는 세계이다.

※ 제 1세계 - 정보의 내용.
발명되는 세계, 존재의 세계, 집합과 원소의 세계, 엔트로피 증가의 세계,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세계, 양의 세계, 물질의 세계, 공간의 세계. 관찰의 세계, 접촉되는 세계, 현상계.

※ 제 2세계 - 정보의 각단위.
발견되는 세계, 비의 세계, 자유에너지의 세계, 피드백의 세계, (위치, 전기, 화학, 운동, 마찰)의 세계, 음의 세계, 에너지의 세계, 시간의 세계, 귀납의 세계, 인식되는 세계, 본질계.

※ 제 3세계 - 정보의 실체.
창조의 세계, 배달의 세계, 정보의 세계, 쌍방향통로의 세계, (자기복제, 집적, 구조, 일반, 분류)의 세계, 시스템의 세계, 정보의 세계, 시공의 세계, 연역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신의 세계.

[신의 증명]

우리는 어떤 단단하고 야무진 것들을 접촉하여 관찰하고 경험하므로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화하므로 해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우리가 절대적인 무엇이라 믿었던 단단하고 가득한 것들은 돌연 거품처럼 꺼져버리고 죽어버리고 사라져버린다.

제 1의 세계는 접촉되고 관찰되지만 죽고 부서지고 없어진다. 그래도 에너지는 남는다. 이쪽에서 없어지는 만큼 저쪽에서 생겨나고 양자 사이에는 일정한 비례가 있다. 우리는 분석하고 귀납하여 그 이치를 알아낸다. 제 2의 세계이다.

어느 쪽도 실재는 아니다. 궁극적인 것은 정보 뿐이다. 정보는 배달된다. 신의 창조는 정보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발명은 제 1의 세계에 대한 개입이요 발견은 제 2의 세계에 대한 개입이다. 제 3의 세계, 순수정보의 세계는 발견되지도 발명되지도 않는다. 오직 깨달을 뿐이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다. 원자나 분자들, 소립자들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호수에 물결이 생겨나듯 생겨난 것이다. 신은 호수와 바람을 창조했지 물결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신의 증명은 창조 제 3의 세계가 물질 제 1, 에너지 제2의 세계에 대해 우위임을 논증하므로서 완성된다. 정보의 세계없이 정보의 1단위인 에너지나 정보의 내용인 물질이 생겨날 수 없으며 정보의 세계가 에너지나 물질에 선행함을 증명하므로서 신은 명백히 증명된다.

[물리학의 종말]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로 세계를 파악한다. 모든 학문의 궁극적 근원은 물리학이며 물리학은 물질을 파악하다가 에너지의 벽에 막혀버렸다. 에너지는 발견되는 원리이지 실험, 접촉,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입자물리학이 소립자를 계속 쪼개면 최후에 무엇이 남는가? 없다. 양파껍질을 까면 남는 것은 없다. 근원의 소립자는 내부가 없다. 원자설의 발상자체가 맹랑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결코 쪼갤수 없는 소립자는 없다. 쪼개어도 남는 것이 없는 궁극적 소립자는 있다. 궁극적 소립자의 성질은 그 소립자 내부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그 외부와의 위상관계로만 있다.

외부의 영향을 배제했을 때 근원의 소립자는 증발해버린다. 외연을 끊고 근원의 소립자는 아무런 정보도 가지지 않는다. 물질의 본질은 정보인데 그 정보는 소립자에 고유하지 않다.

입자라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다. '집합구조'가 바른 표현이며 그것은 기하학적 배열형태이다. 집합구조는 물질이 정보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물질 그 자체의 본질은 따로 있다.

물질은 기하학적 집적구조를 가지므로서 정보를 유지한다. 궁극의 입자는 알갱이가 아닌 순에너지이며 물질단위가 아닌 정보단위이다. 정보의 집은 에너지다. 입자는 에너지의 대지에 지어진 건축일 뿐이다.

[신의 이야기]

최초에 신이 존재했다. 신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은 자기존재를 인식할수 없었다. 신 아닌 것은 없었으므로 비추어볼 거울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자기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을 만들었다.

자기 아닌 것은 없으므로 거울은 자기내부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방법은 자기를 잘게 분할하여 조직하는 것 뿐이다. 신은 자기 내부에서 자기를 조직했다. 세상은 신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신 내부에서 신의 몸이다.

신으로부터 쪼개진 부분들이 신에게서 떨어져나가서 안된다. 신 아닌 것은 없으므로 회수할수 없기 때문이다. 가두어야 한다. 그것이 집적이다. 낱낱의 부분들을 조직하여 역할의 끈으로 묶었다.

역할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정되고 독립해야 한다. 한정되면 멈추고 독립하면 이탈한다. 이에 쪼개어진 것들을 다시 쪼개는 재분할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조화다. 이로서 각 단위들이 정보를 획득한다.

세상은 자기복제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신이 자기자신을 잘게 쪼개어놓은 세포를 하나의 단위로 묶고 다시 재분할한 것이다. 재분할의 조직화는 신이 자기를 조직하는 과정을 모사하여 인간에게서 반복된다.

신이 자기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자기정체성을 획득하듯 인간 또한 자기정신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자아, 곧 자기주도권을 획득하게 된다. 깨달음이다. 진리는 신에게서 이루어진 조직화가 인간에게서도 동일하게 반복됨을 나타낸다.

[신의 의미]

자기복제는 정보생산이고 집적은 정보의 1단위이고 구조는 정보기록이다. 일반은 정보전달이고 분류는 정보보존이다. 이론들은 존재를 궁극에서 정보로 파악하는 것이며 유물론에 대해 유심론이다.

신은 명백히 존재한다. 또한 증명된다. 신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딘가의 주인으로 존재한다. 신의 존재는 세계가 창조적 세계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역동적 호흡임을 의미한다.

물질은 없다. 정보의 기록방식일 뿐이다. 에너지는 없다. 정보의 1단위일 뿐이다. 물질도 없고 에너지도 없으므로 그 모든 그림자들의 실체, 그 정보의 주인이 있어야 하는 즉 신이다.

전체와 부분이 닮은 꼴이며 세계와 개인은 분리하여 생각할수 없는 단일체이다. 개인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독자적 정체성영역을 가지지만 신의 의지를 모사하고 있으므로 본질에서 같다.

신의 존재는 세계와 개인이 공동목표를 지니고 쌍방향 통로를 개설하여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는 진보하며 문명은 기록한다. 역사는 신과 인간의 대화이며 문명은 신의 의지를 인간의 영에 투사함이다.

인간은 배달하는 존재이다. 신 앞에서 맡은 바 역할을 한다. 할수 있는 것이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의 배달이며 문명으로의 배달이다. 그것은 신에게 신을 확인시키는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은 자기확인을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 모사된 존재인 인간은 자기실현을 위해 삶을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능한 것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겨우 자기자신이 될 수 있다.

신의 권능은 창조에 기초하고 인간의 권능은 인격성에 기초한다. 인격성은 인간의 자기실현 가능성이다. 인간은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이라는 인성의 부처를 감추고 있다.

인간에겐 불성이 있다. 누구나 내면의 부처를 감추고 있다. 신의 창조에 기여할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모든 자격은 신의 창조를 자연에 배달하고 역사에 실천하고 문명으로 기록할 가능성으로서의 자격이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있다. 이기주의는 토대가 되고 이타주의는 상부구조가 된다. 공리주의 사회주의의 이타주의가 이기의 토대를 잃을 때 파시즘적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되며 쾌락주의, 개인주의의 이기주의가 윤리의 상부구조를 잃을 때 퇴폐주의적 타락으로 빠지게 된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분리, 대립될 수 없다. 그러나 이기주의가 먼저고 이타주의가 나중이다. 이기주의가 기초가 되고 그 위에 이타주의의 집을 짓는다. 인간의 목적은 내면에서의 자기완성이며 이를 외화하여 사회적 표출로서의 자기실현은 그 다음의 단계이다.

깨달음은 내면으로부터의 이기적 자기완성이다. 자기가 자기 내부에서 도달할수 있는 가능성의 전부에 도달해보기이다. 그것은 자기다움이다. 가장 자기다운 자가 진정 완전한 자이다.

올바른 이기주의는 타인을 위하여 선하기 앞서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를 가꾸어낸다. 내면의 부처를 가꾸어야 한다. 타인에게 주기 위해서는 먼저 가져야 한다. 이기주의 없는 이타주의는 위험한 착각이다.

어떤 위대한 자선가라도 자기 것을 베풀지 않는다. 그들은 남의 것을 남에게 준다. 돈이나 쌀은 자기 내부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밖에서 얻은 것을 밖으로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자선일수 없다.

자기 내부의 것을 주어야 한다. 무엇을 줄수 있는가? 마음 뿐이다. 무엇이 가능한가? 사랑 뿐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관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친구가 되어줄수 있다. 이것이 인간게서 가능한 자선의 전부다.

모든 이타주의는 진정한 이기주의에 의해 가능하다. 그대 타인에게 베풀려거든 무엇보다 먼저 가지라. 가진 자만이 줄수 있다. 먼저 자기자신으로 돌아가라. 신이 그러하였듯이 인간도 그리하여야 한다.

참된 이기주의 - 외부의 단서를 끊고 내부에서 자기완성을 지향.
이기주의 승화 - 개인적 자기완성에서 사회적 자기실현으로 진보.
이기주의 타락 - 외부와의 접촉을 통한 외부에서 자기를 찾기.(향락 퇴폐)

참된 이타주의 - 자기 내면의 것을 타인에게 제공.
이타주의 승화 - 믿음과 사랑을 통한 타인과 관계맺기.
이타주의 타락 - 간섭, 심판, 충고, 타인의 인생에 침투하기

먼저 내면의 부처에게 인사하라. 악은 늘 선의 이름으로 자행되곤 했다. 누구도 타인을 침해하지 않고 타인을 도울수 없다. 신은 이기적이다. 신은 인간을 위해 창조하지 않는다. 신의 선은 인간이 이미 신의 일부일 때 가능하다.

깨달음은 이기적 행위이다. 깨달음없는 이타주의는 위험하다. 타인을 침해하지 않고 타인을 도울수 없다. 모든 선은 모든 악의 절반이다.

[신과 인간]

사람들은 묻는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하고. 나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그대 자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을 의심할 능력을 가진 대단한 사람들이 그 지혜로도 자기존재에 대해서는 턱없이 믿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인간은 없다. 내 태어나기 전에 나 없었고 내가 죽고 난 후에 나 없다. 탄생과 죽음 사이 작은 틈새에 내가 있음이 없음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있는 것은 생명성인 즉 나는 없고 생명성은 있다.

처음 하나의 물질에 지나지 않았다. 한 여인의 자궁에서 갖추어졌으나 풍선에 바람이 든 것과 같아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생명이며 '나'는 거기에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나일수 있는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개나 고양이 생명을 가지고 있어 '나' 일수 있으나 돌과 흙에 생명이 없는 즉 '나'가 없다. 생명현상이 존재한다. 그 생명현상의 근거인 생명성 또한 존재한다. 그 생명성의 샘에서 생명현상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우리는 삶이라 부르며 그 삶의 주인을 '나'라고 부른다.

정자와 난자에 생명현상은 있으나 생명성은 없다. 자궁속의 태아에게 생명성은 있으나 삶은 없다. 살인은 살생과 다르며 살인은 인격성의 살해이지 생명성의 살해는 아니다.

풀이나 나무에도 생명성은 있고 바퀴벌레나 도롱뇽에게도 생명성은 있으나 생명성의 한가지인 인격성은 인간에게만 있다. 인간이 만유의 영장인 것은 인격성(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는가' 하는 말은 내게 생명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존재한다. 내게는 명백히 생명성이 있다. 나무나 풀의 얕은 생명성이 있고 인간에겐 인격성의 높은 생명성이 있다. 더 높은 곳에 신성이 있다.

신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생명성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으며 그 생명성의 주인인 신성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인간이 인격성으로 하여 영장인 것은 인격성이 신성과 교감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없다면 신성이 없을 것이며 신성이 없다면 신성의 외화인 생명성도 없을 것이며 생명성이 없다면 생명성의 한가지인 인격성도 없을 것이며 인격성이 없는 즉 나도 없을 것이다. 돌이나 흙에 '나'가 없는 것과 같이.

신이 존재하는가고 묻는 그대여 '그대는 과연 존재하는가?' 그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대의 생명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생명성의 주인인 신성을 긍정한다는 말인즉 이미 그대는 신을 긍정하고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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