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사랑해... 너를."
전형적인 영어식 발화 방법이다. 영어가 명사중심언어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영어를 만든 사람이 명사중심언어라고 완벽한 설계를 하고 그렇게 만든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명사중심언어가 된 것이다. 대신 어순이 그것을 명사중심언어로 만들었다. 주동목 말이다. 목적어가 가장 뒤에 있으며 목적어가 명사다. 반면 주목동인 한국어는?
"나는너를... 사랑한다" 주목동인 한국어의 어순이다. 동사가 가장 뒤에 위치하는 동사중심언어다. 언어는 가장 뒤에 위치하는 게 화자의 관심사가 된다. 이는 언어가 추론과정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추론은 둘로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추론한 걸 너에게 복제하는 게 언어다. 주어와 목적어로 동사를 추론하는 게 한국어다. 한국어는 동사가 가장 뒤에 있으므로 동사의 표현에 집중한다. 동사를 잘 말해야 화자의 의도가 잘 전달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는 서술어가 유난히 발달한다. 우리라는 표현이 영어와 다른 것도 이 때문이고.
한국인이라면 "I study English" 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 영어인은 "I am English student" 라고 말한다. 차이가 보이는가? 한국인은 study라는 동사에 힘주어 서술하지만 영어인은 English student라는 명사에 힘주어 명명한다. 한국어는 서술어가 복잡하게 전개된다. 명사로 표현하면 끊어지겠지만, 한국인이 동사로 말하다보면 이건 그런데 저건 아니고 하면서 길어지는 게 당연하다.
I was hoping to see you. (오리지널영어)
I hoped to see you. (한국식영어)
I am not a fighter.(아케인 중)
> 난 싸움 못 해.(한국어 번역)
이는 영어를 쓰면 단문으로 잘 끊어지는 것과 대조된다. 한국어는 길게 말하다가 주어와 호응이 안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길게 말하다보면 주어가 뭐였는지 까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언어의 목적은 같다. 화자가 관측한 사건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영어는 일단 명사를 선언하고 그 다음에 who is.. which is.. 하는 식으로 선언한 명사에 대한 부가설명을 덧붙여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
반면 한국어의 어순은 연역하기 좋게 생겼다. 명사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어의 방법은 거꾸로인 귀납이라는 것이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가리킨다. 모순이 발생하므로 이를 해결하고자 한국인은 동사로 길게 설명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 동사를 사용하여 더 큰 전제를 말해야 하니깐. 두 어순 모두 나름의 한계를 보충하는 꼼수가 생긴다.
영어는 귀납이다. 나부터 시작된다. 작은 나에서 큰 세계로 관점방향이 머리에 머리를 물며 확대된다. 영어는 인간관점(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다. 동사는 명사와 명사를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 그래서 말하기가 쉽다. 한국어가 어려운 것과 대조된다. 영어의 명사는 눈에 잘 보이니깐. 눈에 잘 보여서 명사를 붙인 거니깐.
Node가 이렇다. 꺾이는 부분이다. 동사인 Edge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노드가 선행해야 둘 사이를 잇는다. 그러나 사실은 에지가 먼저라는 걸 알면 깨달음이다. 인간의 입장이 반영된 게 선노드후에지 어법이고, 자연은 선에지후노드다. 관측자 입장에서 명명하면 이렇다. 자연과 인간의 관점이 다른 것은 자연의 사건은 중첩되어 연역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관측한 어떤 노드는 그 이전에 어떤 에지에 의해 낳아진 것이다.
설명이 복잡해져 헷갈리는 이유는 자연과 인간의 관점이 반대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를 두고 자연의 방향에서 명명한 것과 인간의 반대 방향에서 명명한 것이 다르다. 말할 때마다 연역어순에 의하거나 귀납어순에 의한 단어라고 말하려면 말이 너무 길어지잖아. 청자가 눈치껏 알아들을 수밖에.
그리고 두 언어의 어순에 차이가 나는 것은 화자 간 생각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의 방향은 개인의 관계에서 유래한다. 옛날 사람들이 어법 같은 걸 신경써서 설계했겠는가? 말하다 보니 정착된 것이다.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 이전에 관점의 공유다. 농경민어와 유목민어의 차이라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농경민은 자립이 가능하지만 유목민은 집단을 이루어야 한다. 개인어와 집단어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로컬은 서로가 아는 것이 있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어순이고, 글로벌은 모를 때 사용한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으므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서술어로 표현하는 게 한국어고, 공유하지 않으므로 나로부터 표현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게 영어다. 가령 당신이 외계인과 대화를 할 때는 자연스럽게 영어의 어순으로 말하게 된다는 말이다. 공유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먼저 나를 가리키고, 밥 먹는 시늉을 한 뒤에, 밥을 가리켜야 청자가 순서를 이해한다.
#
그래서 어쩌라고? 길게 설명했지만 해법은 단순하다. 한영을 번역할 때는 한국말의 동사를 영어의 명사로 만드는 것에 신경쓰라는 말이다. 한영 번역을 할 때 어순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동사를 명사화하는 것이다. 어차피 문장을 다 읽고 이해하는 놈은 없다. 각 언어권 사용자들은 키포인트만 찾아서 문장의 핵심을 잡는다. 한국학생들이 영독해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동사를 찾아헤맨다. 한국어가 그러니깐. 근데 영어인들은 동사를 대충 쓰고 명사에 주제를 심혈을 기울여 반영한다. 독자가 엄한 데를 짚으니깐 독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한국인이 영어로 작문해도 같은 현상이 생긴다. 한국인은 한국화영어를 잘 알아듣는게 이유가 있었다.
명사화, 이것만 알아도 대화는 된다.